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 '대한민국 장기기증 전멸시켰던 사건.jpg'이라는 제목의 글이 돌고 있다.
장기기증을 했는데, 기증 후 장기를 적출한 병원이
아들 시체는 알아서 챙겨가라고 해서 분통 터뜨린 아버지의 이야기다.
2017년 일인데, 주기적으로 도는 글이다.
저 사연이 뉴스를 통해 알려진 덕분에
사건 이후 저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여러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는 설명이 뒤에 붙어도
저 글이 올라오면 언제나 댓글은 저 일 때문에 자기도 장기기증을 취소했다거나,
저래서 장기기증을 안한다, 왜 하냐는 등
장기기증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런 댓글들을 보고 있자면 여러 생각이 드는데, 10년 전쯤 사후 장기기증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장기기증 서약을 하면 신분증에 붙일 수 있는 장기기증 스티커를 준다.
불의의 사고에 구급대원이 내 신분증을 보고 장기기증을 할 수 있게 돕기 위한 스티커다.
처음 발급받은 주민등록증을 한번도 바꾼 적이 없으니, 스티커는 지금도 당연히 붙어있다.
서약 이후 딴 운전면허에는 아예 인쇄가 되어있다.
아무튼 나는 10년 전에 장기기증 서약을 했고 이후에 저 뉴스를 봤지만 장기기증 서약을 취소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취소할 계획은 없다.
 
 
나는 딱히 좋은 사람은 아니다.
선행이나 봉사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봉사는 학창시절에 봉사 시간을 채워야 하니 의무적으로 했던 봉사가 전부인데,
그 봉사마저도 장애인이나 노인 같이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살피는 진짜 봉사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
어린이집, 우체국, 아름다운 가게 같은 곳에서 일해서 떼웠다.
 
 
기부? 내가 그런 걸 한 적이 있었던가?
네이버에 블로그 써서 쌓인 해피빈 콩 몇 개를 유기견 단체에 기부해본 거나 학창시절에 크리스마스 씰을 산 것, 어릴 적 지나가다 구세군 냄비에 천원 정도 넣어본 것 정도? 
평생 살면서 기부한 돈을 다 합쳐도 10만원이 채 되지 않을 것 같다.
 
 
유기견 봉사에는 좀 관심이 있는데, 유기견이 불쌍해서 뭔 선행을 베풀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어차피 개를 잘 다루고 개를 좋아하니 그걸 이용해서 착한 척 하고 싶은 내 알량한 욕심도 채우고,
개들이랑 시간도 보내볼까 하는 마음이다. 
 
 
장기기증도 딱히 어떤 뜻이 있어서 한 건 아니다.
그냥 우울했던 백수 시기에, 나도 세상에 쓸모가 있는 인간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존감을 좀 채워보려고 헌혈도 하고, 장기기증 서약도 충동적으로 했다.
장기기증 서약은 당장의 노력은 단 하나도 요하지 않기에 특히나 쉬웠다.
 
 
그런데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고 하니 엄마 아빠가 왜 굳이 그걸 하냐고 하는 거다.
그땐 저 뉴스가 나오기 전이었는데도, 죽고 나서 시신이 훼손되는 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이후에도 장기기증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인터넷 등 여러 루트로 접하면서
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의 육신이 건드려지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그래서 장기기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뭐, 나도 토막 살인에 유독 더 분노하게 되는 걸 보면 그런 생각에서 자유롭진 않겠지.
 
 
근데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나니
나는 더욱 장기기증 서약을 취소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장기기증에 근원적 거부감이 강해 못하겠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별 거부감 없는 나라도 해야하지 않겠나 싶어서.
 
 
선행엔 별 관심이 없지만
나에게는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언가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그보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 없지 않을까.
죽고 나면 내 몸은 어차피 화장장에서 고열에 태워져 가루만 남을텐데
그 몸의 어떤 장기는 더 쓸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해서,
병원에 누워 죽는 날만 기다리던 누군가의 삶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서 좋고, 나는 죽을 때도 뿌듯하게 죽을 수 있어서 좋지 않을까.
 
 
죽으면 모든 스위치가 꺼지고 영원한 잠에 든다고 생각하는 나로써는
죽은 후의 몸이라는 것은 오래 입다가 입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옷과 별 다를 게 없으니,
그 옷이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가져다 쓴다면 좋을 것 같다.
 
 
내가 장기기증 서약을 했어도,
죽기 전에 장기기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진짜 하게될 때는 가족들의 동의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가족들의 의사가 중요하겠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가족들이 내 죽음에 대해서만 슬퍼하기를 바란다.
어차피 죽을 몸에 칼 좀 대는 것에 너무 가슴 아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뉴스에 나온 아버지가 당한 일이 별일 아니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나도 내 가족이 내 결정 탓에 저런 대우를 받게되는 것을 상상하면 정말 괴롭지만
이제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이 개선되었다고 하니,
남은 가족들에게 큰 상처가 될만한 다른 어떤 과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내가 죽으면, 만약 그럴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내 장기는 누군가의 삶을 살리는 데 쓰였으면 좋겠다.
 
 
저 글이 주기적으로 돌아서
장기기증에 관심있던 사람들을 기증에서 더 멀어지게 하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그런 일이 더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는 장기기증자에 대한 대우를 더욱 개선하고 시스템을 정비하고 또 그 사실을 알리고
(개인적으로는 장례비 지원 같은 실질적인 지원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하겠지만, 꼭 그렇게 돈으로 대우하기 보다는 유가족이 정말 좋은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시스템이 더 개선되었으면 한다.)
관련 기관에서는 장기기증으로 인해 건강한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의 개별적 사연을 널리 퍼뜨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장기기증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살다보면 나나 내 가족의 병 때문에
누군가의 장기기증을 절실하게 바랄 날이 올지도 모르니
그런 날을 생각해서라도
장기기증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지는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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