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다니면서 좋은 인상이든 나쁜 인상이든 나에게 인상이 남은, 내가 만난 교수님들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검색 유입 키워드에 강정인 교수가 있길래 생각나서.

내가 좋아하는 강정인 교수님부터.


강정인 교수님 (정치외교학과)


학교에 친구가 별로 없는 나는 수강 신청 전에 교수 이름을 구글링 해보곤 했다.

사과대 교수라면 정치적 성향을 주로 찾아봤다.  

나랑 도무지 맞지 않는 꼴통 교수의 수업이라면 처음부터 피하는 게 좋을테니. 

검색 결과 강정인 교수는 나와 같은 좌빨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꼴통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송두율 교수의 이론을 반박한 학자라기에 생각이 궁금해지기도 해서 수업을 들었다.


'정외과 극악 난이도 수업'이라는 수강평에 걸맞게 교수님의 첫인상은 퍽 깐깐해 보였다. 

눈빛은 예리했고, 말투는 까칠했다.

말을 술술하는 사기꾼 같은 달변가와는 거리가 멀었고, 천천히, 쉬이 알아볼 수 없는 필기를 하며 수업을 했다.

사실 교수님의 이론 설명 시간은 별 재미가 없었다. 거의 항상 졸거나 딴 생각을 했다. 

하지만 교수님의 토론 수업 시간과 과제 피드백은 무척 좋았다.

나는 토론을 좋아하는 편이라 토론 시간에 의견을 잘 말하곤 했는데

교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는 내 의견에 예리한 질문을 던지곤 하셨다. 

"그거 진짜 그러냐? 이러이러한 허점이 있지 않나?"

나는 교수님의 예리한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서, 수업이 끝나고서도 관련 정보를 뒤져보곤 했다.

'아까 이렇게 대답했어야 하는데!' 하면서.


교수님과 나는 정치적 성향이 달랐다. 

교수님의 정치적 성향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나랑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학부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감성적인 사회주의자였는데, 교수님은 내 생각이 부족할 때면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

"약자라고 다 도와야 하냐? 왜?" 

"왜 1인 1표여야 하냐? 정치학자인 나랑 정치적 지식 없는 사람이 왜 똑같이 한 표를 가져야 하지?"

"대의 민주주의가 최선이야? 왜? 엘리트 민주주의가 더 나을 거 같지 않냐?"

논리보다는 믿음에 가까워서, "그냥, 당연히, 그런 거 아닌가요."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는 내 생각에 

교수님은 근거를 요구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근거를 고민하곤 했다.


토론 끝에 교수님이 내 의견에 설득된 적도 있다.

어떤 문제로 토론 수업 중에 나와 교수님이 일대일 토론을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는데,

나는 생각이 정리된 문제여서 끝까지 토론을 이어나갔고, 교수님은 다른 학생이 반박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반론했다. 

그 끝에 결국 반론할 수 없어진 교수님이 학생들 앞에서 "듣고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다."며

생각이 바뀌었다고 인정하셨는데 

토론의 내용보다 교수님의 태도가 기억에 남는다.

학생들 앞에서 학생과 대등하게 토론을 하고, 학생의 의견에 설득됐다는 걸 인정할 수 있는 교수가 몇이나 될까.

대학에 다니며 권위를 잃기 싫어 끝까지 억지 주장을 펼치다 오히려 권위를 잃는 교수를 많이 봤는데

강정인 교수님은 그 자신이 저명한 정치학자이면서도, 당신도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사회과학자적 태도를 지닌

몇 안되는 교수였다.

그래서 교수님과 정치적 성향이 다르든 말든 별 상관이 없었다. 

교수님의 수업시간에 나는 눈치보지 않고 교수님의 주장을 비판하고, 내 의견을 주장할 수 있었다.


어떤 수업 시간엔 교실에 들어오자 마자 내 과제의 한 문장을 읽으시고는

"이거 누가 썼나?" 하시기에 손을 들었더니 

"남자가 쓴 글인 줄 알았는데, 여자가 '술잔을 기울이며'라는 말도 쓰나?" 라며 사소한 꼰대 의식을 보여주신 적도 있었다. 

그 수업시간엔 마침 양성 평등 관련 토론이 이어졌다.

여성 동지들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커지고, 쪼그라드는 남성 동지들을 바라보며 교수님은 균형추를 맞추기 위해

"근데 남자는 아직도 가부장적 요구가 만연한데, 여자는 여자니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그런 거 요새는 별로 없지 않나?" 

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가 웃으며 "교수님도 아까 여자는 술잔 기울이면 안된다고..." 라고 대답하니

교수님도 학생들도 다 엄청 웃었다. 그리고 교수님은 당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나에게 사과하셨다.


수업 종강을 앞두곤 다같이 고깃집에 회식을 하러 갔는데 그 회식도 무척 재밌었다. 

교수님은 사생활에서는 젠틀하다거나 철저하다거나 하신 분은 아니고

오히려 꼰대 같은 면도 적잖게 있고, 학생들 앞에서 술에 취해 술주정을 하기도 하는 인간적인 분이셨다.

돼지고기를 먹으며 교수님과는 말 한마디 섞지 않고 구석에 있던 내가

총대를 매고 "교수님 차돌박이 사주세요!!!" 라고 외치자 사람들이 다같이 웃었고

교수님은 통크게 차돌박이를 사주시기도 했다. 그리곤 뒤끝있게- 나를 차돌이라고 부르곤 하셨다.


과제와 시험은 공정했고, 피드백은 성의있었다. 

교수님은 종강 후 겨울방학에도 연구실에 찾아가면 글이든 시험이든, 궁금한 모든 것에 피드백을 해주는 몇 안되는 분이었다.

교수님의 학자적 면모가 좋아 나는 교수님의 수업을 한 번 더 들었다.


졸업 후 학교 앞 편의점 파라솔에서 밤에 맥주를 마시다

역시 파라솔에서 맥주를 마시러 오신 교수님을 마주치기도 했는데

교수님은 나를 불러다 맥주와 안주를 더 사주셨다. 아직 취업 못했다니 예와 같은 까칠한 태도로 짓궂게 놀리시며.


여하튼 내가 본 강정인 교수님은 가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실 때도 있고, 꼰대 같은 면모도 있으시지만 

대화가 통하는 합리적인 선생님이다.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을 비판한 대표적인 학자이면서도, 

인간의 양심, 표현, 학문의 자유를 위해 저자의 행위와 텍스트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송두율 교수를 변호한 것에서도 드러나지만. 

(쓰고 보니 나도 강 교수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학교에서 만난 어떤 교수보다도 교수의 본분(연구와 강의)에 충실하시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치우침을 드러내지도 않고, 정치학자의 모습에 가장 부합하는 분.

정치하려고, 유명인이 되려고 교수라는 직함을 이용하는 어떤 장돌뱅이들과는 격이 다른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