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저녁에 엄마가 갑자기 앨범을 보자고 했다. 집에 있는 앨범을 모두 꺼내 엄마와 수다를 떨며 봤다. 디지털 카메라가 일반화된 2000년대 초반부터는 앨범에 사진이 거의 없었다. 물론 그때 찍은 디지털 사진들은 다 어디 갔는지 잃어버렸다. 이럴 때 확실히 기술의 발전이 별로라는 생각이 든다.

80년대 언니 어린 시절부터 엄마 아빠의 결혼식(언니 어린시절보다 후다), 나의 성장과정까지 쭉 봤다. 중간중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때 엄마한테 물어보면 엄마는 내가 당연히 알만한 사람인데 잃어버렸다는 듯 '누구누구잖아.'하고 대답한다. 근데 난 누군지 들어도 잘 모르겠는 경우가 대다수다.

앨범에는 지금도 나와 친한 친구이자 우리아빠친구딸인 C가족의 지분이 엄청났다. 정말 오만 곳을 같이 놀러다녔더랬다. 우리는 서울 살고 C네는 대전에 살았는데도 거의 모든 휴가를 같이 보냈고, 명절마다도 만났다. 이렇게 자주 놀러다니던 친구 가족과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친하게 지낼 수 있단 사실이 좀 좋았다. 반면에 사진 속에선 한껏 친했는데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뭔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느낌이었다.

그 며칠 뒤엔 관자가 먹고 싶어서 충무로에 가는데, 가는 김에 남자친구와 필름을 셀프로 스캔할 수 있다는 현상소에 갔다. 충무로 고래사진관이라는 곳이었다. 부랴부랴 집에 쌓여있는 수많은 필름들을 가지고 현상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스캔할 필름들을 고름. 가서 필름을 스캔했는데 스캔기계가 좀 신기했다. 결과물은 생각보단 만족스럽지 못했다. 필름 보관 상태의 문제였는지 스캔 설정이 잘못 건드려진 건지 엄마아빠 결혼식 사진들 외엔 좀 다 누렇게 스캔됐다. 남자친구가 보정해주려고 노력했는데 그래도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다. 처음 스캔할 때부터 잘해야하는 것 같다.

(몇 안되는 덜 누런 수산시장 풍경 사진)

그리고 필름 넣는 종이가 몇개 없어서 필름들이 너무 다 겹쳐져있어서 필름을 꽂을 수 있는 매거진(?)을 샀다. 집에 와서 장갑을 끼고 필름을 한장한장 정리해넣었다. 엄마는 사진이 있는데 필름을 뭘 그리 정리하냐고 했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앨범에 다 안들어간 사진들도 많아서 인터넷으로 앨범을 추가로 사서 며칠 동안 조금씩 열심히 사진을 정리했다. 필름과 사진을 정리하면서 '이것들은 내 후대의 후대쯤에게는 의미도 재미도 없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엄마 아빠도 아니고 할아버지 할머니 앨범을 딱히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내 사진 앨범들은 언제, 누구 손에 의해 사라지게 되려나.

여름이고 겨울이고 열심히 국내 여행을 다닌 사진 속에서 가장 지분을 많이 차지한 여행 풍경은 계곡 물놀이 풍경이었다. 어릴 땐 아빠랑 언니랑 C랑 C동생이랑 계곡에서 튜브 끼고 참 많이도 놀았더랬지. 엄마와  C부모님은 우리가 한창 놀 땐 물가에서 고스톱을 치거나 수다를 떨며 노시다가 우리가 한창 물놀이를 하고 나면 라면을 끓이거나 수박을 썰어서 우리를 부르곤 하셨다. 그때 그렇게 놀던 게 너무 그리워졌다.

그래서 남자친구와 가기로 한 여름휴가를 계곡으로 가기로 했다. 원래도 계곡 물놀이를 하기로 했었지만 사진을 보고나니 더 제대로 해야겠다는 의지가 넘쳐나서 짠순이인 내가 구명조끼와 튜브와 튜브 바람 넣는 펌프를 모두 샀다. 어릴 때 이후론 바다나 워터파크에서 놀았지 계곡에서 논 적은 거의 없는데, 놀기 좋은 적절한 계곡을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계곡에 간다고 하니 우리집에 계신 국내여행 전문가 두 분께서 '어딜 가봐라', '아니다 여길 가라' 하며 조언을 열정적으로 하셨다. 둘이 어디가 더 놀기 좋을 거다, 아니다 거긴 사람 많을 거다 하면서 거의 다투다가 언제나처럼 엄마가 이겼다. 엄마는 지도까지 그리며 진심이었다. ㅋㅋㅋ 덕분에 엄마가 추천한 숙소를 예약했다.

여행은 금요일에 가기로했다. 많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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