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SBS에서 하는 다큐멘터리 <최후의 권력-7인의 빅맨>을 봤다. 기획도 참신하고 재밌었다. 작년에 내가 스터디할 때 썼던 기획안 <여의도전>이 생각나긴 했지만.(언젠가는 정말 딱 저 제목으로 프로그램 하나 나올 것 같다.)
내 기획안과 포맷은 비슷한데 주제는 다른 방향으로 현실화되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친구가 어제 지금 SBS에서 하고 있는 다큐 니가 좋아할 것 같다고 연락이 왔었는데ㅋㅋㅋ그 시점에 난 이미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을 정도로! 워낙 기획부터 내 스타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프로그램은 기획이 다가 아니라는 걸 생각해보면 연출도 꽤나 잘 된 것 같다. 기획의도 살리랴, 여야 정치인 불만 안 나오게 균형 맞추랴,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그렇잖아도 편집이 어려운데(요새 다큐 찍으며 뼈저리게 느끼는 중ㅠㅠ) 편집하는 제작진은 참 여러모로 골머리 썩혔을 것 같다. 제작진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우선 7인의 빅맨으로 4박5일동안 도전하는 정치인은 총 7명, 실제 정치지형에서의 비중을 고려해서 구성이 짜인 것 같았다.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에서는 박형준(MB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차명진(BBK방어수), 손수조 셋이 나왔고 민주당에서는 정봉주(BBK공격수), 정은혜(청년비례대표) 두 명, 그 외 안철수 진영의 금태섭(전 검사), 정의당 대표 천호선(노무현 정부 대변인출신) 이렇게 총 일곱명이 나왔다. 나야 정치적 성향으로는 정의당 쪽이고 정의당>민주당>안철수>>>새누리당 정도의 호감도를 가지고 있지만, 이런 프로그램을 볼 땐 역시나 그런걸 배제하고 정치인 개개인에게 집중해서 보게 된다.
정치학을 오로지 관심만으로 복수전공하고 있는 과거의 정치덕후로서, 지역별로 바뀌면서 정치인들 얼굴이 계속 뜨는 총선 개표방송을 보면서는 저 정치인이 뭐한 사람이고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막힘없이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정치덕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번 프로그램에는 낯선 얼굴이 많았다. 박형준, 차명진 둘도 뭘 했던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낯설었고, 천호선도 이름은 익숙하지만 얼굴과 이름 매치는 잘 안 될 정도로 낯설었다. 손수조야 문재인의 상대후보로 전국민이 다 알테니 나도 당연히 알았고, 정은혜는 얼짱 비례대표로 몇 번 인터넷에서 언급된 걸 봤었다. 금태섭은 안철수 진영 들어가기 전부터 한겨레에 쇠고기 촛불집회 때 '당당히 수사받는 법'을 기고하던 검사로 처음 등장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행보를 쭉 지켜봐와서 익숙했다. 정봉주도 한때 나꼼수를 열심히 들었었기에 가장 익숙했다.
방송을 본 후의 개별 정치인에 대한 호감도는 많이 바뀐 것 같다. 보기 전에는
정봉주>금태섭>천호선>>정은혜>>>손수조
정도의 호감도를 가지고 있었다면(박형준, 차명진은 잘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 한 일만 들었다면 아마 손수조보다도 맨 뒤 끝 어딘가에 있었을거다.) 방송을 본 후에는 호감도는 뭐 정은혜 빼곤 비슷비슷하게 좋아졌지만
천호선>박형준>금태섭>손수조, 정봉주, 차명진>정은혜
정도로 괜찮은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첫번째 빅맨을 맡았던 금태섭은 정치초보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지만 나름 의욕이 있어보였다. 근데 선발대 두 명을 보내기로 했을 때 왜 본인이 안갔을까는 보면서도 굉장히 의문이었다. 그냥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 생각해볼 땐 선발대 두 명이 가기로 협상을 했을 때 빅맨 본인이 선발대로 가야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닐까. 이건 차후에 정은혜가 빅맨을 맡은 걸 봤을 때도 똑같이 느껴지는 점이다. 물론 집에서 편안히 앉아서 갔어야지 하는 거랑 실제 그 때 상황은 달랐겠지만. 프로그램에 나온 목적은 아무래도 정치인으로서의 본인의 호감도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을텐데, 그런 목적을 기억했다면 당연히 선발대로 나서서 고생했어야 했다. 빅맨을 맡지 않았던 때까지 포함한 프로그램 전체적으로는 성격도 굉장히 좋아보이고 합리적이고 섬세해 보였지만, 조금 우유부단한 성격이 드러났던 것 같다. 금태섭이 치열한 현실 정치의 세계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 모습으로는 좀 어려울 것 같다. 좀 더 독해져야할 것 같다.
첫날 우유부단한 빅맨 금태섭의 반작용으로 둘째날 빅맨이 된 차명진. 전날 선발대로 가장 먼저 목적지에 도착한 저돌 적 사나이로 둘째날 투표로 빅맨이 된다. 차명진은 정봉주랑 묶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둘이 각 진영을 대표해 BBK 방어수와 저격수로 맞붙었던 게 정말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둘이 정치적 성향은 전혀 다르지만 인간적인 모습은 거의 데칼코마니 수준이다. 어딜가든 지도자 타입은 아닌 것 같고, 행동대장 느낌의 두 사람. 둘이 지도자 타입은 아닐 거라는 게 차명진이 빅맨으로서 권위를 전혀 갖지 못한 거나 정봉주가 스스로 빅맨의 자리를 포기한 것만 봐도 느껴진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순진한 타입이다. 자기를 꾸밀 줄을 모르고 자신의 이득도 크게 계산할 줄 모른다. 좀 어린애 같다고 할까. 단순 무식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서는 순수하게 몸바칠 사람들이다. 첫 날 선발대 두 명이 떠나야할때 둘이 선발대가 된 건 전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이득을 별로 계산하지 못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나서서 자신에게 유무형의 이득이 있을 때에만 나서는데, 이 사람들은 전혀 그런 계산을 못한다. 선발대로 고생은 다 해놓고 다음날 둘이 같이 전날 빅맨 금태섭을 호되게 까면서ㅠㅠ 첫날 묵묵히 선발대로서 희생만 하고, 말없이 있거나 금태섭을 옹호했으면 얻었을 좋은 이미지를 전혀 얻지 못함. ㅜㅜ 내가 다 안타까울 지경. 그래서 내 생각엔 방송 후에도 둘은 별로 이미지상 덕은 못봤을 거다. 하지만 서로 좋은 친구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암튼 사람들은 별로 좋게 보지 않았을 것 같지만 난 이런 타입의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이 들수록 다들 계산만 많아져서, 이렇게 순진한 사람들을 찾기가 어렵다.
세번째 날 빅맨이 된 정은혜는 손수조랑 처음 이틀간 꽤 친해졌는지 손수조를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앉히겠다고 하고 공동 운명체가 된다. 뭐 정치를 바라보는 대중의 입장으로 보면 손수조가 꽤나 비호감이지만, 그런 거 없이 20대 여자의 시선으로 보면 손수조는 둘이 있으면 친해지기 쉬울 것 같은 타입의 여자다. 좀 만만하기도 하고 성격도 무난해보이고. 그래서 정은혜랑 손수조가 같이 빅맨직을 수행하기로 한 건 별로 놀랍지가 않았다. 근데 정은혜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제일 이미지상으로는 얻은 게 없을 것 같다. 저런 애가 국회의원이라니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굴 반반한 것 빼고는 체력도, 지구력도, 지력도 없다. ㅠ_ㅠ 말을 어떻게 할까 고민되는 지점에서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아니 그 뒤에 그 할배들 냅두고 자기랑 수조 둘이 말타면 어쩌자는 거여. 아저씨들이 여자들 둘 말타라는 게 그냥하는 소린걸 몰라? 마치 빼빼로 안줘도 된다니까 진짜 안주는 남친같네. ㅠㅠ 아니 그 눈치로 정치를 어떻게...정은혜는 정치가 문제가 아니라 그 눈치로 사회생활이 문제다. 발 아프다는 박형준 할배랑 여자고 동생인 수조를 태우고 자기는 아저씨들이랑 걸어갔어야지 이 사람아. 정은혜가 말을 타는 순간부터 다음날 정은혜가 호되게 욕먹을 장면이 예상되었다. 근데 다음 날은 욕먹었다고 울기까지함.ㅜㅜ 전날은 숙소 바닥 삐그덕대는 게 무서웠대. ㅠㅠ 바닥이 낭떨어지도 아니고 똥밭인 게 뭐가 그리 무서운겨...민주당은 대체 무슨 정신으로 얘를 청년 비례대표로 뽑은 걸까. 요즘의 패기없고 능력없는 평범한 청년의 표상이라서...? 정은혜는 알바나 한 번 해봤나 모르겠다...한숨나옴.
정은혜와 같은 기준에서 보면 손수조는 이 프로그램으로 이미지에 꽤나 이득을 볼 것 같다. 묵묵히 체력도 좋고 군소리도 없고 인터뷰에선 무서운 할배들의 쓴소리로부터 연약한 정은혜 편을 들어주기도 하고. 새누리당이 젊은이에게 바라는 모습의 표상이라고 할까. 기성세대가 딱 좋아할만한 젊은이 캐릭터다. 손수조는 이준석이처럼 학벌이 되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새누리당의 지금 그 자리에 어떻게 갈 수 있었는지 프로그램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애가 좀 정치적으로 방향 잘못잡고 멍청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니여~ 이런 느낌? 정은혜 공주님과 비교돼서 프로그램에서는 더 좋아보였다. 물론 정치적 배경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봤을 때 이야기다. 물론 여태까지의 정치적 행보가 너무 에러여서 잊혀지기 힘들다는 게 함정이지만. ㅜㅜ 이준석도 볼 수록 뭐 괜찮아보이던데 손수조도 괜찮네. 새누리당은 졸라 싫지만 민주당보다는 확실히 머리가 좋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당은 청년 비례대표를 대체 무슨 기준으로 뽑은 거지...박근혜 대항마로 정은혜를 뽑은 건가...새누리당보다 훨씬 좋은 청년인재풀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 없으면 우리학교 김윤영이라도 꼬셔보지. 등록금 투쟁에 삭발하던 윤영이가 이 프로그램에 갔으면 정은혜보다는 백배쯤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넷째날 빅맨이 된 박형준은 MB의 정무수석비서관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별 사고도 안치고 무난했다. 정은혜가 장애물 건너기를 잘 못할 때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 것도 그냥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알아서 살아오라는 새누리당식 상식적 리더십인듯 했다. 이렇게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어떻게 이명박 비서관을 했지 싶었다. 이명박처럼 단순, 무식, 한국의 조지 부시스러운 인간의 비서관을 어떻게 했을까. 비서관 할 때 이명박이 박형준을 엄청 의지했을 것 같다. 아니면 이명박이 그냥 이명박식대로 했다면 박형준이 엄청 답답해서 가족들한테 이명박 욕 겁나 했을 것 같다. ㅋㅋㅋ 그냥 이건 내 상상. 뭐 그냥 동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아저씨 같았다. 평소엔 딱히 정치적 성향도 드러내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나한테 먼저 인사도 잘해주고 안부도 잘 묻지만 알고보면 새누리당 지지하는 중산층 옆집 아저씨 느낌.
음 난 그런 아저씨들 안 싫더라. ㅋㅋ
(아직 2화가 유투브에 안올라와서 단독샷을 찾기 힘든...첫날부터 냉면을 먹고 싶은 천호선 아저씨)
마지막날 빅맨인 천호선은 적당히 계산적이고, 적당히 행동할 줄 아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눈치도 빠른 똑똑한 사람 같아 보였다. 나랑 친해지긴 어려울 것 같은 타입의 사람이지만(내가 친해질 수 있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은 차명진, 정봉주 느낌ㅋㅋㅋ) 리더로서는 적합할 것 같은 사람. 마지막까지 리더의 책임을 다 하려고 하는 모습이 좋아보였고, 조용조용 집단 속에서 크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다가도 필요할 땐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 정치인다웠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점에서는 박형준과 비슷해보였는데, 관료같은 느낌의 박형준보다는 현실정치에 가까운 사람 같아 보였다. 필요할 땐 행동할 줄 아는 리더십. 물론 다른 사람들이 빅맨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점을 마지막 날 빅맨을 할 때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리했겠지만, 빅맨이 아니었을 때 모습도 조직에 잘 적응하고 묵묵히 할 일을 잘하는 성실한 이미지였다.
보고나서 사람들 감상을 보고 싶었는데 찾기도 힘들고, 트위터로 찾아보니까 그냥 정치적 성향에 따른 뻔한 감상들만 있길래 내가 써보았다. 오랜만에 굉장히 재미있고 참신한 다큐멘터리였다. 역시 정치인들은 보통의 성인보다 자신의 욕망을 좀 더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래서인지 캐릭터들이 재미있는 것 같다. 정치인 캐릭터는 앞으로도 방송에서 무궁무진하게 쓰일듯. 내 <여의도전>도 머지않아 누군가에 의해 현실화될 것 같다. 그 누구가 나였으면 좋겠네.
출연진 캐스팅도 꽤나 잘 된 것 같은데, 일부러 여-야 별로 비슷한 캐릭터들을 둘씩 짝지어 꾸린 것 같긴 하지만 그 형태보다 좀 더 다양한 캐릭터의 정치인들로 7인 7색의 팀을 꾸렸으면 또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자에 청년인 손수조-정은혜가 여성 정치인 대표처럼 나온 것도 뭔가 아쉽고. 내가 캐스팅을 했다면 프로그램에 나온 정치인들 외에는 나경원, 전여옥, 진선미, 임수경, 김진태, 이준석, 김용갑, 홍준표, 우윤근, 송호창 이정도 중에 몇명을 추리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이번 방송에서는 여성 정치인쪽 캐스팅이 좀 아쉬워서 임수경이랑 전여옥, 나경원이 나왔더라면 재미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지난 번 조국이랑 원희룡이 나왔던 진보와 보수를 넘어선 어쩌고 하던 다큐멘터리도 그렇고 SBS도 이제 슬슬 종편처럼 정치를 순수 보도 외의 영역으로 뽑기 시작하는 것 같다. 지금까진 그런 시도가 꽤나 성공적인 것 같고. 이런 흐름이 예능쪽으로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일듯. 암튼 그런 덕에 보기만 하면 우울해지는 뉴스를 잘 보지 않는 정치덕후는 뉴스를 보지 않아도 볼 프로그램이 많아져서 신이 난다. 간만에 프로그램을 보는 시간과 비슷하게 걸려 새벽까지 장문의 감상을 쓸 정도로! 프로그램이 재미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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