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많이 읽는 사람치고 괜찮은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너무 통념을 배반하는 도전적인 얘긴가?

한 스무살까지는 나도 책을 꽤 읽었다. 사회과학책, 소설책, 만화책, 시사 잡지, 문화 잡지... 활자 중독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이 읽었다.

특히 중학교 외고입시~삼수할 때까지 책을 많이 읽었다. 

맨날 공부해야 하고 다른 건 죄책감 들어서 자유롭게 못하니까 책 읽는 게 제일 재밌었음.



근데 대학에 와서 스마트폰이 생기니까 책을 읽을 이유가 없었다. 세상엔 책 말고도 재밌는 게 너무 많았거든.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예능 프로도 챙겨 보고, 팟캐스트도 듣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사람들이 올린 글도 챙겨 읽고.

사람들 만나 술도 퍼마시고. 뭐 그러느라 점점 책에서 멀어졌다.

예전엔 만화책도 엄청 봤는데, 스마트폰이 생긴 후로는 웹툰을 보게 됐다.

수업에 필요한 책만 읽었다. 읽고 싶어 산 책도 끝가지 다 못읽기 일쑤였다.



한 스물 대여섯 때까지는 내가 책을 더이상 읽지 않는다는 사실에 부채감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명제를 부정하기 어려웠다.

책 한 권 안 읽고 영화만 본다는 친구에게 어떻게 집에 책이 한 권도 없냐는 훈계질을 한 것도 기억난다. ㅋㅋㅋ

책 읽어야 하는데 하면서도 안 읽고...뭔가 이렇게 점점 멍청해지는건가 나의 지성이 퇴화되는 건가ㅋㅋㅋ 하는 걱정을 했다.



어느날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있는 집단에 들어가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즐겨 읽었고, 그중엔 다독가도 여럿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본 다독가들은 자신이 책을 많이 읽는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근데 우연찮게도 내가 그 집단에서 본 (수십 명 중) 제일 병신들이 바로 그 다독가들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세 명이 기억나는데, 남자 한 명 여자 두 명이었다.

셋 다 자신이 책을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며 열심히 학교 도서관이나 서점을 들락거렸다.

그런 셋의 공통점이 있었다. 셋 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과는 대화가 불가능했다.



남자는 술자리에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남자애와 대화를 하다 빡쳐서 남자애를 때려버렸다.

PC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는데, 마초적인 의견을 가진 남자애랑 토론하다 빡쳐서... 그 남자애를 때려벌임...ㅎㅎㅎ

책을 엄청 많이 읽었다면서 맨날 어려운 말을 썼는데, 그 사람이 쓴 글은 현학적이기만 하고 뭔소린지 당췌 알아들을 수가 없는 글이었다. 자폐적인 글이라고 해야하나. 허지웅스러운 글이라고 해야하나. 허지웅은 가끔 읽을만한 글을 쓰니까 허지웅한테 실례일듯. 임근준스러운 글이라고 해야겠다.

사람들이 그 점을 지적하니까 엄청 부들부들하며 다신 글을 써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로도 그가 작문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또르르...)

과도하게 PC함을 추구했지만, 실제 생활은 개꼰대였다.

나는 그 남성의 술자리 싸움 얘기를 전해듣고 "그 사람 듀게(듀나 게시판)할듯"이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진짜 듀게하는 사람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듀게에 어떤 애 욕을 상세하게 썼다가 발견됨.

다른 커뮤니티에는 자기 글을 비평한 사람들을 통으로 까는 글을 올렸다.

내가 이렇게 너네보다 책 훨씬 많이 읽고! 도서관에서 몇 년을 보내고! 이렇게 똑똑한데! 책도 안 읽는 니네가 뭘 알아?

하는 울분이 가득찬 글이었다.

좀 안쓰러웠는데...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사회성을 잃은 것 같았다.

아니 사회성이 없어서 책에 빠져든건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진 잘 모르겠으나...그 남자는 책을 끊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1, 2는 자기들끼리 친했는데. 둘 다 자신과 다른 의견은 한 톨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도무지 대화가 안되는 사람들이었다.

일베하는 사람이랑은 말도 섞으면 안된다면서 지나치게 열내는 사람들이었다. 

근데 이 사람들은 정도가 지나쳐서 일베뿐 아니라 자신과 의견이 다른 모든 사안에 열을 냈다.

그냥 의견이 다를 때만 그러면 괜찮은데, 평소에도 훈계충 도덕충이어서 너무 피곤했음.

언제나 나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훈계를 해댔다. 오로지 자기 방식만 맞다고 주장했다. 자기 기준이 절대화됨.

난 내 도덕적 기준에 맞춰 살 뿐인데 그게 틀렸다며 훈계질. 근데 지네가 또 제대로 살고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두 분 다 책을 참 많이 읽고 그걸 참 많이 과시했더랬지...



셋의 공통점은 언제나 자기 생각만 맞다고 생각하고, 남한테 그걸 강요하려 하는 훈계충이란 거였다.

이 사람들이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말로는 

"난 예능 프로 같은 거 안봐." "난 솔직히 현대 미술은 예술 아니라고 생각해. 수십년 동안 땀과 노력을 들여야 예술가인데 현대 미술가는 아니잖아."  

등이 있음. 한없이 편협했다. 

마치 클래식 외의 대중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편협한 클래식 덕후나, 락 외엔 다 저질 상업주의 음악이라고 무시하는 락덕후처럼. 

보통은 중2가 지나 중3이 되면 어떤 장르건 좋은 노래는 좋다는 걸 알게 되던데.

저 사람들은 여전히 클래식만 락만 음악이라고 여겼다.



저 사람들을 관찰하며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데도 왜 저렇게 편협할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저렇게 된 게 아닐까 싶었다.



왜 책 많이 읽고 저렇게 됐을까 생각해봤는데.


1. 책은 요즘 세대의 주류 미디어가 아님. 이 세대의 주류 언어는 이미 활자가 아니라 영상이다. (보기에 따라 과도기일지도)

아기들은 말을 떼기 전부터 뽀로로 동영상을 본다. 이 시대 최고의 천재들은 문학이 아닌 영화판이나 유투브에 있다.

이 세대 사람들의 주류 언어를 받아들이지 않고(난 예능 같은 거 안봐! 현대 미술이 예술이야?) 
여전히 과거의 언어에만(책) 집착하는 것은 그 사람을 타인들로부터 고립시킨다.


2. 사회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데,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배워옴.

물론 이것은 우리가 어릴 땐 활자 언어가 사회의 주류 언어였기 때문이다. 요즘 세대에는 이 통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함.

10대 내내 온갖 책을 읽은 아이와 온갖 영화를 본 아이 중 책을 읽은 아이가 꼭 우월할까? 아니라고 본다.


무튼 우리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배워왔기에, 책을 많이 읽지 않는 것에 대해 부채감이 있다.

반대로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에게는 대다수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있음.

이 우월감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 옳다는 편협함을 부추긴다.


3. 책은 일방향적 미디어다. 블로그나 인터넷 커뮤니티 글은 댓글로 글쓴이랑 토론할 수 있지만, 책은 그게 불가능.

고로 나와 생각이 같은 책만 읽게됨. 나와 생각이 다른 책까지 골고루 읽을 수 있다면 책을 많이 읽는 게 유익할 거라 생각하는데, 보통은 나와 생각이 다른 책은 읽지 않음. 나와 같은 의견만 내내 보니 확증 편향이 강해진다.


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청소년기에 책을 많이 읽는 것과 성인이 되어 책을 많이 읽는 건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의견이 고정되지 않은 청소년기에는 자신이 원래 가진 생각과 다른 책도 큰 거부감 없이 읽고,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다. 

때문에 청소년기까지는 책을 골고루 많이 읽는 게 좋다.


근데 자신의 의견이 고정된 성인 이후에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책은 거의 읽지 않게 된다. 생각이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오로지 반박만 하며 읽을 뿐, 설득되지 않는다. 책을 그런 식으로 꾸준히 읽느니 안 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지만 맞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인간이 되기 십상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성인이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는 건 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컬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민희 베를린 여우주연상  (0) 2017.02.19
넷플릭스 테라스 하우스 추천  (8) 2017.02.14
춤추는 도련님 - 하양지  (0) 2017.01.05
해피 매니아 - 안노 모요코  (0) 2016.11.14
이자혜 옹호글  (8) 2016.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