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는 춤추는 걸 무지 싫어한다. 나는 좋아한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오랫동안 다녔던 운동 시설은 댄스학원이었다. 나는 아무데서나 춤을 잘 춘다. 길을 걷다가도 왠지 삘이 오는 노래가 나오면 추고, 맛있는 걸 먹다가도 신나서 춘다. 남자친구는 그럴 때마다 내가 신기하다고 한다.

사실은 나도 원래 춤추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댄스학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내 몸의 관절이 비실용적인 이유로 움직이는 꼴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했다.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춤을 춰야 할 때는 빨리 때려치고 집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도 목소리는 한껏 신났지만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노래방 쇼파와 테이블을 점령한 친구들을 보면서도 차마 동참하지 못하고 내 자리를 지켰다.

나는 왜 춤추는 걸 싫어했을까? 내 몸은 엄청 어색하게 움직인다. 언젠가 민정 언니는 내 몸이 귀귀 웹툰 속 캐릭터 같다고 했고, 그 얘기를 들은 애들은 모두 맞장구치며 웃었다. 내 몸은 항상 어딘가가 엉성하고, 여기저기 잘도 부딪힌다. 그냥 남들처럼 움직일 뿐인데, 온 몸, 특히 튀어나온 옆구리나 무릎 같은 곳에는 멍이 마를 날이 없다. 이상하게 넘어질 뻔 할 때도 많다. 내 몸을 내가 컨트롤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그래, 나는 몸치다.

 

귀귀 만화. 이런 느낌.

 

 

중학교 때 다 같이 보아의 넘버 원에 맞춰 춤을 췄을 때, 고등학교 때 조규만의 다 줄거야에 맞춰 율동을 하며 담임 선생님의 축가를 불렀을 때 나는 다른 애들보다 학습 속도가 느렸다. 나는 공부를 잘해서 내가 다른 애들보다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부도 못하고 나보다 머리도 안 좋다고 생각하던 애들이 나보다 훨씬 빠르게 춤과 율동을 익혔다.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몸이 움직이는 걸 보고 어떻게 내 몸을 따라 움직일 수 있는지 참 신기했다.

20대가 되어 춤을 추게 된 건,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바라는 내 모습에 나를 끼워 맞추려 노력한다. 어릴 때부터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은 그때 그때 정해져 있었다. 캘리포니아 10대 소년이 되고 싶어 애써 공책 앞에 이름 적고 싶은 마음을 참고 공책 표지를 비우며 살아온 나다. 나는 춤을 엄청 잘 추는 사람이고 싶었다. 신날 땐 몸으로 행복을 표현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무엇보다 뭔가 주목받을 자리에 갔을 때 춤을 춰서 사람들 입에서 탄성이 나오게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취준생이어서 가격이 저렴한 학교 옆 마포아트센터에 갔다. 한달에 3만원쯤 내면 주 2회씩 다이어트 댄스를 수강할 수 있었다. 춤이 무섭게 느껴졌기에 혼자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친구들을 열심히 꼬셔 그중에서도 함께 다니겠다는 연우를 꼬실 수 있었다. 하지만 유학 준비로 바빴던 연우는 나를 자주 바람 맞히더니 결국 거의 오지 않게 되었다. 나는 혼자서라도 열심히 다니려고 노력했지만 연습실을 가득 메운 아주머니들의 기운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왠지 뽕삘이 나게 바뀐 듯한 비의 라송과 강남이 속해 있었던 M.I.B의 G.D.M, AOA의 짧은 치마 등을 배웠는데 내가 바라는 댄서가 되어가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댄스 강사님과 맨 앞자리 고인물 아주머니들의 춤은 집에서 찾아보면 분명 원곡 춤과 같은 춤인데도 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춤을 추겠다는 목표는 이루지 못하고 흐지부지 다이어트 댄스 반을 그만두게 되었다.

취업을 하고 나서 지루했던 어느날 길을 걷는데 댄스학원 간판이 보였다. 댄스학원에 들어가서 내 또래 같아보이는 원장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월,수 반과 화, 목 반을 같이 들으면 할인이 된다고 했다. 설명을 듣자마자 두 반을 함께 결제했다. "보통 듣고나서 생각하고 오신다고 하는데, 이렇게 바로 긁으시는 분은 처음이에요."

월, 화, 수, 목 댄스학원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회사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 밥을 재빨리 먹고, 편한 티셔츠와 레깅스로 갈아입고 댄스학원까지 걸어갔다. 댄스학원에 가면 30분 정도 준비운동을 하고 30분 정도는 수업을 한다. 마포아트센터의 평균 연령이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었다면, 댄스학원의 평균 연령은 17세 정도였다. 초딩부터 고딩까지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선생님을 통틀어도 우리 반에서 내가 제일 연장자였다. 그런데 춤은 내가 제일 못 췄다. 나는 느렸고, 허우적댔으며, 심지어 준비운동할 때 다리도 안찢어졌다.

춤을 배우고 나면 영상을 찍었는데, 나는 어떻게든 잘하는 초딩 아가들 뒤에 수납되기 위해 노력했다. 내 춤실력이 부끄러워서도 있지만 학원 홍보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선생님에게 미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상을 보면 내 실력은 정말 처참했다. (그렇게 1년을 다녀도 처참했다.) 그래도 수업을 빠지지 않고 매일매일 열심히 갔다. 정말 재미있고 내 삶의 활력소여서 그랬다. 트와이스의 Dance the night away 를 출 때는 2인 1조로 짝지어 춤을 췄는데, 나와 짝이 된 초딩 아가에게 미안했다. 친구들이 그 아가는 집에 갈 때 "나 어떤 아줌마랑 짝됐어ㅠㅠ"하고 울 거라고 날 놀렸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럴 것 같았다. 아무튼 춤 실력이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춤을 추는 것에 대해 두려움은 사라졌다.

댄스학원을 1년쯤 다녔더니, 어디엔가 가서 내 춤실력을 뽐내고 싶었다. 친구들과 술먹고 노래방에 가면 모모랜드의 뿜뿜을 열심히 췄으며, 친구들이 못춘다고 놀려도 혼자 열심히 추었다. 그러다 발견한 을지로의 '감각의 제국'은 혁명이었다. 여기는 헌팅이 금지되고 오로지 춤만 출 수 있는 막춤 공간인데, 보통 클럽과 달리 공간이 아주 환해서 서로 춤 추는 게 다 보이는 곳이었다. 친구들과 감각의 제국에 간 나는 정신줄을 놓고 열심히 춤을 췄다. 1년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낸 것이다. 나는 곧장 그곳의 핫 피플이 되었다. 춤만 춰도 탄성이 나오게 하겠다는 내 포부와는 조금 다른 결말이었으나, 내 춤에 삘 받은 모르는 여성이 내게 다가와 우리는 마주보고 신나게 춤을 추기도 했다. 그리고 예전의 나처럼 춤추기를 극도로 거부하며 자리에 앉아있던 친한 동생 소영이가 이 모든 것을 영상으로 찍어주었다.

내가 댄스학원에 다녀도 몸치라며 놀리던 소영이조차 인정하고 만 그날 나의 춤 실력. 그날 나는 20년 넘게 가지고 있었던 춤 공포증에서 탈출했다. 내가 바라던 날이었다.

춤추기 싫어하는 남자친구를 보면 예전의 내가 생각난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 좋은 걸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픈 극성 전도사처럼 춤추기를 전도하고 싶어진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자의식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쓰지 않아야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자의식이 클수록 춤추기 어렵다. (비슷한 것으로는 사진 찍히기가 있다. 나도 한때는 사진 찍히기를 싫어했지만 이것도 노력으로 극복했다.) 하지만 그걸 벗어나 춤을 추면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아기들은 누구나 뽀로로 노래를 틀어주면 춤을 춘다. 춤을 추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데, 나도 그랬고 많은 사람들도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느라 본능을 억제하고 산다. 춤을 추게 된 나는 본능에 충실한 것은 생각보다 더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즐거울 때 춤을 추면 두 배로 즐거워지고, 맛있을 때 춤을 추면 두 배로 맛있어진다. 슬플 때 춤을 추면 왠지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몸을 움직이는 재미는 인간 존재 자체의 재미이다.

엎드린 남자친구 등에 아기 침팬지처럼 매달려 있는데, 남자친구가 갑자기 트월킹이라며 엉덩이를 흔들거렸다. 그 순간 나는 남자친구에게도 춤을 추고 싶은 내면 어딘가의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춤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므로. 그래서 나는 남자친구에게 트월킹을 계속 해볼 것을 종용했지만, 남자친구는 격하고 진지하게 거부했다. 남자친구가 언젠가 춤추기를 가로막는 마음 속의 벽을 허물고 나와 함께 춤출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린다. 춤추는 건 정말 좋으니까!

 

 
마포아트센터의 열정 넘치던 댄스 수업이 생각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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