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쉬 카푸어의 '붉은 색의 은밀한 부분 반영하기'를 보며 느껴지는 붉은 은밀함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지시하여 상상력 펼치기]

 

 

 나는 내 적혈구가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차례가 다가오는 것이 긴장되었다. 나는 흰 러닝셔츠에 군청색 브리프를 입고, 같은 복장의 남자들과 함께 줄을 서 있었다. 나는 230년 전 영화인 워쇼스키의 ‘클라우드 아틀라스’ 속 복제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을-0755번, 2번 검사대.”

 

 낮은 기계음이 내 차례를 알렸고 나는 검사대로 향했다. 서늘한 기운이 나를 감쌌다. 검사대는 작년과 다른 모습이었다. 검사대는 양 옆에 내 키 높이의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칸막이 앞에는 작은 구멍들이 동그란 모양을 이루고 있었는데, 스피커인듯 했다. 스피커 위에는 스피커를 이루고 있는 구멍들보다 조금 더 큰 구멍이 있었다. 구멍 위에는 굴림체로 ‘구멍에 오른쪽 눈을 대시오.’ 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구멍에 오른쪽 눈을 댔다가 소리를 지를 뻔했다.

 

 구멍 너머에는 하나의 눈동자가 있었다. 초록색 눈동자였다. 깜박이지 않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왔다. 초록색 눈동자의 주인이 말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혈압 130-80, 골수 상태 양호, 백혈구 수치 양호... 뭐 문제될 건 없겠습니다만.”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오는 짧은 순간동안 나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침을 삼키고 싶었지만, 상대가 내 긴장을 알아챌까 그럴 수 없었다.

 

“적혈구가 문제로군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내 하얀 러닝셔츠만이 파르르 떨렸다. 초라한 내 적혈구. 망할. 그래 나는 평생 적혈구가 문제였다.

 

 

“색깔도 아름답지 않지만...그보다 더 문제인 건 연애세포가 아예 없군요. 이런 적혈구는 처음 봅니다. 3차 검사대로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셔야겠습니다.”

 

 처음보긴 개뿔. 나를 검사한 20년동안 검사대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저 말을 했다. 매해 검사원이 바뀌는 걸까.

3차 검사대로 가라는 것은 말이 좋지 곧 탈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검사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이 검사는 일반적인 신체검사를 비롯해 유전자 검사, 생식기능 검사 등으로 이루어진다. 검사에서 일정기준을 충족해야만 짝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사는 이 곳의 규칙이었다. 나는 20살이 된 후로 매년 신체검사에 응모해왔고 40살인 올해가 내 마지막 기회였다. 오늘을 위해 연애세포를 생성해준다는 약을 비싼 돈을 들여 먹기도 하고, 후천적으로 연애세포를 생성하는 법을 알려준다는 학원을 다니는 데에 내 월급을 다 쏟아 붓기도 했지만. 결국 최종결과는 이랬다. 나는 20년동안이나 흰 러닝셔츠와 군청색 브리프를 입고 복제인간이 된듯한 굴욕적인 기분을 느끼면서 이런 검사를 연례 행사처럼 매 해 해왔다. 검사를 받기 위해 내야만 했던 휴가의 급여들만 모았어도, 미소녀 로봇을 세 개는 샀을 거다.

 

 나는 시스템 자체에 반항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정밀 검사를 받으라니. 대체 그 말만 몇 년쨉니까. 더 이상은 저도 지친다구요. 정 안되면 저와 같은 입장의 여자라도 연결해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20년만에 처음으로 스피커의 목소리에 반박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칸막이 너머로 불편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초록색 눈동자가 느리게 한 번 깜박였다.

 

“을-0755님. 그건 아무래도 곤란합니다. 귀하가 알다시피 우리 시스템의 목표는 인간의 마음에 가해질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한…당신의 적혈구는 타인에게 너무 치명적인… ”

 

 어느새 초록색 눈동자는 빨간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스피커를 발로 한 번 뻥 찼다. 

 

 그 순간, 내 피 속 적혈구가 반짝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검사대에서 뒤돌아 나오며, 초라한 적혈구를, 내 적혈구를 사랑해주기로 하였다. 나는 이제 빨간 적혈구를 남에게 들키지 않게 은밀하게 사랑하면 될 일이었다. 스스로를 사랑하여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조차 막고 있는 이 사회에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최대한 은밀하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 밖에는 없었다.


2013.02.13 23:59, 발렌타인데이 기념 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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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하고도 조금 더 전에 가장 친한 친구들과 글쓰기 모임을 했었다.

지금은 미술하러 독일로 떠난 ㅇㅇ이가(ㅇㅇ인 이유는 그녀 이름의 초성이 ㅇㅇ이라서) 낸 주제로 썼던 글.

글쓰기 모임 재미있었는데, 좀 하다가 흐지부지 돼버렸다. 

애들이 다들 간간히 그 때 그 글쓰기 모임을 다시 하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

어제가 고백데이였다고 한다. 고백데이 기념 작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