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재주소년을 좋아합니다. 처음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고 계기가 있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재주소년을 좋아하기 전까지는 귤, 명륜동, 앨리스 같은 재주소년하면 누구나 알 법한 곡들만 알았습니다. 재주소년의 팬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앨범을 몇 장 냈는지조차 몰랐거든요. 그들에 대해 아는 건 그들이 군대에 다녀왔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가 저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했을 때, 그는 이사를 한 날이었고, 이사를 도와준 선배와 술을 한 잔 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시각은 새벽 두 시였습니다. 나는 그 때까지 그를 속으로 엄청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핸드폰 화면에 뜬 그의 이름을 보고 마음이 많이 설렜습니다. 목소리가 떨릴까봐 전화를 받는 것이 고민될 정도였습니다. 술을 한 잔한 그와 맨 정신 형광등 불빛 아래의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창틀에 기대 하늘을 바라보며 그와 전화하는 그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후에는 제가 술을 한 잔 하고 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때 그의 통화 연결음이 바로 재주소년의 '유년에게'였습니다. 전화를 받은 그에게 통화 연결음이 무슨 노래냐고 묻자, 그가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제주도라 했습니다. 학교 답사로 제주도에 간 거였고, 나는 그에게 나한테 말도 없이 제주도에 갔냐고 맨정신으로는 절대 하지 못했을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제주도에 있는 재주소년이네. 라는 뭐 그런 뻔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웃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나에게 "나도 그저께 했는데 뭐가 미안해."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술을 먹고 거는 전화는 십중팔구 술에서 깨고 나면 후회하기 마련이지만, 그 전화는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오롯이 좋은 기억으로만 남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고 그가 "너랑 있으면 내 일상이 깨지는 게 두려워."라는 말만을 남겨 놓고 떠났습니다. 동아리 오빠들과 밤새 술을 마셨습니다. 술집에서 잠깐 빠져나와 술집 앞에 있는 신촌의 한 초등학교 앞에서 밤새 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열통쯤 했을까. 그는 끝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전화기에선 무심하게도 재주소년의 '유년에게'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텅 빈 운동장에 앉아 붉게 해가 지는 것을 보며 나의 유년에게 인사한다'는 그 평온한 멜로디와 가사가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나는 길가에 앉아 울면서 제발 전화좀 받으라고 혼잣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도, 다음 주도 그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나는 상처가 나면 상처 부위의 딱지를 자꾸 뜯어버리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면 분명 회복 속도는 더디지만 결국 다 낫고 나면 더 이상 상처가 아프지 않습니다. 슬픈 일이 있으면 그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아질 때까지 그 생각을 합니다. 무언가를 애써 도피해서 잊으려 하면, 나중에 우연히 그 일과 관련한 무언가를 마주하고 자연스럽게 그 일이 떠올랐을 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잊기 시작해야하니까요. 



밤새 걸었던 응답 없는 전화 탓에, 재주소년의 '유년에게' 후렴구는, 텅 빈-하는 구절만으로도 저를 울컥하게 만드는 노래가 되어있었지만, 그로부터 며칠 뒤 저는 레코드점으로 가 재주소년의 '유년에게' 앨범을 샀습니다. 그리고 동네 스타벅스에 앉아 '유년에게'라는 이름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쓴 시나리오는 해피엔딩이었고, 그 시나리오는 내 바람이 담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쓰여진지 7개월이 지나고서야 다시 만나게 된 그와 나는 결국 좋게 끝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드는 일은 없겠지요.




이제 남은 것은 재주소년입니다. 나는 재주소년을 좋아합니다. 이 이야기가 재주소년을 좋아하는 이유가 되기엔 우습지만 어쨌든 나는 재주소년을 많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알게되고 좋아하게 되면서 행복한 순간은 너무 짧았고, 슬픈 순간은 너무 길었지만. 그래도 나는 재주소년이 좋습니다. 그가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그에게 주려고 했지만 주지 못한 채로 내 책상 한 켠에 남아있는 책갈피와 비누방울이 서운하지 않을 만큼,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