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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젠가 남자친구랑 백일이었다. 백일 당일이 걔가 시험 3개 보는 날 전날이라서,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됐다. 100일동안 봐온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면 시험이 세 개인 전날 내가 뭘한들 별로 반가워하지 않을 거란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우리에게 단 한 번뿐일 백일 당일을 챙기고 싶었다. 점심을 먹으며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니 당일 0시, 그러니까 전날 밤 12시에 챙기라고 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지!



 원래 사려고 했던 메시지 케잌은 전화 해보니 꼭 하루 전날 주문해야 한다기에 포기하고, 학교가 끝나자 마자 백화점 식품관에서 30분이 넘게 심사숙고하여 가장 맛있어보이면서도 적당한 크기의 케이크를 샀다. 거기서 파는 숫자초는 별로 안 예뻐서, 예쁜 숫자초를 찾아 헤맸는데 없어서 결국 원래 케이크를 산 거기로 돌아가 숫자초를 샀다. 



 집까지 오는 길에 케이크 모양이 망가질까봐 얼만큼 애지중지해서 케이크를 가져왔는지... 집에 오니 예상치 못하게 아빠가 이미 귀가해 계셔서, 아빠가 밥하느라 정신 없으신 사이에 케이크를 내 방 바란다에 숨겨놓았다. 그 때부터는 남자친구가 놀라는 모습을 즐겁게 상상하며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가족들과 밥을 먹고 친구가 집 앞에 와서 집 앞 포차에 술마시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엄마는 이 시간에 어딜 가냐고 하셨지만 아빠가 허락해주었다. 밤 11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남자친구의 집 앞까지 갔다. 도착하니 11시 48분. 2분을 기다렸다가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뭐해? 나 공부. 난 어디게. 어딘데? 맞춰봐. 어디지? 아 맞춰봐! 설마 우리 집 앞? 응. 거짓말 하지마. 거짓말 아니야 추우니까 빨리 나와.



 기다리자 남자친구가 나왔고 나는 담벼락 뒤에 앉아서 숨어있다가 남자친구의 두리번 거리는 뒷모습에게 웍!했다. 내가 웍!한 중에는 제일 많이 놀란 모습에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내 생각만큼 기뻐하는 것 같진 않았다. 만나자마자 놀란 가슴 가라앉히겠다며 담배를 피려는 것도 맘에 안 들었고. 어떻게 나왔냐기에 집에 말하고 나왔지~하니 프리하네. 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눈치보면서 머리를 굴려서 양심에 찔려가며 타이밍을 재다가 엄마아빠가 술 한 잔 걸치셔서 기분 좋은 틈을 타 거짓말을 하고 나왔는지, 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편의점에서 케이크를 나눠 먹고, 백일 선물은 아니지만 내가 준비한 커플 장갑도 주고. 엽서도 주고. 그랬는데. 12시 20분. 그러니까 내가 집 앞에서 남자친구를 불러낸지 30분만에 남자친구는 다시 집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싶어서 안절부절해 했다. 정말 서운했다. 마음 급한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미 일어나 있는 남자친구에게 벌써 들어가려고? 라고 했더니 아니야 그런거. 라더니. 내가 그래 그럼 가자 하고 일어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따라왔다. 대로변에서 택시를 잡으려는 나를 말리지도 않고 나랑 헤어지는 걸 전혀 아쉬워하지도 않는 듯한 기색에 그냥 나 혼자 오랫동안 오늘을 생각해온 게 너무 허무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남자친구한테 서운한 걸 토로했는데, 남자친구도 시험기간이라 힘들었는지 나한테 처음으로 정색을 하고 화를 냈다. 지금 나 멘탈 약하니까 건들지 마. 라면서. 나도 너 시간 오래 뺏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그래도 내가 먼저 이제 그만 들어가서 공부하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은 주길 바랐다. 그 밤에 버스 두 번 갈아타고 한 시간 걸려 거기 갔는데, 30분만에 일어나서 내가 가길 바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30분 중에 20분동안 남자친구는 말 없이 케이크에만 집중했다.) 어차피 나도 30분쯤만 더 얘기하다가 이제 그만 들어가라고 할 계획이었는데.



 그냥 그대로 서 있고 몇 마디 더 하고 풀려고 서로 노력하다가 도저히 마음이 안 풀려서 그냥 택시를 타고 집에 와 버렸다. 집에서 밤 11시에 나갔는데,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지 1시였다. 엄마는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냐고 했다. 그렇게 헤어지고도 남자친구는 언제나처럼 들어가면 연락하라고 하면서, 헤어지자마자 먼저 카톡을 보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결국 집에 와서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고, 대충 서운한 걸 이야기하고 화해를 했다.



 결국 시험기간이라고 대충 화해를 했는데, 쌓인 서운함은 해결되지가 않는 것 같다. 남자친구는 분명히 내가 뭘 해달라고 하면 다 해주는데, 내가 해달라고 하지 않으면 나를 위해 아무것도 알아서 해주는 법이 없다. 누군가는 해달라고 하면 해주는 것만으로도 복이라고 하겠지만... 얘가 정말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열정 없는 사랑도 사랑인가. 만난지 100일인데 왜 열정이 없는 걸까. 



 결국 다음 날 아침에 0시 계획 아이디어를 준 친구와 이벤트가 어떻게 됐는지 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아침부터 울어버렸다. 그 때가 백일 당일이었으니 백일 아침부터 울어버린 셈이다. 너무 서운하고 또 허무하고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났다. 남자친구는 그런 거 해달라고 한 적도 바란 적도 없는데 내가 괜히 그런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건지 나 혼자 기대해 놓고 나혼자 바라고 나혼자 실망하는 그런 내 자신의 모습이 처량했다. 더 많이 좋아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언젠가 헤어진다면 그제와 같은 날들이 모여서 헤어지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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