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해서 핸드폰을 제출하자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내내 잤다. 종이 치면 나가서 밥을 먹고, 명상을 하고, 나머지는 자고. 한 3일째까진 그렇게 지냈다. 말을 안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사실 새로운 집단에 가자마자 말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명상 센터에는 산책할 수 있는 억새밭이 있었지만, 3일째까진 산책도 하지 않았다. 추워서 밖에 나가지 않는 집에서의 습관이 센터에서라고 하루 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내 잤지만 밤에도 어렵지 않게 잠들 수 있었다. 밤 아홉시쯤 명상이 끝나고 나면 씻고 아홉시 반쯤 잠에 들었다. 스마트폰이 없는 덕에 눕자마자 잠을 잘 수 있었다. 거의 매일 꿈을 꾸었다. 꿈은 보통 자고 일어나면 금방 잊혀지는데, 센터에선 자고 일어나서 할 일이 생각 밖에 없었기 때문에 꾼 꿈을 계속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지금까지도 기억이 난다. 가장 기억에 나는 꿈은 작년에 죽은 친구 Y가 나온 꿈이었다. Y가 우울할 때, 그러니까 죽기 전에 이 곳에 왔더라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꿈에서 나는 C언니, H와 함께 이자까야에 갔다. 그 곳은 저승과 이승의 사람들이 잠시 만나 함께 술 한 잔을 할 수 있는 술집이었다. 우리는 Y를 만나러 그곳에 갔다. 그런데 가는 길에 눈이 펑펑 오고 눈보라가 쳤고, 우리는 차가 막혀 약속 시간에 늦고 말았다. Y는 살아있을 때처럼 가장 먼저 이자까야에 도착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도 미식가인 C언니는 그곳에서도 무슨 맛있는 걸 먹을까 메뉴판을 보고 있었고, 나는 취업이라도 한 모양인지 내가 사겠다며 호기롭게 비싼 걸 먹으라 말했다. 늦은 게 미안했던 나는 Y에게 말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차가 막혀서 늦었어. 저승은 차 안 막히지?" 그러자 Y는 "아니 여기도 차 막혀" 라고 대답했다. 당황한 나는 반농담이랍시고 "좋은 거 하나 없네. 그러길래 왜 죽었냐"라고 대답했는데, Y가 아주 슬픈, 후회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시금치 카레


센터의 밥 하루 두 끼. 모두 채식. 여섯시 반에 먹는 아침은 그냥 평범했다. 오래 전에 구워져 별로 따뜻하지 않은 토스트와 매일 달라지는 잼(사과잼 혹은 딸기잼), 땅콩 버터. 그리고 죽도 나왔는데, 죽은 본죽 죽처럼 맛있는 그런 죽은 아니었고 그냥 평범한 죽이었다. 쌀죽, 깨죽, 호박죽 등이 돌아가면서 나왔는데 깨죽이 제일 나았다. 콩자반이나 김치가 반찬으로 나왔다. 과일도 있었다. 사과나 감 1/4개 정도를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매일 토스트 두 개와 죽 한 그릇을 먹었다. 이 기회에 살을 빼려고 한 5일째까지는 땅콩 버터를 먹지 않았는데, 6일째 정도부턴 참지 못하고 땅콩 버터를 먹어버렸다.

맛있는 건 점심이었다. 매일 11시에 점심을 먹었다. 콩인지 버섯인지로 만든 채식 고기도 나왔고, 신정 다음날엔 무와 두부로 만든 떡국도 나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메뉴는 시금치 카레였다. 나는 시금치 카레란 걸 처음 먹어봤는데, 간이 밍밍한데도 왠지 맛있었다. 어릴 때 급식 메뉴에서 제일 싫었던 것 중에 하나가 시금치 나물이었는데, 어른이 돼서 먹은 시금치는 거의 다 맛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아주 긴 시간 맛 없다고 오해 받아온 시금치가 안타깝달까. 시금치 피자, 시금치 카레 다 맛있는데. 시금치는 나물로 쪼그라들어 무쳐져 있을 때 가장 매력 없다.

11시에 점심을 먹고나면 잠을 자는 저녁 9시 반까지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데, 하루종일 거의 움직이지 않는 탓인지 하나도 배고프지 않았다. 무엇을 먹고 싶다는 생각도 거의 들지 않았다. 심지어 아침이나 점심 식사 시간이 기다려지는 이유도 그저 심심해서였지, 배가 고프다거나 무엇을 먹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신수련생은 저녁 5시에 차를 마시며 튀밥과 과일 한쪽을 먹을 수 있는데, 나는 그조차 먹기 귀찮아 먹으러 가지 않았다.


룸메이트


대부분의 사람이 1인 1실이었지만 나는 2인 1실이었다. 나와 같이 방을 쓰는 사람은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는데(나중에 알고보니 맞았다) 처음엔 나처럼 자유 시간에 잠을 자며 시간을 보냈지만, 곧 혼자 방에서 나가선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중에 그녀가 내내 산책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센터의 규칙 상 같은 방을 쓰면서도 그녀와 나는 말 한 마디, 아니 눈짓 한 번 나눌 수 없었다. 처음엔 낮에 코를 골며 자는 그녀가 조금 싫었지만, 볼수록 정이 들었다. 난 시계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녀는 시계가 있어서, 그녀가 방에 없을 땐 그녀의 시계를 훔쳐보기도 했다. 시계를 한 번 보려면 먼 복도까지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3일째에 어떤 외국인이 견디지 못하고 센터를 떠났는데, 덕분에 우리에게 1인실로 옮기겠냐는 제안이 왔다. 순간적으로 나는 방을 옮기지 않겠다고 답했다. 내가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나중에 생각해보았는데, 혼자 자는 게 무서울 것 같기도 했고, 자유 시간 내내 혼자 방에 있으면 너무 심심할 것 같기도 해서였다. 다행히 그녀도 짐이 많다는 이유로 방을 옮기지 않아서, 나와 그녀의 기묘하고도 어색한 공존은 계속될 수 있었다.

심심함과의 싸움에서 그녀를 관찰하는 것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녀가 방을 나가면 어딜 갔지 하며 눈에서 그녀를 찾았고, 그녀의 행동이나 물건을 관찰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일까를 상상해보며.


천장 무늬 그리고 스쿼트 그리고 공기 놀이


내내 자던 사흘이 지나자, 잠도 바닥나버렸다. 이때부터 나는 심심함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매일 점심을 먹은 후 다음 명상시간까지 세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는데, 시간이 정말 안갔다. 한참 잔 것 같은데도 시계를 보면 삼십분 지나 있었다. 밖에서는 컴퓨터나 핸드폰을 하거나, 친구와 수다를 떨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는데 센터에서는 도무지 그런 경험은 할 수가 없었다. 1분 1분을 생생히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시한부 환자가 와서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그럼 죽는 날까지 참 멀게 느껴질 것 같았거든. 자유시간 그리고 때론 명상시간에도 생각을 했다. 주로 사람들 생각을 했다. 좋아했던 남자, 좋아하는 남자, 나를 좋아하는 남자, 좋아할까 고민되는 남자  등등. 열흘만에 핸드폰 켜면 누구한테 연락이 와 있을까 하는 매우 세속적인 생각도 꽤나 자주 했다. 센터에 들어가기 전에 봤던 오뉴블(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생각도 많이 났다. 오뉴블 보면서 감옥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생각은 센터에 온지 수일만에 싹 사라졌다. 스마트폰 없이 사는 괴로움을 충분히 알게 됐기 때문이다. 오뉴블 죄수들은 가족들이랑 통화라도 할 수 있지 하며 내 스스로 만든 심심함과의 전쟁을 조소했다. 나가서 만들 잡지 아이디어, 창업 아이디어 따위를 떠올리기도 했지만, 아무 데도 적지 못한 탓에 좋은 생각 중에 많은 생각이 날아가 버렸다.

생각도 하다 보면 지겨워지는 순간이 왔다. 대체 뭐하지 하다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곰돌이 얼굴을 찾기 시작했다.



센터의 천장은 이런 평범한 사무실 천장 같았는데, 나는 이 천장 무늬를 보며 'ㅅ' 이렇게 생긴 곰돌이 얼굴을 열심히 찾아댔다. 내가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 수 있겠지.

룸메이트가 없을 땐 아는 요가 동작이나 스쿼트, 플랭크, 윗몸 일으키기를 하기도 했지만 오래 하진 못했다. 정말 심심했을 땐 마당에서 적당한 돌멩이 다섯 개를 주워다 씻어서 침대 위에서 조용히 공기 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룸메이트가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이것 또한 관두었다. 지갑 속 영수증을 꺼내 학을 접기도 했다. 너무 심심한 탓에 명상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하였다.


명상과 법문, 허리 통증


명상홀에서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가부좌를 튼 채 명상을 했는데, 하루 7~8시간 정도였으니 쉽지 않았다. 사흘째까지는 허리가 너무 아파서 괴로웠다. 자꾸만 앞으로 허리를 숙이곤했다. 센터에서는 요구하면 앉은뱅이 의자나 그냥 의자를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앉은뱅이 의자를 가져와 앉기 시작했고, 나또한 의자를 달라고 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사흘째까진 명상 자체에 집중하기 보단 허리가 너무 아픈데 의자를 달라 할까 말까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하지만 나흘째가 되자 허리 통증이 싹 사라졌고, 나는 어렵지 않게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할 수 있었다. 이후엔 무릎과 발목이 저리거나 아플 때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버틸만 했다. 나중에 집에 가는 길에 터미널까지 동행한, 이미 센터가 두번째라는 아주머니들은, 내가 이 이야기를 하자 명상 타입인가 보라는 말을 해주셨다. 

몸도 금방 괜찮아졌고, 명상은 시키는대로 했지만, 끝날 때까지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갔다와서 확실히 마음이 편해지고 고뇌가 사라진 걸 보면 명상이 효과가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명상홀에선 매일 저녁 한 시간씩 고엥까 선생(위빠사나 명상 전승자로, 2013년 작고)의 법문을 들었다. 물론 한국어로 번역된 버전으로. 종교적인 얘기는 거의 없고 그냥 붓다가 살던 시대의 옛날 이야기였는데, 고엥까 선생의 말솜씨가 좋다보니 재밌었고, 인상 깊은 이야기도 많았다. 소리만 들리다 보니 조느라 듣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산책


너무도 심심했던 나머지 나도 나흘째부턴 점심을 먹은 후 억새밭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산책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사람들은 억새밭에 난 길을 천천히 돌고 또 돌았다. 모두 혼자씩이었고, 서로의 눈을 피했기 때문에 모양새가 웃겼다. 회피형 인격 장애(맞나?) 환자들이 모인 평화로운 정신 병원 같았다. 공격성이라곤 1도 없고 수동적인, 타인과 눈 마주치는 걸 꺼려 하는 사회성 없는 사람들이 모인 정신 병원. 멍하니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억새밭을 뱅뱅 도는 사람들은 게임 속 NPC들 같기도 했다. 이 로봇들 중 사람이 누구게? 이 NPC 중에 캐릭터는 누구게? 뭐 이런 잡생각을 혼잣말로 중얼중얼 하면서, 혼자 키득거렸다. 센터에 오래 있을수록 혼잣말을 하게 됐다. 별로 내용 없는 얘기. 금이 보고 싶다. 금이는 예쁜 개. 뭐 이런 거.

까치인지 제비인지가 자주 날아다녔는데, 새를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억새를 만지는 것도 재미있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바닥에 난 풀을 관찰하기도 했다. 명상 시간이 끝나기 20분 전쯤 미리 명상홀을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억새밭을 걸으며 찬 공기 냄새를 맡는 건 내가 아주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비 오는 날 영국 세븐 시스터즈에 가서, 아무도 없는 넓은 절벽을 산책하며 풍경에 감탄하던 황홀한 순간이 떠올랐다.

센터에 있는 동안 비가 오기도 하고 눈이 오기도 했는데, 눈 오는 날은 산책이 더 즐거웠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뽀득뽀득 밟으면 기분이 좋았다. 눈을 맞고, 손으로 만지는 것도 느낌이 좋았다. 나는 갈수록 산책을 즐기게 됐다. 햇빛이 쨍한 한낮엔 곳곳에 놓인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햇빛을 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비타민 D가 충전되어서 그런가. 겨울 햇빛이 그렇게 쨍한지 처음 알았다. 하늘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해질녘 무렵 차가운 겨울 공기를 맡으며 걷고 있으면 밥 짓는 것 같은 약간의 탄내가 났다. 어린 시절 저녁무렵까지 친구들과 밖에서 뛰놀다 집에 갈 때 느꼈던 찬 공기와 냄새였다. 상도동 집에 돌아가던 저녁 시간이 생각났다. 아주 좋아하는 공기의 온도 그리고 냄새였다.


명상 센터


이렇게 시간이 흘러흘러 오지 않을 것만 같던 11일째가 왔고, 나는 센터를 청소하고 짐을 정리한 후 서울에 돌아왔다.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대체 뭐가 변한지 전혀 모르겠지만, 마음이 한결 여유롭고 편안하다. 센터에서 돌아온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여전하다. 그 사이 내 평정을 해칠만한 사건 한 두 개가 있었지만,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 많이 어렵지 않았다. 내가 뭔가 많이 변한 건 절대 아니지만, 다녀오길 잘 한 것 같다.

사람은 마음 먹기 나름이라는 말을 진짜 깨닫게 된 것 같다. 일상에선 느낄 수 없던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어서 좋기도 했다. 하늘을 보고, 심심하고, 또 심심한 그런 것. 내가 심심함을 얼마나 견딜 수 없는 사람인지, 너는 나에게 어떤 사람인지,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인지 생각도 충분히 해볼 수 있었고.

마음이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가면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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