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웃길려고 쓴걸까 진심일까...이런 날이 올 줄이야 


나이 차이가 많이나는 언니 덕분에 내 또래보다 앞선 세대의 음악이나 문화에 많이 익숙한 편이다.
언니는 여중고생시절 이승환의 광팬이었다가 유희열의 음악도시 광팬이다가 뭐 김동률 이현우 등 그런 뮤지션들을 좋아했었다. 자연스럽게 나도 그 영향을 받게되어서 또래의 다른 애들보다 그런 뮤지션들을 먼저 알았다. 초등학교 삼사학년쯤이었나. 초등학교도 들어가기전부터 라디오에 미쳐서 재수 삼수때까지 라디오를 끼고살았던 라디오키드로서 라디오에 강한 그 뮤지션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으나, 뭐 어린애가 듣기엔 사실 좀 그렇지 않나. 음악이 좀 지루하고...난 딱히 또래보다 성숙한 그런 애는 아니었다.
소위 그 '고급가요' 뮤지션들은 중3때에서야 아는 오빠의 추천으로 김동률을 들으면서 음악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고급가요패밀리'의 일원으로 여겨졌던 윤종신이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희대의 명곡을 내게 된다. 바로 그 곡, 그 후 영계백숙 등의 음식송의 시초가 되는
팥빙수.



대체 '빙수용 위생얼음' 같은 가사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


팥넣고 푹끓인다 설탕은 은근한 불
서서히 졸인다 졸인다
빙수용 위생얼음 냉동실안에 꽁꽁
단단히 얼린다 얼린다
프루츠 칵테일의
국물은 따라내고
과일만 건진다 건진다
체리는 꼭지체리 체리는 꼭지체리
깨끗이 씻는다 씻는다

-윤종신 작사, '팥빙수'-


이규호가 쓴 그 중독성있고 상큼한 멜로디도 대단했지만...대체 이런 가사는 어떤 머리에서 나오는겐가?
요즘에야 홍대앞에 워낙 재기발랄한 인디뮤지션들이 넘쳐나고 윤종신의 '팥빙수' 같은 음식송은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재기발랄한 가사들이 많지만 (음식송만 해도 10cm의 아메리카노, 이랑의 쌀국수 뭐이런 곡들)
이 이전까지도 인디음악에 많은 다양한 가사가 있었을지라도 이런 음식얘기하는 뽀송뽀송한 음악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당시 지상파 tv나 라디오에 나오는 기성 가요에서는 신승훈, 변진섭류의 가사가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사랑노래들, H.O.T,핑클 등 아이돌 그룹들의 보송하고 달달한/혹은 섬뜩한 연애얘기들이 가사들의 주를 이루고 있었다.
팥빙수의 제조과정을 노래에 담아, 그것도 그 곡을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삼아, '인기가요'등의 가요프로그램에서 하와이안셔츠를 입고 춤추던 그의 모습. 어렸던 나에게 윤종신이라는 사람의 첫인상은 거기였다.
'아 이사람이 예전에 '너의 결혼식' 뭐 그런 발라드를 불렀었다고?' 




이...이게 뭐냐고...




그런데, 가사가 좀 짱이다. 
그래, 팥빙수 가사를 쓴다 치자. 근데 그래도

대체 '빙수용 위생얼음', '체리는 꼭지체리', '여름엔 (이게) 왔다야' 이런 가사는 대체 머릿속이 어떻길래 생각해낼 수 있는 가사인가? 위생얼음이나 주의사항 크림연유 같은 단어를 노래가사에 넣을 생각은 어떻게 하는거지. 물론 지금이야 모르겠지만. 10년전인데. 
윤종신의 작사에 대한 천재성은 팥빙수 이전부터 드러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 천재성을 어렴풋이나마 느꼈던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 '팥빙수' 과정을 외우며 노래를 부르던 그 때였다.
아이돌만 좋아하던 꼬마가 가요프로그램앞에서 '팥빙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앉아있곤 했으니까. 따라부르려고. 
 
이 당시 '팥빙수' 작사의 노하우는 후에 윤종신이 무한도전 가요제의 히트곡, '영계백숙'을 작사할 때 빛을 발한다.


찌는 태양에 지쳐가는 누들랜드
백성 모두의 걱정거리 한사람
마법에 걸린 메밀리아 공주는
하루하루 말라가고

오직 한 가지 마법 풀 수 있는 건
저 바다 건너 외딴 섬에 흐르는
쯔유쯔유강 신비의 간장
누가 구해올 수 있을까

아 오래 걸을 수 없는 누들들은
그 누구 하나도 나서질 못하고
이웃나라 용병 찾아보다가

영계백숙 워어어어
영계백숙 워어어어
거만하게 꼬은 다릴 믿어
속이 꽉 찬 그의 배를 믿어

떠나기 전날 둘은 처음 만났어
둘 다 첫눈에 반해 버렸어
찹쌀 대추가 튀어나올 정도로
백숙은 그녀가 아름다웠어

배에 묶인 실 동여매고
노를 저어 간다 저 바다를 건너
메밀리아를 위한 간장 찾아

영계백숙 워어어어
영계백숙 워어어어
거만하게 꼬은 다릴 믿어
속이 꽉 찬 그의 배를 믿어

- 윤종신 작사, '영계백숙' 중 -



통째로 얼마나 주옥과 같은 가사인지, 생략할 수 있는 부분 혹은 특히 강조할 부분이 따로 없다. 게다가 무한도전 방송을 통해 봤을 때 이 가사를 별 고민도 없이 단기간에 썼었다는 것 같았는데...아아 윤종신. 그는 작사의 천재임이 틀림없다.




음식송 가사만 대단한 건 아니야

그럼, 저런 음식송 한두곡 때문에 윤종신을 작사 천재라고 하느냐, 그건 당연히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윤종신의 가사는 따로 있다.
바로 이거.

침대옆 가습기 서럽게 숨을 쉬고
눈을 떠본 내 방안에 흩어지는
어젯밤 기억들 중에
취한 가슴이 중얼거리던
애태운 그리움들이
또 한번 내 아침 힘을 뺀다
열린 창문사이
재떨이 그리고 전화기
하지말아야 할 두가지 모두가
무안한듯 나를 보네

-윤종신 작사, 성시경 5집 수록곡 '굿모닝' 중-



아침에 술에서 깨 까치 머리로 일어났는데 침대옆 가습기가 서럽게 숨을 쉬는 광경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그려진다. 
흩어지는 기억, 취한 가슴, 내 아침 힘을 빼는 그리움...여기까지만해도 충분히 주옥같은데,
'재떨이 그리고 전화기 하지말아야 할 두가지 모두가 무안한듯 나를 보네'.
하...이게 가사인가 시인가. 사랑타령하는 발라드 가사는 대부분 굉장히 추상적인 단어들을 쓰는데 윤종신은 아니다.

당장 검색만 해봐도 '재떨이'라는 가사를 발라드 노래에 쓴 작사가는 윤종신 뿐이다. 나머지는 다 광란의 밤을 보내는 힙합 가사에 주로 등장하는 '재떨이'.
'가습기'는 또 어떤가. 검색해보니 가습기 들어가는 노래는 총 세 곡 뿐인데. 한 곡이 굿모닝이고, 한 곡은 역시 일상적인 넋두리처럼 이어지는 싸이의 랩 속, 한 곡은 재작년에 타블로가 박지윤에게 써준 곡에나 있구나. 


가습기도 재떨이도.
윤종신은 비(非)가사적인 단어들, 그러니까 다들 가사에 잘 쓰지않는 일상적인 단어들을,
가사의 적재적소에 이질감 없이 스며들게 한다.

추상적인, 사랑이나 연애에 관한, 단어들이 보통 발라드 노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힘이들어 안아줘요, 내맘이 아파, 나를 떠나지 마 ... 뭐 이런 것들)  
그런데 윤종신은 다르다.
그 중에서도 굿모닝은 정말... 한 편의 단편영화를 보거나 시를 읽는 기분이랄까. 정말로 주옥같은 가사다.


요즘에 발표한 노래들에서도 이런 윤종신의 작사천재성은 바래지 않는다.

선생님의 하늘색 마스크 한심해하네
그동안 이 아픈 걸 어떻게 참아왔냐고
제가 너무 미련하죠 하고 말하려 해도
이미 마취제로 굳어버린 혀

구멍 뚫린 하늘색 헝겊
이 나를 덮는다
그 하늘 위로 그려지는 아직 선명한 얼굴
이 와중에 떠오르는 너는 도대체 뭐니
그라인더 윙하고 나를 향하네

진작 찾아와야 했어
진작 잊어버려야 했는데 두려워서
가끔 한 번씩 몸서리치는 그 순간
의자에 나 혼자인 게 두려워

깊숙이도 파고 들어가는 그라인더야
좀 더 가면 네가 처음 보는 상처가 있어
안 아프게 그것도 좀 갈아 없애주겠니
치통의 몇 배로 나를 괴롭혀

하늘은 걷히고 마스크는 내게 말하네
오늘밤에 무지 붓고 아플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오늘 하루 만에 끝나준다면
힘들었던 그 밤 끝나준다면
마취 안 풀린 채
안녕히 계세요

-윤종신 작사, '치과에서'-



그라인더, 하늘색 헝겊...치통...누가 노래 가사에 이런 단어를 쓴 적 있나?
그런데 가사 전체의 내용과 맞물려 또 아무렇지않게 단어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상상바래 상상바래 상상바래
잘되는 상상바래 뒷심바래 뒷심바래 뒷심바래
끝까지 뒷심바래 오케바래 오케바래 오케바래 섬머나잇 오케바래
다금바래 다금바래 다금바래
자연산 다금바래
빨래빨래 빨래빨래 빨래빨래
내일은 밀린빨래 에블바래 집중바래 집중바래
모두다 집중바래

-윤종신 작사, '바래바래'-



본능적으로
느껴졌어
넌 나의 사람이 된다는 걸
처음 널 바라봤던 순간
찰나의 전율을 잊지 못해
워오 워-오 워우워오

-윤종신 작사, '본능적으로'-


내가 택했던 이별을 난 믿겠어
더 이상 소용없음을
내가 흘렸던 눈물은 숨기겠어
니 맘 약해지지 말라고
우리 생에 우리 사랑 최고라면 슬플거야
두 번째로 사랑했던 사람으로 남기로 해

-윤종신 작사, '이성적으로'-


'이성적으로' 같은 경우는 가사보다도 제목을 더 잘 붙인 노래. 이별 얘기 하는 노래의 제목을 '이성적으로' 라고 하다니 말이다.


유희열의 가사나 이적의 가사 등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건 개인 취향이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생뚱맞은 단어 가져와서 상업적으로 제대로 써먹으면서도 자기만의 작사세계 구축을 착실히해낸 윤종신이 진정한 '작사천재'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작사도 잘해놓고, 발음도 정확해서 자신의 가사를 누구든지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말을 꾹꾹 담아 정확한 발음으로 노래를 부르기까지!ㅋㅋㅋㅋㅋ

유희열도 이적도 윤종신의 작사'감각'은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사천재 윤종신.
가사는 윤종신 가사가 짱.
개그맨이 노래한다느니, 이적 유희열이랑 같은 급이었는데 이제 형만 3류이라는 김구라의 독설ㅋㅋㅋ이라든지 하는 것 신경쓰지 마시고 앞으로도 주옥같은 노래들과 가사들을 만들어주시길.




 
초호화 출연진의 뮤직비디오 출연이 이슈화 되었었던, '이별의 온도' mv. 이노래도 역시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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