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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상대성 - 엄마는 왜 계속 남들과 기억이 다를까?

Sleeper 2023. 9. 30. 03:50

어제 언니랑 대화를 하는데
언니가 ”요새 엄마가 자꾸 내가 분명 A라고 말했는데 B라고 했다고 우긴다“며 불평을 했다.
그러면서 나이 들면 다들 그러는 것 같다고 함.

난 엄마랑 같이 일을 하기 때문에 엄마의 기억력이 워낙 좋은 걸 잘 알고 있고,
나랑은 그런 일이 거의 없어서 ‘엄마가 왜 그런다는거지?’ 싶었다. 근데 또 한편으로는 엄마랑 요즘 그런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이 언니만이 아니라는 게 생각났다.

엄마는 회사 동료분과 아빠가 여러 번 자신과 한 대화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서 우긴다고 불평을 했었기 때문이다.

나야 엄마가 사람들이랑 대화할 때 보통 같이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고, 그냥 ‘엄마는 저런 일로 뭐 저렇게까지 화를 내지? 그 사람들이 틀렸대도 일부러 엄마를 골탕 먹이려고 거짓말하는 것도 아닐텐데.’ 싶었다.

한편으로는 ‘엄마도 그렇지만 근데 왜 그렇게들 우기는 거지? 누구나 기억을 잘못할 수도 있는 건데 왜 다들 자기 기억에 확신을 하는거지?‘ 싶기도 했다. 난 내 기억을 많이 의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언니에게 내가 아는 얘기를 하면서 ”엄마한테 왜 자꾸 비슷한 일이 생기지? 엄마 기억력 진짜 좋은데 말야. 누가 맞는 거지?“ 라고 했더니 언니는 노인들이 원래 잘 그런다고, 나이 들어서 그러는 것 같다면서, 자기가 오늘 아침에 바로 일기에 써둬서 생생하게 기억하는 내용인데 엄마가 자꾸 우긴다며 짜증을 냈다. 진심으로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엄마가 왜 그러는지 실마리를 좀 찾은 것 같다.

낮에 엘지랑 두산이 야구 하는 걸 보고 있는데, 엄마한테 내가
“엄마도 엘지가 우승하길 응원해줘! 엘지가 우승해야 전자제품 세일해!“ 라는 내용의 농담을 했다.

그러고 좀 다른 얘기를 하고 났는데 엄마가
“근데 세일을 그렇게나 많이 한다고? 50%나 한다는 게 말이 돼?”
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기억을 믿지 못하는 나라도, 방금 한 말이라 기억이 생생하고 내 머릿속에 한번도 떠올린 적 없는 50%라는 수치가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50%? 왠 50%?”
라고 놀라서 말을 했더니,

엄마가 “니가 엘지가 우승하면 반값 세일 한다며?”
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난 너무 황당해서 “내가? 나 안 그랬는데?“ 라고 했는데

옆에 내내 같이 있던 아빠가
”나도 들었어. 니가 엘지가 우승하면 반값에 판다고 했어.“
라고 하는 것이다.

띠용???
난 마치 뭐에 씌인 것 같았다!!!
난 전혀 반값 세일을 머릿 속에 떠올린 적도 없고 전혀 생각도 한 적 없는데(현실적으로 반값 세일이 말이 되지도 않고!) 그 말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하지만 두 사람이 그렇게 들었다고 하니 더 우기고 싶지 않았고, 어제 언니가 한 말도 있어서 ”아 그래?“하고 일단 넘어갔다.

근데 그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고 이유를 알았다. ㅋ
나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엄마! 엘지가 우승하길 바라줘. 그래야 전자제품 싼값에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엄마 아빠는 ‘싼값’이라는 말을 ’반값’으로 들은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나, 엄마, 아빠의 기억력 자체는 모두 문제가 없었다. 잘못 기억해놓고 우기는 사람도 없었다.

애초에 처음 상황이 벌어질 때부터 소통이 잘못됐을뿐.

다른 상황에서도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언니가 노인들이 왜 원래 많이들 우긴다고 하는지도 설명이 된다.

귀가 점점 더 안 들리기 때문이다.

청력은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서서히 떨어지는 것이니 본인은 변화를 자각하기 어렵고, 예전과 똑같이 들린다고 착각하겠지만.

사람들은 정확하게 들리지 않는 그 간극을 평생 쌓아온 추측 능력으로 무의식 중에 알아서 인식해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것은 추측)

한 가지 사례로 섣불리 추측하긴 어렵지만 꽤 일리있는 가설이라고 생각해서 내일 아침에 엄마와 언니에게 말해줄 계획이다.

이 가설이 일리 있는 이유

1. 엄마랑 기억이 달라 우긴다는 사람들이 아빠와 직장 동료임. 모두 다 60대 이상임. 특히 아빠는 내가 골전도 이어폰을 사준 후로 항상 골전도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를 들으면서 엄마 말을 듣기 때문에, 애초에 엄마 말을 잘못 들었을 확률이 굉장히 높음.

2. 언니는 엄마가 우기는 걸 자주 느끼고, 난 거의 못 느꼈는데 이 가설대로라면 그것도 설명이 된다.

언니랑은 따로 사니까 언니와 엄마는 주로 길게 전화 통화를 한다. 어려운 음성 소통의 끝판왕.

나랑 엄마는 같이 사니까 주로 카톡으로 대화하거나 얼굴을 맞대고 대면 소통을 한다.

일을 할 때는 엄마가 전화를 잘 받지 않기 때문에 내가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보통 카톡에 남겨두고, 엄마가 안 보면 전화해서 카톡 봐달라고 하고 곧장 끊고, 엄마가 나한테 할 말이 있으면 주로 만나서 말함.

그리고 난 들었어도 내가 100% 정확히 들은 것 같지 않으면 꼭 되물어보는 편이다. 그래서 남자친구는 내가 말을 제대로 못 듣는다고 귀가 나쁘다며 자주 핀잔을 주지만ㅋ 그런 덕분에 엄마랑은 소통할 때부터 오해가 생기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엄마는 청력의 문제, 의사소통의 문제를 기억력의 문제로 착각하고 있으니까 화가 난 듯하고

아빠나 엄마 동료분도 분명 자기 기억은 다르니 더 주장을 하게 되고!

애초에 서로의 이야기를 잘못 들으니 기억도 각자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엄마와 아빠가 내가 엘지가 반값에 판다고 기억한 것처럼!(억울)

아무튼 내일 이 가설을 언니와 엄마에게 발표해야겠다. ㅋㅋㅋ 그럴 생각에 매우 설렌다. 서로 이걸 알게된다면 오해도 줄고 처음 대화할 때부터 신경 써서 할 수 있을테니 언니와 엄마 각자가 느끼는 답답함도 줄어들지 않으려나?

나의 가설이 모두에게 좋게 작용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