현실적인 것은 무엇일까
실제는 무조건 현실적인 것이고, 허구는 무조건 비현실적인 것이라 여겼다. 나는 내가 영화를 만들 때, 만약 가장 현실적인 영화를 만들라고 한다면 그냥 카메라로 내 하루를 찍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일어나서 학교에 갔다가 가족들과 밥먹고 친구 만나고 또 자고 뭐 그렇게 현실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 등 허구의 창작물에 있어 가장 현실적인 것이라 착각했다. 착각은 몇 년 전에 친구들과 첫 영화를 찍을 때서야 깨졌다. 시나리오를 다 쓰고 주위 남자애들 중 남자 주인공 역할을 할 애를 골라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었다. 셋이 사당동의 까페에서 대본리딩을 했었는데, 아직 여자 주인공 역할을 할 애를 구하지 못해 나나 시놰가 여 주인공의 대사를 읽어야만 했다. 내가 쓴 시나리오니까 내가 먼저 여자 주인공 역할을 맡아 리딩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난 내가 평소 말하듯 보통 사람의 말투로 대본을 읽으면 그것이 실제처럼 보일 것이라 생각을 해서 그렇게 했는데, 그것은 내 생각과는 달리 매우 비현실적으로, 가짜처럼 들렸다. 내가 포기하고 시놰가 이어 리딩을 했는데, 걔는 정말 연기를 했다.(내가 걔 평소 말투를 잘 아니까.) 근데 그게 훨씬 연기답게, 현실적으로 들렸다. 그 때, 무언가를 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려면 존재 그 자체를 현실 그대로 아무런 조작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처럼 보이도록' 적절한 조작을 해주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 평론가로 유명했다던 이지훈이라는 사람의 유고집 중, 그가 한 여러 인터뷰들을 읽고 있다.(책 제목은 '해피 엔드')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는, 박찬욱이 '공동경비구역JSA'가 흥행한 후 한 인터뷰와 장선우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개봉을 앞두고 한 인터뷰, '기쁜 우리 젊은 날'의 배창호 감독이 자신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러브 스토리' 개봉 전에 한 인터뷰가 눈에 띄었다.
박찬욱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는 끊임없이 'JSA는 실제라면 생길 수 없는 사건이다. 고로 판타지 영화다.'라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어 매우 답답하게 여겨진다. 특히, 인터뷰어가 영화 중 소피의 아버지 사진 배경 디테일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하는데(여순 사건이 배경이어야하는데 제주도가 배경이다? 뭐이런), 박찬욱은 우선 그 지적은 옳지 않지만, 만약 그 지적이 옳다해도 그것이 영화의 현실성에 있어 중요하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인터뷰어가 그런 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당신 영화가 판타지 영화인거다라는 식으로 몰아붙였는데 박찬욱은 그 의견에 끝까지 반박한다. 박찬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이 과정에서 인터뷰어의 지적은 한심하게 여겨질 정도였고, 답답해하는 박찬욱에게 절절하게 공감이 되었다.
장선우의 인터뷰는 장선우가 당시 한국영화 최고 제작비인 100억을 들였다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왜 말아먹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인터뷰에서 장선우는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은 결국 하나라는(그는 그 외의 모든 취사 선택의 문제에도 둘다 맞다는 식의 태도를 견지한다.), 극한에 이른 상대주의를 보여준다. 도인은 될 수 있어도, 흥행 영화감독은 될 수 없는 한계가 그의 이런 극단적인 상대주의적 인식에 있었다. 자신조차 하나의 논리를 견지하지 못하고 설득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관객을 설득하겠다는 걸까.
배창호는 실화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 무엇을 조심해야하는지, 내가 얼핏하게만 알고 있던 것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작년에 극영화를 만들 때, 난 당시 나에게 가장 큰 고민이었던 나의 실화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만드려고 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시나리오를 많이 보여주고 많은 이야기를 한 결과,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다른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이야기를 꼭 내 실화를 통해 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시나리오를 쓰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되었다. 자신의 실화를 영화화하는 것에 있어서,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정인데, 그것은 보통 내공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배창호가 실화를 어떻게 잘 영화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가 실화를 영화화하려고 했을 때 고민했던 모든 지점을 똑같이 지났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영화의 자신과 자신 부인의 역할에 딱 맞는 느낌의 배우를 찾지 못해 자신과 부인이 직접 연기를 했다는 지점에서, 그의 영화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다. 타인이 잘 표현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자신의 실화는, 결국 타인을 자신만큼 그 이야기에 공감하게 만들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러티브를 판다는 것은 결국 이것이 '일어날 법한 이야기'임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인 것이 무엇인가, 무언가를 현실적으로 보이게 하기위해 어떤 적절한 조작을 해야하는가'하는 것은 내러티브를 파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고민해야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