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강박 혹은 예민

Sleeper 2016. 12. 20. 05:38

어릴 때 나는 약간의 강박 혹은 예민함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입 댄 컵으론 마실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새 컵을 꺼내 마시거나, 컵 손잡이 부분으로 음료를 마셨다

더러운 식당에서 밥 먹는 게 정말 싫어서 

오시오 떡볶이(이젠 리모델링해서 많이 괜찮아졌지만 예전엔 진짜 더러웠다)는 무조건 포장해 먹었고

가족들이 좋아하는 징거미 매운탕 집엔 가지 못했다

징거미 매운탕 집엔 파리가 수십마리 붙어있는 파리 끈끈이가 시야에 놓여져 있었는데 그걸 보면 비위가 상했다

그래서 나는 홀로 차에서 가족들을 기다리곤 했다


새학기 책이나 공책엔 이름을 잘 보이게 써넣어야 했다 

책보로 책을 싸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흰 선이 있으면 흰 선을 따라 밟으며 걸었고

자동차 번호판을 보면 네 숫자 간에 관계를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다


보이지 않는 나만의 룰이 많았다

남이 보기에 딱히 깔끔 떨거나 예민해 보이진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나 자신은 나의 예민함을 알았다


저런 일련의 룰이 불편해서 고친 건 아니다

그냥 내가 저러는 게 너무 찌질하게 느껴졌다 쿨하지 못하게

아마 뭐든 무던한 엄마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1의 예민함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엄마가 설거지한 그릇에 밥풀이나 고추가루가 묻어 있는 건 흔한 일이다

다같이 찌개를 열심히 떠먹고, 그걸 다시 끓여 놓지도 않고 다음 끼니에 그대로 먹는다

(나는 가끔 신경이 쓰인다. 내가 살림하면 꼭 덜어먹을 것이다.)

아무데서나 잘 자고, 아무거나 잘 먹고, 잔기스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엄마인데

때문에 내 머릿 속에 예민함 = 쿨하지 못함, 찌질함 이라는 공식이 생긴 것 같다 


내 강박과 예민한 부분을 고치려 노력했다

고치려고 여러 충격요법을 썼다

사람들이 입 댄 것에 눈 딱 감고 입을 대기 시작했다

숫자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많이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못 고친 몇 가지 것들이 있긴 했다


이와 관련해 기억에 남는 책은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와 '인더풀'이었다

한참 일본 소설을 많이 읽던 고등학교 때 읽었다

조금 웃긴 정신과 의사가 주인공인데, 다양한 증상을 가진 환자를 고치는 내용이다

그 책에 나같은 강박 환자가 나온다

버스에서 내릴 땐 내가 내리기 전 정류장을 지나자 마자 제일 먼저 벨을 눌러 놔야 직성이 풀리고

가스를 켜놓고 왔을까봐 나온지 한참 지났는데도 집으로 되돌아가는.

나도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 책에서 의사가 말한 치료법을 나는 따라했다

자신이 내릴 정류장이 되어도 끝까지 벨을 누르지 않고 참아보는 것이다

집에 가스를 켜놓고 온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별 일 안 생겼고

이후로 그런 생각이 거의 들지 않게 되었다


책과 공책에 강박적으로 이름을 적는 버릇도 고치고 싶어서

대학교에 와서부턴 책과 공책에 내 이름을 적지 않았다

재수할 땐 책 표지에만 살짝 적어놓다가

대학에 와선 아예 안 적었다


대학에 와선 주로 같은 공책만 썼는데(이것조차 강박일까봐, 다른 공책도 간간히 썼다)

색깔만 다른 공책들이라

표지에 과목명과 이름을 써놓지 않으니 스스로도 헷갈렸다

하지만 끝까지 과목명도 이름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나중에 보면 왠지 뿌듯했다

쿨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언제나 쿨한 미국 고딩 남자애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쓰고보니 음 진짜 환자 같네


아무튼 저런 노력을 거쳐 나는 지금 예민함이 1도 보이지 않는, 엄마와 매우 비슷한 인간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아주 사소한 영역에서 나의 예민함을 발견할 때가 있긴 한데

그럴 때면 나는 나답지 않은 낯섦을 느낀다

나와 친한 내 주위 사람이라면 이 글 속의 예민한 내가 매우 낯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