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균과 설경구 주연의 신작 킹메이커를 보았다.
*아래 리뷰에는 영화 킹메이커에 대한 스포도, 변성현 감독의 전작 불한당에 대한 스포도 포함돼 있다.


탈정치적인 정치 영화의 시작


킹메이커는 이전의 한국 정치사를 주제로 한 많은 영화(이하 '정치 영화')들에 비해 꽤 세련된 영화다. 정치가 좋다는 이유로 정치학을 복수전공한 왕년의 정치덕후로서 정치를 주제로 한 영화가 있으면 한국, 미국 영화 가리지 않고 잘 찾아 보는 편이다. 그런데 그때 그사람들, 변호인, 남산의 부장들, 1987, 더 킹 등 한국의 정치 영화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선과 악이 너무 극명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 영화에서 박정희 등 독재 세력은 꾸준히 악으로 묘사되고, 민주화 세력은 꾸준히 선으로 묘사돼왔다. 그렇게 정치적인 정치 영화는 한국 영화계의 올스타급 배우들을 한 데 모으기도 하고('1987'), 전직 대통령에 대한 향수로 천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기도('변호인') 했다.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관객들에게 주제의식에 대한 공감도 얻어내온 셈이다.

그런데 시대가 급격히 바뀌었다. 6.25에 트라우마가 있던 태극기 세대와 독재 정권에 트라우마가 있던 386 세대 모두가 과거가 됐다. 지금의 20대와 30대는 둘 중 그 어떤 것에도 트라우마가 없다. 민주화도 반공만큼이나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돼버렸다. 우리는 현직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불과 일이년 새 야당 대선 후보가 될 정도로 탈정치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한 쪽에 서서 정치적 지향을 극명하게 드러내던 영화 감독들도 탈정치화되고 있다. 한때는 민주노동당을 공개 지지하던 봉준호 감독이 거대 자본 CJ와 손잡고 만든 '기생충'의 세계적 성공은 명확한 정치 의식 그리고 선악구도가 이제는 얼마나 촌스러워졌는지를 일깨워준다.

변성현 감독의 '킹메이커'도 탈정치적 흐름을 비껴가지 않았다. 탈정치적인 정치 영화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변성현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신격화하지 않는다. 영화 속 김대중은 선거에 이기기 위해 때로는 부정한 방법도 쓰고,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중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 영화에서 묘사한 정도가 아쉽거나 불편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이전의 정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김대중 미화, 박정희 비난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나열한 이전의 한국 정치 영화들을 되새겨본다면 이 정도만으로도 꽤 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한국 보다는 미국 영화를 좋아하는데, 보통 인간 개인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입체적이다.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없다. 역사적 이야기를 개인의 시점에서 과잉되지 않은 감정으로 들여다보는 미국 실화 영화의 관찰자적 입장을 좋아한다. 좋은 예술은 촌스럽게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좋은 영화는 보고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들고 또 이러쿵 저러쿵 떠들고 싶게 만든다.

그동안의 한국 정치 영화는 답이 정해져 있었다. 선과 악도 정해져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향수에 젖게 하고, 또 분노하거나 슬퍼하게 만드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더 많이 생각하고 떠들게 만들 수는 없었다. 킹메이커는 기존의 한국 정치 영화들보다는 훨씬 답을 열어놓은 영화다. 영화 보고온 날 밤에 이렇게 긴 글을 쓰고싶게 만들만큼.


서있는 자리가 다를 뿐, 하는 일은 같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다. 서창대의 변절을 더 나은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않은 점이 아쉽다.
변성현은 서창대가 김운범에게서 떠나 중앙정보부에 협력하게 되는 과정에 전작 '불한당'의 방식을 다시 한 번 차용한다. 불한당에서는 한재호의 계략으로 조현수가 한재호와 한 팀이 되고, 킹메이커에서는 이실장의 계략으로 서창대가 이실장과 한 팀이 된다. 한재호와 조현수에게서 러브라인이 느껴졌듯, 김운범과 서창대도 비슷한 텐션을 갖는다. 연인이 오해가 생겼을 때 제대로 풀지 않고 서로 실망하며 자연스레 멀어져놓고 평생 그 연인을 잊지 못했다는 그런 흔한 멜로 영화 클리셰대로 김운범과 서창대의 관계도 흘러간다. 근데 김운범과 서창대는 한재호와 조현수 같은 케미도 없고, 서창대가 왜 마지막까지 김운범을 그리워하는지 관계성도 잘 그려지지 않아 킹메이커에는 부적절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서창대는 왜 변절했을까? 김운범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서? 공천을 약속하지 않아서? 그런 이유로 보이게 멈춰버린 게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감독이었다면 이실장과 서창대의 대화에 주제를 더 담았을 것 같다. 서창대가 이실장에게 협력하는 과정을 단순히 날 버린 주군에 대한 복수심으로 표현한 건 아쉽다.

마지막 서창대와 이실장의 대화를 서창대를 데려올 때로 당겨와 조금만 더 나아갔으면 좋았을 것 같다. 서창대는 정당한 목적이 부정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경제 성장이라는 목적이 독재라는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그건 누구보다도 박정희의 이야기였다.

이실장이 서창대를 어떻게 설득했길래 서창대가 설득됐을까. 우는 김에 뺨맞고 싶었던 서창대에게는 그냥 이정도 말이었으면 되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민주화를 해야한다고 하지만, 배부른 이야기고 우리나라엔 아직도 굶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굶는 사람들 밥부터 먹여야 한다는 게 나와 각하의 생각이고, 경제 정책의 연속성을 위해 삼선개헌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저희의 목적이 당신과 당신 주군의 목적보다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영화의 배경은 아직 굶는 사람들이 있었던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다.

영화 속 박정희의 "아직 해야할 정책이 많은데 시간이 없다"는 대사나 마지막 이실장의 "서있는 자리가 다를 뿐 당신이 하는 일은 같다"는 대사를 보면 감독이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본인의 정치적 지향 탓인지 관객의 성향을 고려해서인지 여기까지는 못 나아간 게 좀 아쉬웠다.


답이 없는 세상, 생각이 더 많아져야 한다


10년 전쯤 이 영화를 봤다면 "역시 박정희, 중앙정보부 나쁜 놈들 ㅉㅉㅉ", "서창대 저런 나쁜 인간을 왜 쓰나" 하면서 좀 더 단순하게 영화를 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악의 구분이 흐려지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기에 저보다는 좀 더 복잡한 생각을 했다. 우리 시대에는 공공의 적이 없다. 선악의 경계도 흐리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대부분의 경우엔 정해진 답이 없다. 답 없는 세상에서 억지로 절대적인 답을 찾으려 노력하다보니 지나친 상대주의의 늪에 빠지거나(트랜스젠더 남성의 여성 스포츠 출전을 허용한다든지) 철지난 선악구도(빨갱이 타령, 독재 타령)를 끌어오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나 이성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등 새로운 '공공의 적'을 만드려는 시도들도 있다.

나는 어느 쪽에도 마음이 동하진 않는다. 이 시대에는 언제나 통하는,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한 답인 듯하다.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안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그때그때 스스로 생각하여 판단해야 한다. 귀찮게 매번 생각이란 걸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게 참 피곤하기도 하지만, 생각을 선동가들에게 위탁하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으니 계속 생각해야겠다. 순순히 서창대 같은 사람들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장기판 위의 말이 되는 것은 조금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