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또 수능의 날이 찾아왔다. 올해 수능날은 입동이었고 그래서인지 수능날이어서인지 추웠다.
나는 수능을 무려 네 번이나 봤다. 전국에 나만큼 혹은 나보다 수능 많이 본 사람 흔치 않을텐데. 아무튼 자랑은 절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대충 내가 수능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느끼는 게 이해 되겠지. 거기다가 수능을 이과로 두 번, 문과로 두 번 봤다. 이과생 문과생 모두의 고충을 알 수 있다. 이런 걸 이용해서 수능전문상담사이트라도 만들어볼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멘탈부터 입시까지! 뭐 그런 건 결국 안 만들었지만 내 주변 지인들은 동생이나 자녀가 재수를 한다거나 수능 후 대학원서를 쓴다거나 할 때 나를 찾곤 한다.
나에게 수능 얘기를 한다는 건 참 귀찮고도 지난한 일이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술만 마시면 수능 얘기를 했었다. 맨날 같은 레퍼토리. 뭐 지금도 술자리에서 수능 얘기가 나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자신이 찌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능인 어제를 잘 넘겨놓고도 오늘 이 글을 쓰게된 건 사소하다. 눈팅을 주로 하는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맘에 들지 않는 한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기엔 눈팅족이라 아이디도 없어 댓글도 달 수 없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하기엔 그 글의 30개 가량의 댓글도 그 글에 동감하길래 괜히 또 반박글을 쓰고싶었다고 할까나.
뭐 그 글은 대충 수능날이라고 전국이 호들갑 떠는 게 맘에 안든다! 이런 내용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 나이에 한 번 실패해도 지나고 보면 별 거 아닌데 사회가 호들갑을 떰으로서 애들이 실패를 더 두려워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아 뭐 다른 건 그냥 지나가겠는데, 그 나이에 한 번 실패하는 게 지나고 보면 별 거 아니라는 말. 그거에 근본적으로 동감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를 한다. 저 글도 저 글의 댓글들도 모두 그랬고. 19살에 입시 실패하고 수능 한 번 더 보는 거 아무 일도 아니라고.
근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반박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수능 두 번 더 보는 건? 한 두 번 실패가 별 거 아니면 세 번은? 네 번은?
수능 한 번 실패해서 재도전하는 게 별 거 아니어보여도, 한 번 실패의 쓰디쓴 아픔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저 다음 수능으로 이월된다. 재수생 삼수생들이 수능 잘봐놓고도 하향지원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거고.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정말 운이 좋지 않은 한 한 번 이상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모두 다 실패하고 살기 때문에 실패는 인간을 성장시킨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그게 정설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니 그렇다고 해서 그 이유가 실패를 해도 되는 이유가 되나? 내가 좋아하는 닉 혼비의 소설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의 한 주인공은 이런 대사를 한다. (기억나는대로) "큰 병에 걸려서 죽다 살아난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큰 병을 겪는 과정이 나를 더 성장시키고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저는 그게 과연 맞는 말일까 생각합니다. 그들이 큰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 넘치는 에너지로 더 많은 일을 정력적으로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모든 일에는 반대 급부가 있는 법이고, 아무리 나빠보이는 일에도 좋아보이는 면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나쁜 일을 견디어야할만큼의 가치를 갖는지는 생각해보아야한다.
실패는 실패다. 빼도 박도 못하는 실패다. 실패를 성장이니 뭐니 하는 걸로 포장하는 건 의미가 없다. 20대 초반 일이년 재수삼수하는 거 인생 전체로 놓고 지나보고 나면 별 일 아니라고? 웃기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지나보고 나서도 별 일인 일이 있긴 한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 삶을 사는 게 사람인데.
남들 다 신나게 노는 20살 그 합법적으로 술먹고 담배피고 클럽다닐 수 있는 그 나이에 학원 구석에 박혀 있는 게 퍽이나 의미있는 실패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패는 사람을 모험적일 수 없게 만들고, 소심하고, 남의 눈치를 보게 만든다. 한마디로 사람의 자신감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것을 회복하는 데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젊을 때 한 두살이 별 거 아니라고? 엄청 많이 지나보면 별 거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취업에 무사히 성공하기 전까지는 별 거다. 군대 가서도 별 거지. 요새 다들 일이년 기본으로 휴학하기 때문에 내가 삼수를 했는데도 현역으로 대학간 친구들 중에도 취직한 애들이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걔네랑 내 입장이 비슷해지는 건 아닌다. 걔네가 어학연수하고 뭐하고 심심하면 휴학하고 그럴 수 있어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요새 취업할 때 나이가 얼마나 중요한데. 나는 남들보다 빨리 빨리 뭔가를 해야한다. 아마도 취업에 무사히 성공하기 전까지는 이런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의대 치대는 안그럴 거라고? 주위에 삼수한 애들이 꽤 여럿이고 그 중엔 의대나 치대 간 애들도 몇 있지만 걔네도 그런 것 같진 않더라. 몇몇 대학에선 학번대로 위계가 있어서, 재수학원 비용 하나도 안 대준 나랑 동갑이거나 나보다 어린 애들한테 꼬박꼬박 윗사람 취급해줘야한다. 남자면 군대도 뭐. 부모님 등골 휘게하며 삼수씩이나 했는데 부모님한테 남들보다 빚진 마음 내치기 쉽지 않아 동기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현역으로 대학 온 동기들 부러워하며. 아 그냥 이런 거 다 제쳐두고 금전적으로만 따져봐도 몇천만원이 더 날아간다. 이게 별 거 아니라고?
네 번째 수능을 본지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난 이제 대학에서 한 학기를 남겨둔 4학년이지만 뭐 그렇다고 수능이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수능은 별 거다.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한참 청춘 20살 21살을 학원에 쳐박혀있게 만들었으며, 나의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이던 성격을 바꿨다. 고등학교 때까지 반장이었다는 게 지금 나한테는 상상이 안 되는 모습일테니까. 실패는 밝음의 끝이었던 나를 어둠의 심연 속으로 밀어넣었다.
지금도 입시 상담을 하는 사람들한테(동생 재수시킬까 어쩔까 등) 아 웬만하면 재수까진 몰라도 삼수는 시키지 마. 라고 하는데 이건 나 말고 주위 어떤 삼수생들도 그렇게 말하더라.
꼭 수능 제대로 안 보거나 뽀록으로 성적 잘 나와서 대학간 애들이나 수능 별 거 아니다. 대학공부가 더 어렵다. 뻘 소리 하더라. 주위에 삼수해서 정시로 서울대 갔거나 연대 치대 갔거나 한 친구들은 절대 수능 별 거 아니라는 소리 절대 안하는데. 나로 말하자면 수능보다 대학 공부가 200배는 쉽다. 술먹으러 다니고 애인 만나러 다니고 할 거 다하면서 하는 대학공부랑 8 to 12 하루 15 16시간씩 학교 혹은 학원에 붙어있으면서 하는 수능공부랑 난이도를 따진다고? 내가 삼수 때처럼 대학공부를 했으면 우리학교 학점 탑을 먹었을 거다.
수능은 별 거고, 입시 실패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다고 해봤자 거기에 의미를 두면서 자기를 위로하지 말라는 거. 실패는 실패일 뿐입니다. 실패한 당신은 노력이 부족했거나 혹은 운이 없었습니다. 혹여 운이 없던 거라 할지라도 그 누구한테도 그 사실을 하소연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운 없는 사람을 되돌아봐 주지 않습니다.
이 글을 혹여 재수하고도 입시 망한 사람이나 삼수하고도 망한 사람 혹은 얼마 전 첫 실패를 한 입시 실패자들이 보게 된다면 나는 그냥 한 마디만 해주고 싶다. 실패는 실패일 뿐이다. 성공의 어머니라는 건 개소리다.
그러니 이 실패는 정말 별 거지만 무시하고 극복하도록 노력해보라는 것. 그게 별 거 아니라서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인 건 아니고, 별 거지만 극복해보라는 것.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도록 끝없이 고민하라는 것.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라는 것. 그래도 안되면? 그 때가서 죽어도 늦지 않다.
재수 때의 어느 날 어김없이 자습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밤 12시에야 집에 와서 눕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일 내가 사고로 죽게 되면 난 어떨까. 학원이 위치한 XX역을 떠돌아다니는 원혼이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언제 죽어도 세상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걸 하며 살다가 그거에 실패하면 어떡하지? 소심해진 내 내면은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 때 난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그럼 그 때 죽지 뭐."
매해 수능 날마다 자살하는 수많은 애들이 아쉬운 건 걔네가 과연 진짜 자기들이 얻고 싶은 걸 갈망하다가 얻지 못해 죽었나 하는 점이다. 김어준이 그랬다.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허망해질 때는, 아무 것도 이룬 게 없을 때가 아니라 이룬다고 이룬 것이 자기가 바라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라고. 아마 어릴 혹은 젊을 우리는 앞으로 하고 싶은 걸 할 날이 무궁무진하다.
아 쓰다보니 애초에 뭔 소릴 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네. 거봐 내가 수능 얘기만 하면 찌질해진댔잖아.
암튼 수능 망해서 대학 다 떨어져서 인터넷으로 이 글 보고 있는 너는 얼른 밖에 나가서 술이나 먹어. 술은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야 한다. 이 글을 보는 해당 안 되는 분들은 주위의 입시 실패를 겪은 이들에게 잘 대해주셔요. 불쌍한 사람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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