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팔다
유안진
모임에 갔더니 먼저 와서 웃고 떠드는 내가 있지 않는가
그는 나보다 더 잘 웃고 웃기도 좋아
내가 그의 못난 짝퉁 아닌가 의심마저 들었다
정신 차리고 끼어들어 인사를 해도 다들 본체만체
있는 내가 없는 내가 되어 버렸는데
눈길이 마주친 그는 얼른 외면해 버린다
팔 거라고는 그림자 밖에 없어서
그림자에게도 흰머리가 돋거나 주름이 생기기 전에
얼른 팔아야 제값 받을 것 같고
팔고 나도 쉽게 또 생길 줄 알았지
햇빛 눈 부시는 날 빌딩을 지날 때나
네온 불빛 현란한 밤거리에서도
떼지어 나와서 따라다녔으니까
비 올 때나 어두운 곳에서는 안 보이다가도
어떤 때 어떤 곳에서는 한꺼번에 몰려나왔으니까
하나쯤 없어도 괜찮을 줄 알았지
유령이 사 갈 줄은 꿈에도 몰랐지
대신 내가 유령이 될 줄은 더 더욱 몰랐지
흉내내며 조롱하며 따라다니던 검은 감시자(監視者)가
썩어문드러진 고통의 얼룩이 내 넋인 줄 몰랐지
이럴 순 없다고 달려가자
그는 어느새 반대쪽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한 번 더 뒤 돌아섰을 때는
출구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고작이었고
잘 가라고 흔들어대는 손들 사이로
한 번 더 눈길이 마주쳤던가
나는 이미 절반너머 녹아버린 얼음조각이었다
시집 거짓말로 참말하기(천년의 시작,2008) 중에서
친구가 무슨 시를 제일 좋아하느냐 묻길래 그 당시엔 별생각없이 이 시라고 즉흥적으로 대답했는데 그 이후로 계속 읽고 또 읽으니 정말로 제일 좋아하는 시가 되었다
읽으면서 왠지모르게 괴테의 파우스트를 떠올렸는데 나중에 유안진 시인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이 시의 그림자는 영혼을 염두하고 썼다한다
어떻게 읽었든 시는 읽히는 순간부터는 시를 읽는 사람의 것이 되는 것이리라
여러모로 공감도 되고 위로도 되는 시.
영혼 한 번 안팔고 심지 굳게 세상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몇 없으니 정몽주나 사육신 같은 그런 사람들이 수백년간 존경받는 것이겠지.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공감이 가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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