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혼비 작가의 '아무튼, 술'을 정말 재밌게 읽어서 아무튼 시리즈 중의 한 권인 '아무튼, 예능'도 샀다. 나도 예능 프로그램 보는 걸 굉장히 좋아하고, 또 예능 PD를 준비하고 방송국에서 인턴 PD로 일했던 적이 있어서 책 날개에 쓰여있는 작가의 비슷한 이력에 관심이 갔다.

예능PD를 준비하고 수많은 친구들과 스터디를 했지만 나만큼 예전부터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본 사람은 별로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초반에 느껴지는 작가의 덕력에(세대도 비슷)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친구를 찾은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초반부는 재미있었다. 종종 웃음이 나왔고 여러 부분에서 공감이 됐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의 비중이 높았지만 감초처럼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 이야기가 적절해서 재미있었다.

딱 94페이지까지만.

작가는 이 책을 2년 넘게 썼다는데 나도 책을 내려고 글을 써봐서, 2년이나 걸렸을 이유를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은 트위터에서 연예 분야에 대한 입담(대종상 중계는 희대의 드립임ㅎㅎ)으로 인기를 얻었고 또 평생 TV와 연예인을 좋아해왔기에 자기가 예능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94페이지쯤 쓰고 나니 소재가 고갈된 거겠지. 냉정하게 말해서 이 책은 94페이지까지가 다다. 여기까지는 음 소소하게 읽기 좋은 책이네 싶었는데 이후로는 '아 환불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정말 꾸역꾸역 짜낸 책이다.

왜 94페이지가 기준이냐면.

95페이지부터 이 트위터리안 작가는 트위터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남성 중심의 한국 예능과 남성 예능인을 까는 데만 몰두한다. 복길의 시선에서는 유재석, 이경규, 강호동, 신동엽, 김제동, 김구라, 나영석 이 모두가 남성 중심의 한국 예능을 공고화한 책임있는 가해자일 뿐이다. (나영석의 '꽃보다 누나'나 '윤식당'의 여성 서사는 작가가 원하는 여성 서사가 아닌 모양이다). 작가는 이어서 이영자, 장도연, 김신영, 송은이 등을 칭찬한다. (왜 등이냐면 송은이 부분까지만 읽은 상태라서다.) 뭐 여성 예능인 중에도 뛰어난 사람들이 많으니 칭찬하는 건 이해하는데, 칭찬에는 내용이 없거나 지나치게 편파적이다.

무한도전의 레전드 편인 예능총회에서도 김숙이 말하자 '드디어 했다!'는 감탄이 나왔단다. 초조하고 말없이 못 끼어들던 '여성 예능인 대표' 김숙이 남자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아, 책 이렇게 쓸 거면 '아무튼, 예능'이 아니라 '트위터 페미니스트가 바라 본 한국 예능'으로 제목을 지었어야지. 그러면 그런 걸 보고 싶은 사람들이 이 책을 샀을 것 아닌가. 예능에 대한 애정있는 관심을 읽고 싶었던 내가 대체 왜 이 교조적인 페미니스트의 일장 연설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저 내용을 읽은 지점에서는 사기를 당한 느낌까지 들었다.

나는 여자지만, 첫 PD 면접에서 "여자는 PD하기 어려운데, 할 수 있어요?"라는 다분히 성차별적인 질문을 받아본 여자지만, 인턴 PD로 일하면서 다분히 성차별적인 업계 분위기를 직접 느낀 여자지만,
이렇게 평면적으로 한국 예능을 다루는 책이 '아무튼, 예능'이라는 이름을 달고 팔리는 것은 유감이다.

95페이지부터의 이 책은 읽다가 뭔가 현기증이 나올 것 같았는데, 그건 트위터 중독에 절여진 극한 페미니스트에게서 '집단주의'의 스멜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다.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이 여럿이다. 여성, 한국인, 서울에서 태어나서 수도권에서 자란 사람, 전직 기자, 프리랜서 등등. 그런데 나는 그 중 어떤 것에도 과몰입하고싶지 않다. 나는 그런 정체성들을 가졌지만 결국 나고, 그냥 나로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게 좋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이 욕먹는 걸 절대 못참아하는 '조직 과몰입인'들이다.) 개인주의자로서, 가끔 한국의 지나치게 집단주의인 분위기가 너무 부담스럽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지나치게 과몰입해서 모든 걸 그걸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들.

그래서인지 작가가 항상 자신을 여성으로 의식하며 여성으로서 예능과 예능인을 평가하는 태도가 너무 평면적이고 게으르게 보였다. 개그콘서트에서 '왕비호' 윤형빈이 "일본 잘들어! 독도 우리땅이다!"를 외치고 방청객들이 마구 박수를 치며 호응하는 걸 볼 때의 느낌? 여성이든 남성이든 한국인이든 고대생이든 군대든 자기가 속하거나 속했던 집단에 과몰입하는 모습이 항상 부담스럽고 싫다.

요즘은 페미니즘도 안티페미니즘도 유행이라서 어느 한쪽이든 노선을 확실히 하면 그쪽에선 박수를 받을 수 있다. 그런 집단주의의 호응에 기대려는 안일함이 느껴져서 짜증나는 책이었다.

30년 넘게 정상을 지켜온 예능인 이경규에 대해 '라인업', '남자의 자격'이라는 극히 일부의 커리어를 꺼내 '남성 중심적인 예능 풍토를 공고히 한 꼴마초 도시 경상도 출신의 남성 예능인'이라고 라벨링하는 것은 얼마나 게으른가. 이경규가 30년 넘게 방송을 했기에 여러 방송국의 PD와 친분이 있는 것을 방송에서 웃음 소재로 사용하는 것을 업계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얼마나 단편적인가. 다른 남성 예능인에 대한 분석도 별 다를 바 없다. 그저 페미니스트적인 입장에서 남성 예능인들과 한국 방송 환경을 비판하는 데서 그친다.

그에 비해 여성 예능인에 대한 평가는 지나칠 정도로 후하다. 나는 '전참시'에서 이영자가 매니저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는 장면들이 직장 갑질 같아서 보기 불편하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https://seoulnight.tistory.com/358) 이 진보적인 페미니스트는 이영자의 '충청도식 수동공격' 화법은 풍파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면서 쌓아온 이영자 화술의 정점이란다. 상대방이 여자이기만 하다면, 대체 어디까지 좋게 봐줄 수 있는 거지?

경상도 남성 중심의 공고한 권력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저자지만, 한 집단이 권력을 갖고있다는 게 차별적이어서 싫은 것 같진 않다. 자기가 여자여서 그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해 짜증날뿐. 작가도 어쩔 수 없는 경상도 사람인지(집단주의의 산실 고대 출신이기도 하군), 자기와 같은 여자들에게 '우리가 남이가?'나 '여자끼린 서로 도와야지!'하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으로 느껴졌다.

학부 시절에 연출 입문을 가르치시던 교수님이 글을 쓰든 연극을 만들든 그림을 그리든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했다. 그 말은 내가 대학 4년동안 들은 말 중에 유일하게 마음에 박혀 절대 잊혀지지 않는 말이 되었다. 그때는 대체 무슨 말씀일까 싶었는데 이 책처럼 '인간'이 아닌 '여성', 혹은 인간 중 특정 집단에 대한 애정만을 가지고 다른 집단에 대한 혐오나 피해의식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보면서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

물론 이런 책도 니즈가 있을 거고, 이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야 팔든지 말든지 싶은데 왜 싫어하는 나한테까지 팔지? 제목을 '페미니스트가 바라 본 한국예능'으로 붙였어야지. 최소한 책 날개 자기소개에 트위터 페미니스트라고 언질이라도 해주든지. 나같이 예능에 대한 애정이 담긴 책을 기대한 사람에겐 매우 실망스러웠다.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독특한 통찰력이나 애정은 95페이지 이후로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여성'인 '나'에 대한 애정만이 느껴졌다. 편협한 책.

p.s 예전에도 블로그에 언급한 적 있지만,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정말 좋은 칼럼은 유호진PD가 한겨레에 연재했던 '백스테이지'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글이 궁금하다면 찾아서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