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즈 킹덤을 보았다.


화요일 아침에 자려는데 잠이 안와서 연우가 추천해줬던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보았는데 정말 빠져버렸다. 그래서 웨스 앤더슨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그의 영화인 문라이즈 킹덤이 상영중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암튼 마침 집 근처 구로 cgv에서 상영중이어서 보러가기로 결정.


오후 2시랑 9시 두 번 있기에 자야하니까 2시건 패스하고(그날 아침10시에 잤음...) 저녁 6시쯤 일어나서 저녁을 먹고 밤 9시 영화를 보러가게 되었다. 


물론 집에서 가까우니 혼자갔다. 나의 영원한 동네 영화메이트 아부지가 같이 가고파했지만 딱봐도 아빠취향의 영화가 아니라 같이 봤다가 욕만 먹을 것 같아서 혼자갔다. 친구들 꼬시려면 꼬실 수도 있었겠지만 꼬시는 것도 귀찮고.


밤 9시에 털모자에 장갑 목도리칭칭 안경 히피모드로 영화관에 갔다. 매표소에서 한 명 표 끊은 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뭐였냐면 내가 요새 주민등록상 생일이라...(실제 생일과 주민등록상 생일이 다름) CGV에서 생각지 못한 생일콤보 쿠폰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ㅠㅠ 두둥. 매점가서 확인해보니 생일콤보 구성은 라지팝콘1개와 음료수 두잔이었다. 음료수가 한잔만 됐어도 혼자 다 먹었겠지만. 두잔은 무리지...흑흑. 하지만 팝콘을 포기할 순 없었다.


결국 혼자 작은 팝콘과 음료수 한잔 시켜서 영화관 한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심지어 내 줄에 나뿐이었는데(정 한가운데 자리), 영화시작하고 내 세칸쯤 옆자리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면 이런 데서 혼자 이런 영화보는 여자들을 꼬실텐데 라고 잠시 생각했다. 나랑 취향 비슷할 여자들.



잡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영화얘기를 하자면




엉성한 내러티브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보고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사실 이야기는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이야기만 갖고 뭐라하기엔 남자 주인공 꼬마가 너무 사랑스럽지 않은 캐릭터여서(물론 내기준에) 그런 것도 있고. 보는 내내 사랑스럽다는 느낌이나 엄마 미소보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불편함? 같은 게 느껴졌다. 그 꼬마가 별로여서 그랬던 것 같다. ㅠ-ㅠ 다른 캐릭터들이 주가 되는 씬(거의 없지만)들은 맘에 들었다. 에드워드 노튼도 브루스 윌리스도 뭔가 어색어색하면서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서 좋았고. 그래도 내러티브는 좀 엉성했다고 생각한다. 스카웃 단원들이 갑자기 마음 바꾸는 것도 그렇고 트집잡으려면 잡을만한 허점이 많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여자 셋이랑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됐는데, 이 영화에 대한 정보 없이 영화를 보게 된(그럴만도 하지, 브루스 윌리스에 에드워드 노튼이라니) 것이 분명했던 그녀들은 영화에 대한 혹평을 거침없이 하고 있었다. 중간에 나가고 싶었다는 말과 나머지 친구들의 동의.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전아웃사이더인디영화' 라고...완전 공감할 순 없었지만 그녀들이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는 이해가 됐다.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내러티브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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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완벽한 스타일


 그렇지만 이 영화가 별로는 아니다. 왜냐면 엄청난 스타일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난 사실 웨스 앤더슨의 영화 중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처음으로 보았고 그 전엔 웨스 앤더슨이 광고 감독인 줄 알았다. 웨스 앤더슨의 광고 몇 편을 인터넷에서 봤었는데 엄청나게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특유의 색감과 틸팅(tilting)이 돋보이는 광고였는데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는 광고를 보고 느꼈던 전율의 확장판이었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충격을 받은 게 살면서 딱 세 번 있다. 첫번째가 중학교 때 텔레비전에서 해주던 더빙판 가이 리치의 '스내치'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 두번째가 대학교 1학년 때 윤성호의 인디시트콤 '할 수 있는자가 구하라'를 봤을 때의 충격인데,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가 내 영화감상인생의 세번째 충격이었다. 


 성격상 보이는 것에 천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좀 80년대 운동권스러운 좀 촌스러운 성향인데;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걸 약간 죄악시하는 거다. '죄악시'정도까지는 오버지만. 아나운서를 저널리스트로 치는 걸 꺼려하고(물론 그들의 역할을 인정하지만 딱히 달갑지는 않다.), 사진 예술을 좋아하지 않아 미대 친구와 논쟁을 하기도 하고 그런 거다. 소설도 수려한 문체의 연애 소설보다는 줄거리 탄탄한 추리 소설이 취향이다. 같은 맥락에서 김지운이나 박찬욱의 영화(괜찮은 것도 있지만 사이보그-나 파란만장 같은 영화들은 최악이라고 생각한다.)를 보통 좋아하지 않는다. 이명세는 말할 것도 없고. 


 즉 영화에 '스타일'과 '내러티브'가 있다면, 내러티브가 돋보이는 영화들을 좋아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스타일'만으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영화들이 있다. 처음으로 그랬던 영화가 가이 리치의 '스내치'였던 건데. 스내치의 집시 브래드 피트가 권투하는 장면이 만화처럼 정지되었다 말다 하고 그 장면이 나레이션과 함께 보여지는 그 특유의 스타일은 중학생인 나에게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금 봐도 충격이고. 물론 스내치는 내러티브도 스타일 못지 않게 뛰어나기 때문에 내 인생의 명작이다.


 그리고 가이 리치 이후로 처음으로 나에게 스타일로 충격을 준 게 바로 웨스 앤더슨이다.


 웨스 앤더슨의 색감, 소품, 카메라 워크, 촬영 구도 등이 줄자로 잰듯 완벽하다. 음악도 좋다. 웨스 앤더슨은 가끔 팀 버튼과도 비교가 되는 모양인데(둘 다 자기 스타일이 확고하니까) 팀 버튼스타일이 어린 애가 악몽꾸고 막 그린 그림 같은 느낌이라면, 웨스 앤더슨은 20대의 중산층 완벽주의자가 자로 재서 만든 꿈의 세계 같은 느낌이다. 둘 다 좋지만 개인적인 취향은 웨스 앤더슨 쪽이 좀 더 좋다.


 영화의 스타일이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보이스카웃, 캠핑 소품 하나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카메라 워크 하나 튀는 것이 없다. '스타일의 교과서'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미술 작품을 100분동안 가만히 앉아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내러티브까지 채워진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보다는 아쉽지만, 스타일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영화다. 




+)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이 궁금하다면.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TV광고 중 하나. 여러 광고 중 마침 현대 광고가. 웨스 앤더슨 특유의 좌우 변환 카메라 워크와 구성이 뛰어난 기계같은 소품들, 색감, 세트 단면 등이 잘 드러나있다. 


http://www.adweek.com/news-gallery/advertising-branding/10-great-tv-spots-directed-wes-anderson-141598#softbank-2008-10


 이 링크에 들어가면 웨스 앤더슨의 여러 TV광고들을 볼 수 있다. 현대 광고도 여러 개 있다. 모두 그의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여기 올려놓은 건 현대 광고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웨스 앤더슨 광고는 AT&T 광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