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다큐페스티발 2013에서 보게 된 '아버지의 이메일'. 주위에서 평이 좋기에 잔뜩 기대를 하고 봤다. 그리고 영화는 내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켰다.
영화는 소재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가족들과 딱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컴퓨터를 배워 둘째 딸에게 42편의 이메일을 보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충분히 보고싶다. 영화감독인 둘째 딸이 아버지의 이메일을 다큐멘터리로 만든 건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정도로, 아버지의 이메일은 매력적인 소재다.
하지만 말이 쉽지, 이메일을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한다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 이메일 자체가 영상화하기 어려운, 활자들이기도 하고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을 영상화한다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테다. 애초에 영상화하기 어려운 소재라는 이야기다. 거기에 감독 자신의 가족사를 구구절절하게 세상에 드러낸다는 것도 그리 쉬운 선택이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중간에 감독의 어머니가 둘째 딸인 감독과 이야기하다가 드러난 과거의 상처를 감당하지 못하고 "더 이상 이런 거 안물어봤으면 좋겠어. 니 언니한테도 괜히 아픈 상처 끄집어내지 말고." 라고 말하는 장면은 감독과 감독의 가족들이 이 다큐멘터리를 만듦으로써 짊어져야만 했을 무게를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영화는 아버지 개인의 삶이 우리 나라의 현대사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한다. 열네살 나이에 인민군이 싫어 목숨을 걸고 월남했던 아버지는 6.25를 겪고, 베트남 전쟁에 일하러 가고, 사우디 아라비아에 일하러 가고, 88올림픽 자원봉사를 하시고 말년에는 평생 살던 집의 재개발 문제에 투쟁하시다 돌아가신다. 그야말로 아버지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6.25 때 실종된 처가의 두 처남이 전쟁 전에 보도연맹 활동을 했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낙인찍혀 원하던 외국이민을 가지 못했던 아버지는 반평생을 아내를 원망하고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술만 마시며 우울증을 가진 채 살다가 세상을 떠나신다. 영화는 우리 나라의 현대사가 한 가정에 미친 영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거대한 사회의 흐름 앞에 한 개인과 가정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 속 아버지가 특별한 경우는 아닐 것이다. 내 외할아버지는 1920년대 생이셨는데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삶을 책으로 펴내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할 정도로 내 외할아버지의 삶도 우리 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 하는 삶이었다.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집이나 사연 없는 집이 없는 그런 시대가 우리나라의 1900년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이 다큐멘터리는 엄청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고, 때문에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아버지의 삶을 바라보기 보다는 아버지 개인과 이 가정에 초점을 맞추어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 보는 내내 눈물도 많이 흘렸다. 현대사와 아버지의 삶 사이의 연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눈물보다는 한숨이 더 많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아버지 개인과 가족들에게 맞추어 영화를 봤고, 그러다보니 내 가족과 부모가 생각났고, 그래서 영화를 보는동안 꽤 많이 울고 말았다.
다큐멘터리 속 아버지는 내 기준에 굉장히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일찍이 영어를 배워 미군부대에서 일을 했고, 전쟁을 겪고도 돈을 벌러 베트남에 갔다. 사우디 아라비아도 갔고, 88올림픽 자원봉사를 했으며, 운송회사에 경비일까지. 심지어 일을 하지 않아도 됐을 노년에는 지역 복지관까지 다니시며 인터넷과 포토샵까지 배우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참 운이 없었다. 아버지의 불우한 가정사는 그 시절 모두가 하나씩 안고 있던 것이라고치더라도, 그 이후의 삶도 굉장히 운이 없었다. 아버지가 베트남에 갔을 때 베트남 전쟁은 끝물이었고, 처가는 '빨갱이 집안'으로 몰려 이민의 꿈도 무너졌다. 힘들지만 열심히 해보려했던 운송회사에서는 운전을 하다가 사람을 치어 감옥까지 갔다. 이쯤되니 우리 현대사의 굴곡도 굴곡이지만 나에게는 그저 지지리도 운 없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고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연민이 생겼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보려했던 아버지가 일련의 좌절들을 겪으며 우울증에 걸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어도 다큐멘터리 속 아버지의 삶을 살았다면 아버지만큼은 살 수 있었을까. 돌아가시던 해에 컴퓨터를 배워 딸에게 마흔 통이 넘는 이메일을 써내려가던 아버지의 마음이 정말 와닿아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평생을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삶. 아버지는 가족 중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둘째딸에게 이메일을 보내면서 마지막 말을 건네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메일에서 당신을 용서하라 말씀하셨지만, 실은 이해받고 싶었던 것일 거다.
내가 만들었던 영화의 주제 중 하나는 '세상에는 오해가 아주 많은데, 오해는 오해를 풀려는 마음, 그것이 혹여 아닐까 의심하는 의지가 없으면 절대 풀리지 않는다.'였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이 가족이라 할지라도)에게 관심이 없고 혹시 오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도 오해를 푸는 것을 주저한다. 불편함과 대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용기를 내어 당신의 이야기를 건넸고,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아버지가 내민 손을 잡아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GV에서, 감독은 감독의 언니가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감독의 언니는 영화 속에서 내내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이고, 아버지를 이해하려하지 않고, 동생이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도 딱히 탐탁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언니에 대한 그런 묘사 때문에 둘째 딸인 감독도 언니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나는 감독의 언니도 이해가 갔다. 첫째 딸은 아버지가 휘두른 폭력의 좀 더 직접적인 피해자였으며, 아버지의 정도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심지어 아버지의 이메일조차 본인은 받지 못했고, 동생이 받은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애초에 첫째 딸과 둘째 딸 사이의 포지션 차이도 포지션 차이지만,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고려해보면 언니가 취한 입장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관객으로서 나는 언니가 아버지를 용서는 못해도 이해는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뉴스를 보다보면,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그저 그 사건 자체가 안타까운 사건들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가 그런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싶다. 누가 잘못했고 잘못안했고 할 것 없이 그냥 가족들 모두가 안타깝고 슬펐다. 영화 속의 가족이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행복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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