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와의 큰 갈등은 대개 양상이 같다.

 


#1. 남자친구가 지금 회사에서 고생한지 몇 년만에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됐다. 어제 둘이 이직 성공을 축하하며 밥을 먹었다. 새 회사에서 바로 다음주부터 출근하라고 했는데 미뤄보려고 했지만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바로 다음 주부터 오라니 보통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들으면 이상한 회사 아니야 싶겠지만 이 업계가 원래 그렇다. 그대신 오늘 퇴사 의사를 밝히면 내일부터 안 나오는 것도 자유인 업계다.

 

그런데 문제는 남은 연차였다. 연차가 많이 남아있는데,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나도 예전에 다녔던 회사)는 연차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남은 연차를 소진하여 퇴사일을 정하고 퇴사 처리를 해준다. 남은 연차를 다 소진하려면 다음 주부터 새 회사에 가야 하니 일시적으로 이중 취업 상태가 된다. 남자친구는 얼마 전 이직한 같은 회사 후배가 이런 이유로 연차포기각서를 쓰고 남은 연차를 포기하고 이직을 했다고 했다.

 

나도 남자친구가 다니고 있는 바로 그 회사에서 퇴사해봤고, 내근하며 수많은 퇴사자를 봐왔지만 연차 포기 각서를 썼다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후배가 잘못한 거라고 했고, 새 회사에 지금 회사의 퇴사 처리가 언제 될 거라고 미리 말하고 양해만 구하라고 했다.

 

아침이 됐는데, 남자친구한테 어떻게 됐냐고 물어보니 연차를 쓰고 일하고 있댄다. 연차를 하루라도 더 쓰려고 오늘부터로 썼는데, 상사가 오늘 일 좀만 더 해달라고 했다나? '무슨 소리지?' 이 말을 듣는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그 다음은 더 가관이다. 새 회사 입사일 맞추려고 이번 주 남은 날들은 다 연차를 소진하고, 그러고도 남는 연차는 포기하겠다는 연차 포기 각서를 썼댄다. '아니, 어제 나랑 다 한 얘기 아니야?' 새 회사에 물어봤냐니까 그것도 아니랜다. 그냥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그랬다나 뭐라나. 여보쇼. 당신이 포기한 연차가 몇십만원어치야. 넌 몇십만원이 그렇게 쉽냐.

 

경력직으로 일주일만에 출근하라는데, 거기다 대고 "이전 회사에서 남은 연차 소진을 해야해서 퇴사처리가 몇 월 며칠에 된답니다." 한 마디 양해만 구하면 될걸, 아니 양해 구하는 것도 아니고 통보만 하면 될걸 그걸 포기하고 연차 포기각서를 쓴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새 회사가 이중취업 상태를 안된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연차 소진 이후에 입사해야겠다고 입사일을 일주일만 미루면 되는 문제 아닌가? 저 상황에도 입사일을 안 미뤄줄까? 아니 어떤 미친 회사가 니 돈 몇십만원을 포기하고 오라고 해? 뭣보다 이중취업은 불법이 아니다. 회사 취업규칙 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일시적 이중취업 상태는 회사 입장에서도 불이익이 전혀 없는 거라 당연히 받아들여준다. 자기들이 합격 통보 후 일주일만에 출근하라고 했다면 더더욱.

 

어제 한참 얘기 다 해놓고 오늘 와서 저러는 게 화가 난다. 돈이 아쉽지 않은 걸까, 문제를 회피하고 싶은걸까? 아마 후자겠지. 남자친구에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연차포기각서를 무르고 남은 연차 소진해서 퇴사처리 해달라고 회사에 말하라고 했다.

 

#2. 남자친구가 회사에서 하루 20시간 가까이 일한 날이 있는데, 상사가 대휴를 안 줬다. 같이 간 다른 부서 후배는 받았댄다. 그걸로 한참 불만 갖길래, 당연히 따지라고 했다. 달라고 하라고. 제대로 말을 못하면서 불평만 하길래 짜증나서 와다다다 지랄을 하면서 "그 말도 못할 거면 불만을 갖질 말든가, 불만을 가질 거면 말을 하든가" 라고 했다. 남자친구가 그날 헤어지자고 했다. 다시 화해했지만.

 

#3. 둘이 포장마차에 갔다. 시킨 음식이 너무 안 나와서 남자친구에게 물어보라고 시켰다. 나는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내가 혼자 데이트 코스도 찾고, 문제도 다 해결한다는 생각이 있다. 사실 데이트 코스는 내가 고른 게 아니면 남자친구가 고른 건 흡족하지가 않아서 내가 찾는 거고, 문제 해결도 남자친구가 하는 게 못 미더워서 내가 하고 마는 거다. 아무튼 그래서 같이 있을 때 저런 사소한 것들을 남자친구한테 더 시키는 편이다. 근데 남자친구가 물어보기 싫어했다. 나는 메뉴가 누락된 걸 수도 있으니 한번 물어보라고 했고, 남자친구는 싫다고 그랬다. 그래서 싸웠다.

 

#4. 주말에 남자친구와 작은 상가에 갔다. 우리는 공영주차장인 줄 알고 주차한 곳이 알고 보니 상가 주차장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 상가에서 쇼핑을 하고도 주차등록을 하지 않았다. 주차등록을 하면 주차비를 안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상가는 바로 옆이었고, 우리가 물건을 산 매장은 2층이었다. 그래서 내가 매장에 다시 가서 주차등록을 하고 오자니까, 남자친구가 그냥 주차비를 내고 가자고 했다. 내가 금방이면 된다고 했고, 혼자 3분도 안 걸려 주차등록을 하고 와서 주차비를 안 냈다. 부자인 우리 사장님이 돈을 내고 말자고 하면, 나는 아무렇지 않다. 그 사람한텐 그게 효율적인 거고, 내 돈도 아니니까. 근데 남자친구는 돈을 그렇게 쓰면 안 되는 상황이고, 난 얘랑 미래도 생각하니까 저런 행동에 화가 난다. 이 날은 화를 내지 않고 그냥 좋게 넘겼지만 이런 사람이랑 나중에 경제 공동체로 살아도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돈을 잘 모으고, 남자친구는 잘 못 모은다. 나는 돈을 꽤 모아뒀고, 남자친구는 거의 못 모아뒀다.

 


 

나는 타고나길 통제적이고 독재적인 성향이 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 의사를 존중해주고 무언가를 강요하는 법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도 내 통제적 성향을 고치고자 오랫동안 노력해왔고, 자라면서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남자친구에 한해서는 내 통제적 성향이 무척 강해진다. 남자친구는 문제 해결을 위해 조금이라도 불편한 상황을 겪어야 하는 경우 불편을 피하고 싶어하는 회피형 성향이 강하다. 문제 해결을 회피하고 싶어하면 그냥 그대로 놔둘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난 그런 상황에 "왜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하지 않는거야?" 싶어져서 화가 난다. 내 통제적 성향이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순간이다.

 

나도 이렇게 일일이 관여하는 게 무척 피곤하다. 성인인데 자기 문제는 알아서 잘 해결했으면 좋겠다. 내가 말 안해도 알아서 연차 수당 제대로 챙기고 퇴사했으면 좋겠고, 말 안해도 입사일을 미루고 싶으면 알아서 잘 미뤘으면 좋겠다. 말 안해도 자기 연봉협상은 자기가 알아서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자기가 할 말 하는 것 자체를 '갈등 유발', '싸움 유발'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친구는 당연히 해도 되는 말도 못하고 오기 일쑤다. 그러면 나는 화가 난다. 돈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나는 몇만 원 더 벌려고 부업까지 하는데, 넌 받을 수 있는 몇십만원도 그냥 쉽게 포기해버리는구나 싶어서. 당장 돈이 없는 게, 돈을 적게 버는 게 문제가 아니다. 저렇게 내 이익이나 내가 받아야할 돈을 쉽게 포기하는 삶의 태도가 싫다.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래놓고 어제 이직 기념으로 내가 사달라는 선물 가격 보고는 비싸다고 표정이 어두워졌던 게 생각나서, 더 화가 난다. 내가 사달라고 했던 선물이 오늘 니가 날릴 뻔했던 못받은 연차 수당보다 싸다 야.

 

쓰다보니 평생 봐온 우리 엄마 아빠 같다. 엄마가 여행을 좋아해 어릴 때 가족 여행을 자주 다녔다.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이라 길을 못 찾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빠에게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 좀 물어보라고 했다. 아빠는 잠깐만, 잠깐만 하고 미루다가 더 길을 잃고 뺑뺑 돌곤 했다. 엄마는 짜증나서 아빠한테 화를 냈고, 결국 참지 못한 엄마가 직접 창문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봐서 길을 찾아 상황이 마무리되곤 했다. 어릴 땐 직접 물어보지 왜 아빠한테 물어보라고 시키는지, 싸움을 유발하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때 엄마가 왜 그랬는지 너무 잘 이해가 된다. 딸은 엄마 팔자 따라간다더니.

 

우리 아빠도 언제나 회피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엄마와 아내 사이의 고부 갈등에서도 항상 회피해 엄마를 시댁에 시집살이 당하게 냅뒀고, 집이 망했을 때는 집에 오는 카드값 고지서를 뜯어보기도 싫어해서 엄마 혼자 다 해결해야 했다. 은행과 법정 다툼을 할 때도 아빠는 내내 회피하며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엄마가 법무사를 알아보고, 학생이던 내가 인터넷을 뒤져 준비서면을 쓰고, 언니가 법정에 출석했다. 아빠는 우리가 그러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집주인이 세를 올린다고 해서 부동산을 알아보려고 할 때, 엄마가 나한테만 부동산에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빠는 왜 같이 안 가?"라고 물었고, 엄마는 아빠는 같이 가봤자 도움이 안된다고 했다. 나는 약속이 있는데 부동산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어서 짜증이 났지만, 거길 또 엄마 혼자 보내기 싫어서 내가 잘 알아보고 같이 가기로 했다. 근데 그때 아빠가 회피하는 주제에 옆에서 말로만 훈수를 둬서 내가 폭발해버렸다. "아빠는 왜 가장 노릇을 안해? 왜 아빠가 안 알아보고 아빠가 안가면서 말만 해?" 그날 아빠가 처음으로 내 싸대기를 때렸다. 아빠의 뼈를 부러뜨린 대가라고 생각해서 억울하지는 않았다.

 

남자친구의 삶에 개입하지 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얘 엄마도 아닌데 자꾸만 개입하고, 통제하게 되는 게 싫다. 남자친구도 이런 나에게 고마워하기 보다 내가 이러면 피곤해하는 것 같고, 나 또한 피곤하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내 일처럼 스트레스를 받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마음이 불안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봐. 이러다보면 자식을 낳았는데 남자친구나 우리 아빠 같으면 정말 제 명에 못살 것 같아서 자식을 낳지 말아야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회피하는 니가 문젤까, 그걸 가만히 못 냅두는 내가 문젤까? 아니면 둘다 문제일까? 법륜스님이 들으면 그걸 못 놓는 니가 문제라고 하겠지. 그래 내가 문제다. 사는 게 쉽지 않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