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영화는 열두편째입니다.


이 영화는 홍상수의 기존 영화들과 비슷하면서 다릅니다. 

제가 배경을 알고 있어서 다르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홍상수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아주 객관적으로 표현해냅니다. 그는 자기 객관화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내면의 찌질함을 아주 솔직하게 드러내는 감독입니다.

그동안 홍상수는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할뿐, 그런 자신에 대한 이해나 공감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찌질함을 정당화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조금 다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홍상수가 세간에 알려진 것만큼 마냥 '제멋대로 자유로운 예술가'는 아닌가 보다 싶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불륜에 대해 어느 정도 자책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식이나 새로운 연인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자책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이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게 지겨워서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만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홍상수는 자기 객관화가 너무 잘돼서 자기 합리화가 잘 안되는 사람입니다. 

자기 합리화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연인의 생각, 주위 사람들의 반응 등을 정리하고, 대중에게 보이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했을 겁니다.

이 영화는 자기 합리화를 위해 만든 영화입니다.

아내는 무매력에 지긋지긋했고, 자식은 어려운 존재이고, 새로운 사랑은 영원하지 못할테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그녀와 헤어지면 난 폐인이 될테야)

구구절절한 설명을 영화로 대신하고 있어요. 

설명의 대상은 표면적으로는 독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입니다.

대중에게 자신을 정당화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거죠.


그래서 이 영화는 기존 홍상수의 영화들과 조금 다릅니다.

기존 영화들에서 내내 "난 찌질해. 이게 나야. 근데 어쩔거야." 하는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던 그가

이번 영화에선 "난 찌질해. 근데 너넨 안 그래? 왜 나한테만 그래? 너네가 틀렸어." 

하는, 외부를 의식하는 쫄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신경 쓰이는 것이 있는 거겠죠.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그의 다른 영화들보다 별 반 개만큼은 더 좋아요.

더 솔직하고, 더 인간적이고, 더 재밌습니다.





*

조조로 혼자 봤습니다. 영화관엔 저까지 5명이 있었습니다.

아빠는 30분 일찍 극장에 가서 프리즌을 보고, 저는 이 영화를 본 후 

두 영화가 같은 시간에 끝나서 만나서 극장 근처 해장국집에 가서 내장탕을 먹었습니다.




대부분 예상대로 됐다.
라라랜드 감독상 문라이트 작품상 적절

다미엔 차젤레 위플래시 때부터 장난 아니더니 라라랜드에선 편집증에 가까운 꼼꼼한 연출력이 돋보여서 감독상 받을 줄 알았다. 그 천문대 씬 딱 하난 굉장히 유치하고 구렸지만...뭐 한 씬이니까.

문라이트는 아직 못봤지만 좋단 소리를 굉장히 많이 들었고+트럼프 반대 분위기도 있으니 작품상 주지 않을까 싶었다. 라라랜드가 작품상 감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결과적으로 발표 번복이라는 안타까운 해프닝이 있었지만 작품상 문라이트. 매우 적절했던 것 같다.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은...라라랜드를 굉장히 재밌고 좋게 봤는데도(왓챠에 별점 5점줌) 엠마 스톤이 여우주연상급 연기였는진 잘 모르겠다. 다른 여우주연상 후보작을 못봤지만, 엠마 스톤 연기만 절대적으로 보자면 여우주연상까진 음...? 싶은. 근데 딱히 줄만한 사람이 후보엔 안보이던 것도 사실. 역시 상 받는 건 운도 중요한듯. 역대급 연기 여러 번하고도 힘들게 힘들게 평생 한 번 상타는 디카프리오 같은 배우가 있는 반면, 그냥 그럭저럭 괜찮은 연기로 상타는 엠마 스톤 같은 배우도 있으니.

남우주연상은 성폭행 미수범ㅋㅋㅋ이 탔네. 합의금으로 이백만달러 쓴 보람이 있겠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잘 만들었고 케이시 에플렉 연기도 좋다고들 하지만...좀 씁쓸하긴 하다. 사적으로 만난 여자도 아니고 영화 제작 현장에서 만난 베테랑 촬영 감독한테 그런 일을 저지른 건데. 영화판에서는 더 괘씸해해야하지 않나? 게다가 유부남이 아내 오빠랑 함께하던 현장에서 벌인 일인데ㅋㅋㅋ 비상식적이다. 이병헌이랑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뭐 이병헌은 바람 피고 여자 갖고 놀고 그런 도덕적 문제지 범죄가 아니잖아. 성폭행 미수랑 그거랑 죄질이 같나. 뭐 비교할 가치도 없다.

이 와중에 제일 맘에 드는 건 컨택트가 철저히 외면 당한 거ㅋㅋㅋㅋㅋ 컨택트 너무 너무 싫었는데 친구들이 다 별점 후하게 주고 평가 좋아서 외로웠는데...아카데미에서 외면해줘서 기분이 좋음. 영화 너무 구린데 평이 좋아서 짜증났다. 컨택트 좋아하는 사람들이 후보 많이 올랐단 사실을 근거로 컨택트가 좋은 영화라고 주장들하던데ㅋㅋㅋ 거기다 대고 컨택트 싫어하는 사람이 후보가 끝이고 상은 절대 못탈 영화라고 두고 보라고ㅋㅋㅋㅋㅋㅋ하는 댓글 읽으면서 공감했는데 역시나다. 연출이고 각본이고 구린 영화인데 참신하단 소리 들으며 인정 받고 호평 받는 게 배아팠음. 컨택트 소재는 생각하기 어려워서 참신한 게 아니라 영화화하기 구린 소재여서 그동안 사람들이 안 만든 것뿐이다. 영화 보니 여태껏 이 소재로 왜 영화를 안 만들었는지 딱 알겠더만. 보이후드도 난 그저 그랬는데, 평 좋다가 아카데미에서 외면 당하길래 역시나 했는데 컨택트도 역시나다.

아무튼 꽤 공감 가는 시상식이었다. 작품상 발표가 매끄러웠음 좋았을텐데 라라랜드랑 문라이트 제작진들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 것 같아 안타깝다.






이건 내가 요새 본 영화 중에 제일 무서운 영화다. 그 시절 그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예고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싸해지곤 했다. 나를 빼놓고 자기들끼리 급식을 먹기 위해 나에게만 말을 안 해주고 급식실로 빠르게 뛰어갔다. 학창시절 '말 안 걸기 왕따' 한 번 안 당해본 여성이 있을까. 무리 중에 마음이 약해보이는 애와 둘이 있을 때 이유를 물으면 말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말을 해주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나를 왜 따돌리는지 몰랐고, 내 생각엔 아마 그들도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일 당장 누구랑 밥을 먹어야 하지, 내일 소풍인데 누구랑 앉아가야 하지, 자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 날엔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학교 가기가 싫었다. 그런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진 않았지만, 다음 희생양이 나타나야만 끝나곤 했다. 그리고 그건 마음이 무척 불편한 일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선, 내가 왕따의 직접적 주동자였던 적은 없지만, 많은 경우에 나는 방관자였다. 방관자로서 최대한 양심을 지키며 방관하는 법은 그저 '알아도 모르는 척, 아무 생각 없는 척, 아무 의지 없는 척' 이었다. 소풍간 롯데월드에서 일진 친구들과 함께 초딩들에게 삥을 뜯었던 건 여전히 더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때의 난, 그러기 싫은데 싫단 말도 못하는 무기력한 방관자였다. 

잊고 싶던 기억이다. 내가 갑자기 무리에서 튕겨져 나왔던 순간도, 내가 누군가를 튕겨냈던 순간도, 누군가가 튕겨져 나가며 내게 손을 뻗었을 때 다른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무심한 척 손을 놔버린 순간도. 지금으로서는 하나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며 그 시절의 자신을 치유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잊고 있던 상처를 후벼 파는 기분이었다. 오히려 나는 지금 안도의 감정을 느낀다. '맞아 그 때 그 곳은, 소악마들의 우주였지.' 그 시절 내게 전부였던 그 우주가 소악마들로 가득찬 복잡 다단한 곳이었단 기억이 다시금 솟아올랐고, 다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 난 인간 관계에 대한 고민은 거의 하지 않는다. 전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보기 싫은 사람은 안 보고 살면 되고, 보고 싶은 사람만 보고 살면 되는 지금이 좋다. 심술 궂은 소악마들의 우주 보단 훨씬 더.

친구가 많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재수학원, 대학교 친구들까지 모두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고 또 만나고 산다. 난 세월이라는 거름망으로 필터링된 내 오랜 친구들이 좋다. 그 중 몇몇은 어느 순간엔 나에게 보라였고 지아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정을 찾았고 혹시나 그런 관계성이 다시 드러나려 하면 난 도망가면 그만이다. 이제 어린 시절의 그 지난한 과정을 다시 겪을 자신은 없다. 아이들은 어떻게 그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걸까. 선이 아빠의 대사, "어린 애들이 뭔 고민이 있어."하는 생각은 틀렸다. 선이 아빠처럼 초등학생 아이를 둔 학부모라면 꼭 봐야 할 영화. 영화를 보니, 지금 내 고민은 별 거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그 때 그 시절 고민의 무게가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일일이 다 메꿔가면서 살 순 없어.

- 우리도 사랑일까, Take this waltz




싱 스트리트는 성장물의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성장 영화다.

존 카니 감독의 싱 스트리트가 그의 전작들(원스, 비긴 어게인)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다면 바로 거기다. 


집은 망하고, 부모님은 사이가 나빠지고, 전학간 학교에선 주인공을 괴롭히는 일진이 있다.

고지식하고 유약한 도련님이었던 주인공은 

첫 눈에 반한 예쁜 누나를 꼬시기 위해 밴드를 만들고 직접 가사를 쓰며 성장하고,

그 결과 학교 찐따에서 벗어나 사랑을 쟁취하고, 가족을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줄거리 스포를 해도 전혀 찔리지 않을 정도로 뻔한 영화다.


넉넉한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커플에 집중하느라 매력있는 주변 캐릭터를 잘 살리지 못했다는 점도 아쉽다.

음악에 대한 재능도 뭣도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주인공이 어느 날 뿅 들을만한 음악을 만들어 낸다는 판타지는,

"섹스 피스톨즈는 배워서 음악했냐? 음악은 배워서 하는 게 아냐."는 형의 대사로 개연성을 부여하려 해도 

관객(특히 나처럼 뮤지션이 꿈이었던 관객!)을 설득하기엔 역부족이 아닐지.

음악 혼자 다 만드는 토끼소년은 이유도 대가도 없이 왜 주인공을 마냥 잘 도와주는지도 모르겠고.

하여튼 줄거리는 밍숭맹숭하다.


영화를 보면서 존 레논의 어린 시절을 다룬 영화 <노웨어 보이>가 떠올랐는데, 두 영화는 여러모로 비슷하다.

소년이 음악을 만나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의 얼개 자체가 같다.  

하지만 실화 기반이라 그런지 <노웨어 보이>의 줄거리가 훨씬 촘촘하고 개연성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아쉬움을 덮는 <싱 스트리트>의 매력은 역시나 음악이다.

존 카니는 좋은 영화 감독이라기 보다, 좋은 '음악 영화' 감독이다. 

어떤 음악을 어느 지점에, 어떻게 써야할지를 아는 감독이랄까.

비틀즈의 음악으로 만든 영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와도 비교될 수 있겠는데, 존 카니가 한 수 위다.

존 카니의 영화는 보고나서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좋은 음악을 남긴다.

음악 버프 덕에, 영화 전체의 질이 올라가는 느낌이랄까.

<싱 스트리트>는 비틀즈의 음악을 쓴 <대니 콜린스>, <노웨어 보이>,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나 

명곡을 많이 쓴 <테이킹 우드스탁>보다도 음악이 신선하고 좋다.

<인사이드 르윈>의 음악보단 대중적이고. 


대부분의 OST가 좋지만 기억에 남는 곡은 주인공이 좋아하는 그녀를 응원하기 위해 만든 'Drive it like you stole it'.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이 곡을 부르며 라피나와 관객을 상상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

노래에 맞춰 박수를 치는 관객들을 보면 간만에 콘서트 가고 싶다는 뽐뿌가 솟아오른다.


좋은 음악, 재밌는 영화.


    






 인디다큐페스티발 2013에서 보게 된 '아버지의 이메일'. 주위에서 평이 좋기에 잔뜩 기대를 하고 봤다. 그리고 영화는 내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켰다.



영화는 소재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가족들과 딱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컴퓨터를 배워 둘째 딸에게 42편의 이메일을 보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충분히 보고싶다. 영화감독인 둘째 딸이 아버지의 이메일을 다큐멘터리로 만든 건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정도로, 아버지의 이메일은 매력적인 소재다.



하지만 말이 쉽지, 이메일을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한다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 이메일 자체가 영상화하기 어려운, 활자들이기도 하고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을 영상화한다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테다. 애초에 영상화하기 어려운 소재라는 이야기다. 거기에 감독 자신의 가족사를 구구절절하게 세상에 드러낸다는 것도 그리 쉬운 선택이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중간에 감독의 어머니가 둘째 딸인 감독과 이야기하다가 드러난 과거의 상처를 감당하지 못하고 "더 이상 이런 거 안물어봤으면 좋겠어. 니 언니한테도 괜히 아픈 상처 끄집어내지 말고." 라고 말하는 장면은 감독과 감독의 가족들이 이 다큐멘터리를 만듦으로써 짊어져야만 했을 무게를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영화는 아버지 개인의 삶이 우리 나라의 현대사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한다. 열네살 나이에 인민군이 싫어 목숨을 걸고 월남했던 아버지는 6.25를 겪고, 베트남 전쟁에 일하러 가고, 사우디 아라비아에 일하러 가고, 88올림픽 자원봉사를 하시고 말년에는 평생 살던 집의 재개발 문제에 투쟁하시다 돌아가신다. 그야말로 아버지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6.25 때 실종된 처가의 두 처남이 전쟁 전에 보도연맹 활동을 했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낙인찍혀 원하던 외국이민을 가지 못했던 아버지는 반평생을 아내를 원망하고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술만 마시며 우울증을 가진 채 살다가 세상을 떠나신다. 영화는 우리 나라의 현대사가 한 가정에 미친 영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거대한 사회의 흐름 앞에 한 개인과 가정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 속 아버지가 특별한 경우는 아닐 것이다. 내 외할아버지는 1920년대 생이셨는데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삶을 책으로 펴내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할 정도로 내 외할아버지의 삶도 우리 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 하는 삶이었다.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집이나 사연 없는 집이 없는 그런 시대가 우리나라의 1900년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이 다큐멘터리는 엄청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고, 때문에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아버지의 삶을 바라보기 보다는 아버지 개인과 이 가정에 초점을 맞추어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 보는 내내 눈물도 많이 흘렸다. 현대사와 아버지의 삶 사이의 연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눈물보다는 한숨이 더 많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아버지 개인과 가족들에게 맞추어 영화를 봤고, 그러다보니 내 가족과 부모가 생각났고, 그래서 영화를 보는동안 꽤 많이 울고 말았다.



다큐멘터리 속 아버지는 내 기준에 굉장히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일찍이 영어를 배워 미군부대에서 일을 했고, 전쟁을 겪고도 돈을 벌러 베트남에 갔다. 사우디 아라비아도 갔고, 88올림픽 자원봉사를 했으며, 운송회사에 경비일까지. 심지어 일을 하지 않아도 됐을 노년에는 지역 복지관까지 다니시며 인터넷과 포토샵까지 배우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참 운이 없었다. 아버지의 불우한 가정사는 그 시절 모두가 하나씩 안고 있던 것이라고치더라도, 그 이후의 삶도 굉장히 운이 없었다. 아버지가 베트남에 갔을 때 베트남 전쟁은 끝물이었고, 처가는 '빨갱이 집안'으로 몰려 이민의 꿈도 무너졌다. 힘들지만 열심히 해보려했던 운송회사에서는 운전을 하다가 사람을 치어 감옥까지 갔다. 이쯤되니 우리 현대사의 굴곡도 굴곡이지만 나에게는 그저 지지리도 운 없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고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연민이 생겼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보려했던 아버지가 일련의 좌절들을 겪으며 우울증에 걸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어도 다큐멘터리 속 아버지의 삶을 살았다면 아버지만큼은 살 수 있었을까. 돌아가시던 해에 컴퓨터를 배워 딸에게 마흔 통이 넘는 이메일을 써내려가던 아버지의 마음이 정말 와닿아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평생을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삶. 아버지는 가족 중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둘째딸에게 이메일을 보내면서 마지막 말을 건네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메일에서 당신을 용서하라 말씀하셨지만, 실은 이해받고 싶었던 것일 거다. 



내가 만들었던 영화의 주제 중 하나는 '세상에는 오해가 아주 많은데, 오해는 오해를 풀려는 마음, 그것이 혹여 아닐까 의심하는 의지가 없으면 절대 풀리지 않는다.'였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이 가족이라 할지라도)에게 관심이 없고 혹시 오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도 오해를 푸는 것을 주저한다. 불편함과 대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용기를 내어 당신의 이야기를 건넸고,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아버지가 내민 손을 잡아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GV에서, 감독은 감독의 언니가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감독의 언니는 영화 속에서 내내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이고, 아버지를 이해하려하지 않고, 동생이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도 딱히 탐탁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언니에 대한 그런 묘사 때문에 둘째 딸인 감독도 언니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나는 감독의 언니도 이해가 갔다. 첫째 딸은 아버지가 휘두른 폭력의 좀 더 직접적인 피해자였으며, 아버지의 정도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심지어 아버지의 이메일조차 본인은 받지 못했고, 동생이 받은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애초에 첫째 딸과 둘째 딸 사이의 포지션 차이도 포지션 차이지만,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고려해보면 언니가 취한 입장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관객으로서 나는 언니가 아버지를 용서는 못해도 이해는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뉴스를 보다보면,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그저 그 사건 자체가 안타까운 사건들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가 그런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싶다. 누가 잘못했고 잘못안했고 할 것 없이 그냥 가족들 모두가 안타깝고 슬펐다. 영화 속의 가족이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행복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추천으로 영화를 보는 일은 내겐 흔한 일이 아니다. 언제나 봐야하는데 보지 못한 영화가 쌓여있기 때문에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간만에 다른 사람의 추천으로 보게된 영화다. 그 유명한 탕웨이 전화하는 사진이 이 영화 속 장면이라는 걸 알게되고나서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 여차저차해서 보게됐다. 


영화는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감성이었다. 2010년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는 촌스러운 연출, 가족 드라마 같은 느낌의 내용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주인공 아라이의 꿈이 나타날 때마다 화면이 흐물거리고, 장면 전환도 윈도우 무비메이커에도 있는 '왼쪽으로 화면 사라지기' 같은 보통의 상업영화에선 쓰지 않는 기능이 여과없이 쓰였다. 2010년에 이런 영화 연출이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리듬은 느린 편이고 그래서 좀 지루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아라이의 엄마와 이모가 꽤 주요한 역할인데 그런 면에서 홈드라마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고. 하지만 순수한 탕웨이의 모습이 꽤나 예뻤다. 탕웨이의 활짝 웃는 모습이나 전화 받는 모습 등은 여자인 나도 정말 반할 정도였다. 남자들한테는 탕웨이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볼 이유가 될만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지루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영화의 캐릭터들이 살아있어서 좋았다. 그중에서도 탕웨이의 놈팽이 남자친구 아쉬 캐릭터에 정이 갔다. 아쉬는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폭행 사건을 자주 일으켜 감옥에 다녀오는 탕웨이의 양아치 남자친구다. 자기도 자신의 모습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탕웨이를 놔주는 역할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닌가 싶었다. 꼭 아쉬처럼은 아니어도 누구나 자신조차 자제할 수 없는 나쁜 점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법이고 또 그런 점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이유가 되는 경우도 살다보면 종종 생기니까. 주변 인물인 아쉬에게 이입돼서 주연인 아라이와 아이렌이 이루어지기를 별로 바라지 않았었는데...이건 일반적인 감상은 아니겠지. 


아쉬 말고도 아라이의 무기력한 캐릭터도, 부모 없이 외삼촌 아래서 자란 아이렌 캐릭터도 꽤나 현실적이었다. 아라이의 엄마 캐릭터는 현실적이되 딱히 정이 가진 않았지만. 


영화를 다 봤는데도 여러가지 미스터리가 남는 영환데, 아라이와 아이렌이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설정에 맞춘 의도된 것인지, 그냥 영화 만들다보니 어쩌다 그렇게 된 포스트모던적인 설정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지만(궁금해서 인터넷 찾아봤는데도 별 말이 없다.) 그런 설정이 이 영화만의 특징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꼬아 생각하면 좀 유치한 것 같기도 하고 판단하기가 어렵다. 인도인 미스터리 (-.-)



그래도 요새 쏟아져 나오는 많은 사랑 이야기들이 드라마고 영화고 할 것 없이 꽤나 비현실적인 우연에 기대어 인연을 시작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소개팅이라는 현실적인 시작과 친구로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발전해나가는 구성은 참 현실감있고 좋았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았다. 고등학교 때 집에 DVD가 있어서 본 '스몰 타임 크룩스' 이후로 우디 앨런의 영화는 처음 보는 거였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개봉했던 작년 여름에 나는 진짜 파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영화는 처음 3분이 넘도록 마냥 아름다운 파리의 풍경들을 보여준다. 여유로운 음악과 함께 보여지는 파리의 풍경은 환상적이고, 그 장면이 3분이 넘도록 지속된다는 걸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물론 실제 파리는 영화 속의 파리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오웬 윌슨은 나에게는 성룡과 함께 나오던 액션 영화의 어리버리한 인물로 각인되어있어서 영화 속에서 다른 배우들과 어우러지지 못하는 느낌을 주지만, 역할과는 꽤 어울렸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뮤즈인 마리옹 꼬띠아르는 정말 분위기 있고 영화랑도 잘 어울리고. 찾아보니 파리 태생이구나. 


설정이 조금 억지스러운 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런 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 우디 앨런의 내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은 좋지만 이 내용이 소설이나 만화 같은 다른 매체로 구현되는 건 상상이 안 되고, 영화라서 좋은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작년 여름에 갔던 파리를 계속해서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파리엔 5일인가 6일밖에 있지 않았지만. 내가 갔던 곳이 꽤 많이 나왔다. 시테 섬 주변의 세느강변, 노트르담 성당, 팡테온 근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에펠탑, 몽마르뜨, 파리의 여러 거리들. 얼마 전에 007스카이폴을 영화관에서 봤을 때도, 내가 갔던 런던 곳곳이 나와서 작년 여행을 떠올리며 영화를 봤는데, 이 영화는 파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영화여서 그런 생각이 더 했다. 모네의 작품 속 풍경과 완전히 똑같은 영화 속 정원에 못 가본 게 아쉬웠고, 주인공이 현실 세계에서 방문하는 미술관도 내가 못가본 곳이라(찾아보니 '오랑주리 미술관') 아쉬웠다. 나중에 파리를 방문한다면 두 군데 다 가봐야겠다. 


영화의 주제도 공감이 갔다. 사람은 언제나 과거를 바라보고 미화하면서 사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산다. 얼마전엔 작년 생일이 참 행복했었다고 일기를 썼었는데, 작년 생일엔 그 때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꼈었다. 비단 그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겪을 때는 행복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기억 속에 남으면 언제나 행복했던 듯 남는 것 같다. 


영화 속의 주인공과 에드리아나처럼, 나도 그리워하는 시대가 있었다. 1930년대 경성에 태어나 박태원이나 이상과 함께 모더니즘을 논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고, 1970년대 미국에 태어나 히피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했었다. 1970년대 서울도 나쁘지 않고. 하지만 지금의 시대로 훗날의 누군가는 황금 시대로 여길 시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영화를 통해 하게 됐다. (문화적으로 충분히 그럴만한 시대다.)


아무튼 영화 속의 풍경이 참 아름다워서 마음이 좋았다. 파리에 가보지 않았더라면 영화를 보고 마냥 파리를 동경하게 되었을테지. 파리에 가봤기에 영화를 보고도 파리에 다시 가고싶다 하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지만 그래도 영화 자체로 참 아름답고 좋았다. 




작년 여름 파리 몽마르뜨에서, 민성오빠 민지와 함께 마시던 샹그리아. 갑자기 기타를 맨 프랑스 남자가 나타나서 넷이 합류해서 같이 술을 마셨었지. 이 때 참 행복했었는데. 여행을 할 땐 여행이 그렇게 즐겁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즐겁구나. 정말로 사람은 언제나 과거를 바라보며 사는 모양이다.  


문라이즈 킹덤을 보았다.


화요일 아침에 자려는데 잠이 안와서 연우가 추천해줬던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보았는데 정말 빠져버렸다. 그래서 웨스 앤더슨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그의 영화인 문라이즈 킹덤이 상영중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암튼 마침 집 근처 구로 cgv에서 상영중이어서 보러가기로 결정.


오후 2시랑 9시 두 번 있기에 자야하니까 2시건 패스하고(그날 아침10시에 잤음...) 저녁 6시쯤 일어나서 저녁을 먹고 밤 9시 영화를 보러가게 되었다. 


물론 집에서 가까우니 혼자갔다. 나의 영원한 동네 영화메이트 아부지가 같이 가고파했지만 딱봐도 아빠취향의 영화가 아니라 같이 봤다가 욕만 먹을 것 같아서 혼자갔다. 친구들 꼬시려면 꼬실 수도 있었겠지만 꼬시는 것도 귀찮고.


밤 9시에 털모자에 장갑 목도리칭칭 안경 히피모드로 영화관에 갔다. 매표소에서 한 명 표 끊은 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뭐였냐면 내가 요새 주민등록상 생일이라...(실제 생일과 주민등록상 생일이 다름) CGV에서 생각지 못한 생일콤보 쿠폰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ㅠㅠ 두둥. 매점가서 확인해보니 생일콤보 구성은 라지팝콘1개와 음료수 두잔이었다. 음료수가 한잔만 됐어도 혼자 다 먹었겠지만. 두잔은 무리지...흑흑. 하지만 팝콘을 포기할 순 없었다.


결국 혼자 작은 팝콘과 음료수 한잔 시켜서 영화관 한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심지어 내 줄에 나뿐이었는데(정 한가운데 자리), 영화시작하고 내 세칸쯤 옆자리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면 이런 데서 혼자 이런 영화보는 여자들을 꼬실텐데 라고 잠시 생각했다. 나랑 취향 비슷할 여자들.



잡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영화얘기를 하자면




엉성한 내러티브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보고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사실 이야기는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이야기만 갖고 뭐라하기엔 남자 주인공 꼬마가 너무 사랑스럽지 않은 캐릭터여서(물론 내기준에) 그런 것도 있고. 보는 내내 사랑스럽다는 느낌이나 엄마 미소보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불편함? 같은 게 느껴졌다. 그 꼬마가 별로여서 그랬던 것 같다. ㅠ-ㅠ 다른 캐릭터들이 주가 되는 씬(거의 없지만)들은 맘에 들었다. 에드워드 노튼도 브루스 윌리스도 뭔가 어색어색하면서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서 좋았고. 그래도 내러티브는 좀 엉성했다고 생각한다. 스카웃 단원들이 갑자기 마음 바꾸는 것도 그렇고 트집잡으려면 잡을만한 허점이 많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여자 셋이랑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됐는데, 이 영화에 대한 정보 없이 영화를 보게 된(그럴만도 하지, 브루스 윌리스에 에드워드 노튼이라니) 것이 분명했던 그녀들은 영화에 대한 혹평을 거침없이 하고 있었다. 중간에 나가고 싶었다는 말과 나머지 친구들의 동의.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전아웃사이더인디영화' 라고...완전 공감할 순 없었지만 그녀들이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는 이해가 됐다.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내러티브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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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완벽한 스타일


 그렇지만 이 영화가 별로는 아니다. 왜냐면 엄청난 스타일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난 사실 웨스 앤더슨의 영화 중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처음으로 보았고 그 전엔 웨스 앤더슨이 광고 감독인 줄 알았다. 웨스 앤더슨의 광고 몇 편을 인터넷에서 봤었는데 엄청나게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특유의 색감과 틸팅(tilting)이 돋보이는 광고였는데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는 광고를 보고 느꼈던 전율의 확장판이었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충격을 받은 게 살면서 딱 세 번 있다. 첫번째가 중학교 때 텔레비전에서 해주던 더빙판 가이 리치의 '스내치'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 두번째가 대학교 1학년 때 윤성호의 인디시트콤 '할 수 있는자가 구하라'를 봤을 때의 충격인데,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가 내 영화감상인생의 세번째 충격이었다. 


 성격상 보이는 것에 천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좀 80년대 운동권스러운 좀 촌스러운 성향인데;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걸 약간 죄악시하는 거다. '죄악시'정도까지는 오버지만. 아나운서를 저널리스트로 치는 걸 꺼려하고(물론 그들의 역할을 인정하지만 딱히 달갑지는 않다.), 사진 예술을 좋아하지 않아 미대 친구와 논쟁을 하기도 하고 그런 거다. 소설도 수려한 문체의 연애 소설보다는 줄거리 탄탄한 추리 소설이 취향이다. 같은 맥락에서 김지운이나 박찬욱의 영화(괜찮은 것도 있지만 사이보그-나 파란만장 같은 영화들은 최악이라고 생각한다.)를 보통 좋아하지 않는다. 이명세는 말할 것도 없고. 


 즉 영화에 '스타일'과 '내러티브'가 있다면, 내러티브가 돋보이는 영화들을 좋아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스타일'만으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영화들이 있다. 처음으로 그랬던 영화가 가이 리치의 '스내치'였던 건데. 스내치의 집시 브래드 피트가 권투하는 장면이 만화처럼 정지되었다 말다 하고 그 장면이 나레이션과 함께 보여지는 그 특유의 스타일은 중학생인 나에게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금 봐도 충격이고. 물론 스내치는 내러티브도 스타일 못지 않게 뛰어나기 때문에 내 인생의 명작이다.


 그리고 가이 리치 이후로 처음으로 나에게 스타일로 충격을 준 게 바로 웨스 앤더슨이다.


 웨스 앤더슨의 색감, 소품, 카메라 워크, 촬영 구도 등이 줄자로 잰듯 완벽하다. 음악도 좋다. 웨스 앤더슨은 가끔 팀 버튼과도 비교가 되는 모양인데(둘 다 자기 스타일이 확고하니까) 팀 버튼스타일이 어린 애가 악몽꾸고 막 그린 그림 같은 느낌이라면, 웨스 앤더슨은 20대의 중산층 완벽주의자가 자로 재서 만든 꿈의 세계 같은 느낌이다. 둘 다 좋지만 개인적인 취향은 웨스 앤더슨 쪽이 좀 더 좋다.


 영화의 스타일이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보이스카웃, 캠핑 소품 하나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카메라 워크 하나 튀는 것이 없다. '스타일의 교과서'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미술 작품을 100분동안 가만히 앉아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내러티브까지 채워진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보다는 아쉽지만, 스타일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영화다. 




+)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이 궁금하다면.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TV광고 중 하나. 여러 광고 중 마침 현대 광고가. 웨스 앤더슨 특유의 좌우 변환 카메라 워크와 구성이 뛰어난 기계같은 소품들, 색감, 세트 단면 등이 잘 드러나있다. 


http://www.adweek.com/news-gallery/advertising-branding/10-great-tv-spots-directed-wes-anderson-141598#softbank-2008-10


 이 링크에 들어가면 웨스 앤더슨의 여러 TV광고들을 볼 수 있다. 현대 광고도 여러 개 있다. 모두 그의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여기 올려놓은 건 현대 광고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웨스 앤더슨 광고는 AT&T 광고들.

 



 실제는 무조건 현실적인 것이고, 허구는 무조건 비현실적인 것이라 여겼다. 나는 내가 영화를 만들 때, 만약 가장 현실적인 영화를 만들라고 한다면 그냥 카메라로 내 하루를 찍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일어나서 학교에 갔다가 가족들과 밥먹고 친구 만나고 또 자고 뭐 그렇게 현실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 등 허구의 창작물에 있어 가장 현실적인 것이라 착각했다. 착각은 몇 년 전에 친구들과 첫 영화를 찍을 때서야 깨졌다. 시나리오를 다 쓰고 주위 남자애들 중 남자 주인공 역할을 할 애를 골라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었다. 셋이 사당동의 까페에서 대본리딩을 했었는데, 아직 여자 주인공 역할을 할 애를 구하지 못해 나나 시놰가 여 주인공의 대사를 읽어야만 했다. 내가 쓴 시나리오니까 내가 먼저 여자 주인공 역할을 맡아 리딩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난 내가 평소 말하듯 보통 사람의 말투로 대본을 읽으면 그것이 실제처럼 보일 것이라 생각을 해서 그렇게 했는데, 그것은 내 생각과는 달리 매우 비현실적으로, 가짜처럼 들렸다. 내가 포기하고 시놰가 이어 리딩을 했는데, 걔는 정말 연기를 했다.(내가 걔 평소 말투를 잘 아니까.) 근데 그게 훨씬 연기답게, 현실적으로 들렸다. 그 때, 무언가를 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려면 존재 그 자체를 현실 그대로 아무런 조작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처럼 보이도록' 적절한 조작을 해주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 평론가로 유명했다던 이지훈이라는 사람의 유고집 중, 그가 한 여러 인터뷰들을 읽고 있다.(책 제목은 '해피 엔드')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는, 박찬욱이 '공동경비구역JSA'가 흥행한 후 한 인터뷰와 장선우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개봉을 앞두고 한 인터뷰, '기쁜 우리 젊은 날'의 배창호 감독이 자신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러브 스토리' 개봉 전에 한 인터뷰가 눈에 띄었다. 


 박찬욱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는 끊임없이 'JSA는 실제라면 생길 수 없는 사건이다. 고로 판타지 영화다.'라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어 매우 답답하게 여겨진다. 특히, 인터뷰어가 영화 중 소피의 아버지 사진 배경 디테일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하는데(여순 사건이 배경이어야하는데 제주도가 배경이다? 뭐이런), 박찬욱은 우선 그 지적은 옳지 않지만, 만약 그 지적이 옳다해도 그것이 영화의 현실성에 있어 중요하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인터뷰어가 그런 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당신 영화가 판타지 영화인거다라는 식으로 몰아붙였는데 박찬욱은 그 의견에 끝까지 반박한다. 박찬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이 과정에서 인터뷰어의 지적은 한심하게 여겨질 정도였고, 답답해하는 박찬욱에게 절절하게 공감이 되었다. 

 

 장선우의 인터뷰는 장선우가 당시 한국영화 최고 제작비인 100억을 들였다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왜 말아먹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인터뷰에서 장선우는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은 결국 하나라는(그는 그 외의 모든 취사 선택의 문제에도 둘다 맞다는 식의 태도를 견지한다.), 극한에 이른 상대주의를 보여준다. 도인은 될 수 있어도, 흥행 영화감독은 될 수 없는 한계가 그의 이런 극단적인 상대주의적 인식에 있었다. 자신조차 하나의 논리를 견지하지 못하고 설득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관객을 설득하겠다는 걸까.


 배창호는 실화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 무엇을 조심해야하는지, 내가 얼핏하게만 알고 있던 것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작년에 극영화를 만들 때, 난 당시 나에게 가장 큰 고민이었던 나의 실화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만드려고 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시나리오를 많이 보여주고 많은 이야기를 한 결과,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다른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이야기를 꼭 내 실화를 통해 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시나리오를 쓰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되었다. 자신의 실화를 영화화하는 것에 있어서,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정인데, 그것은 보통 내공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배창호가 실화를 어떻게 잘 영화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가 실화를 영화화하려고 했을 때 고민했던 모든 지점을 똑같이 지났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영화의 자신과 자신 부인의 역할에 딱 맞는 느낌의 배우를 찾지 못해 자신과 부인이 직접 연기를 했다는 지점에서, 그의 영화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다. 타인이 잘 표현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자신의 실화는, 결국 타인을 자신만큼 그 이야기에 공감하게 만들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러티브를 판다는 것은 결국 이것이 '일어날 법한 이야기'임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인 것이 무엇인가, 무언가를 현실적으로 보이게 하기위해 어떤 적절한 조작을 해야하는가'하는 것은 내러티브를 파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고민해야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