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공원 갔는데 어린이날이라고 축제가 열렸더라고
공무원들이 행사를 열심히 기획했는지
바람넣어 만든 거대 미끄럼틀에, 트램폴린에, 애들 타는 기차까지 갖다놨음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각종 행사 부스들 있고(페이스페인팅, 뭐 만들기, 슬라임, 그림그리기 대회 등등...)
솜사탕 팔고 번데기 팔고 오징어 팔고...

다들 텐트치거나 돗자리 가져와서 어른들 맥주먹고 애들 꺅꺅 거리며 뛰댕기고 연날리고

그냥 동네 갔다가 그 광경 보고
나도 가려던 곳 가는 거 좀 미루고
거기서 남친이랑 오징어랑 맥주 사다 마시면서
신난 어린이들이랑 귀여운 강아지들 구경했음

난 어린이는 아니지만 진짜 코로나 이후로 그렇게 사람들 많이 모여서 막 하하호호 웃고 있는 거 보니까 그냥 그 분위기가 꿈 속 같고 너무 좋았다...

벤치는 물론이고 바닥까지 사람 앉을 수 있는 곳들은 다 차서 농구장 앞 벤치만 비어서 거기 앉아서 애들 농구하고 있는 거 구경하는데

옆 벤치에 어떤 초딩 남자아이가 혼자 시무룩하게 앉아있더라...부모님 없이 혼자 온 것 같았음

어떤 아저씨가 자기 애랑 있다가 걔가 혼자 있는 거 보고 챙겨서 같이 농구도 좀 하고 이름도 물어보고 그러던데
그 아이는 더 안하겠다며 혼자 벤치에 앉더라

나도 그렇고 뭔가 다들 가족이랑 친구랑 있는데
혼자 있는 아이가 짠해서 보고 있는데
기독교 전도하는 교회 아줌마가 와서 혼자 있는 아이한테 열심히 전도 멘트를 하더라고 비눗방울로 꼬시면서
기독교 싫어하는 남친은 어휴 하여간 기독교ㅉㅉ 이러면서 욕하는데 애는 너무 잘 아줌마 말 듣더라
걍 누구라도 말 걸어주길 바란 게 아닐까 싶었음...
그렇게 얘기 다 들으니까 아줌마가 아이한테 뭔가 장난감을 줬고, 애는 그거 받아서 벤치에서 일어나서 가버림
그냥 뭔가 짠했다 어린이날 혼자 있는 어린이가

어린이한테 어린이날은 정말 중요한 날인 것 같다
내가 엄마아빠한테 고마운 건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진 않았어도 엄마아빠가 나랑 언니 데리고 여기 저기 놀러다니는 거 진짜 많은 데 다 데리고 다녀준 거
그런 것들이 진짜 커서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어른이 돼서 생각해보니 어린이날 놀이공원 데려가주는 거 어른이 어른 체력으로 하기 진짜 힘든 건데
특히 다들 주6일 일하던 그 시절(우리아빠는 주7일 일했다...) 어른들은 참 피곤하기도 했을텐데 우리 엄마아빠는 놀이공원이고 산이고 들이고 서울 곳곳이고 오만 데 다 데리고 다녀줬다

엄마아빠가 계곡 좋아해서 계곡도 진짜 전국 방방 곡곡 다 다녔고 새벽 동대문, 노량진수산시장, 여의도공원, 명동, 신촌, 광화문, 교보문고, 여의도공원, 서울대공원, 자연농원, 드림랜드, 영화관...
그중에서도 평소엔 자야 할 시간에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엄마아빠언니랑 동대문, 노량진수산시장, 심야영화 보던 거 너무 기억 잘남

난 영화관에서 엄마아빠랑 처음 본 어른용 영화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와호장룡'인데 영화도 진짜 재밌었지만 가족들이 다같이 가던 그 영화관 분위기랑 그런 게 넘 좋았다
남친 없었을 땐 어른돼서도 영화 싫어하는 엄마 빼고 아빠랑 언니랑 셋이 아니면 아빠랑 둘이 영화보러 자주 다녔는데 다 참 좋은 추억

이런 생각 하면 진짜 아이는 돈이 아니라(물론 돈도 중요하겠지만...) 체력으로 키우는 것 같다

나 어릴 땐 반지하도 살고 뭔 산동네 재개발 중인 할렘가 비슷한 동네에도 살고 그랬지만 어른돼서나 그게 별로 좋은 집, 좋은 환경이 아니었구나 싶지 어릴 땐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엄마아빠는 돈이 없어도 품 들여서라도 어떻게든 잘 놀아줬다 지금도 워낙 여행 좋아하는 분들이지만...생일엔 꼬깔모자 씌워주고 케익해주고 선물 주고, 어린이날엔 어디 유원지 가서 뛰어놀게도 해주고 부메랑도 사다 던져주고 연도 날려주고

명절에도 우리 아빠는 어른들보다 애들이랑 노는 걸 좋아해서 어른들끼리 고스톱칠 때 언니랑 나랑 사촌동생들 데리고 할머니 동네 공터에 불꽃놀이 도구 잔뜩 사서 불꽃놀이 꼭 해줬다. 우리 집 애들 전용 명절행사ㅋㅋㅋ 우리가 하고 있으면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 모여서 구경함ㅋㅋ

크리스마스엔 트리 놓고 가족들끼리 선물 사다 포장해서 트리 밑에 놓고 당일에 개봉하고...겨울에는 눈사람 만들고 그랬지

난 이렇게 자라서
가난하든 부자든 엄마아빠면 애들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고 놀아주는 게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커서 보니 바빠서든 성향이 달라서든 어째서든 안 그런 부모님들도 많더라
금쪽같은 내새끼 같은 프로그램 봐도 애들은 엄마아빠랑 놀러다니는 걸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바쁘다고 애들이랑 1년에 한번도 놀러 안 다니는 집도 있고 그렇더라고

근데 내가 어른돼보니 바빠서 어째서 애들 데리고 못 놀러다닌다는 건 좀 핑계라고 생각함...연애할 때는 짬내서라도 어떻게든 데이트는 했으니 결혼했을 거 아냐

우리아빠는 젊을 때 주7일 일하고, 매일 밤 10시 반에 퇴근하면서도 휴가때, 퇴근 후 새벽에...그게 아니면 회사 점심시간에 잠깐 나와서라도 우리랑 놀아줌

그냥 아무리 바빠도 애들이랑은 놀아줘야한다
그래야하는, 그럴 수 있는 기간이 엄청 긴 것도 아닌데
그 시기만이라도 여기저기 데리고 다녀줘야 한다

물론 요샌 그런 부모가 많진 않겠지만
그냥 문득 어린이날인 오늘도 부모님이 아무데도 같이 안가주거나 해서 하루종일 혼자 시무룩하게 있었을 어린이들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져서 주절주절 써봤음
어린이날은 어린이랑 놀아줍시다...선물도 사주고.

나도 어린이날이니 큰 맘 먹고 내가 아는 어린이인 조카에게 선물을 사줬다...각종 장난감 고민하다가 상상력을 길러준다는 발도르프 어쩌고 원목 야채 장난감 사줌

근데 36개월 이상 사용하라더니 아직 12개월인 어린이 눈엔 별로 흥미가 안 생기나봄...ㅋㅠ 관심없었다는 후문...쌈디가 조카한테 자동차 사줬는데 외면 받았을 때 기분을 이해할듯함...그래도...언젠가는...잘 갖고 노는 날이 오기만을 바랄게...하지만...다음 어린이날에는...아주 자극적인 장난감을 사줘야겠음

자극적인 장난감들에 밀려 외면받은 조카 장난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