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와 싸움 아닌 싸움을 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시비를 건 것 같기도 하고. ㅋㅋㅋ

발단은 오늘 넷플릭스에 공개된 '데블스 플랜'이었다. 내가 되게 좋아하는 '지니어스' 시리즈를 만든 정종연 PD가 새로 하는 프로그램이라서 오래 전부터 기대한 프로그램...! 드디어 오늘 공개가 돼서, 남자친구네서 같이 보려고 기다렸다 켰는데...

남자친구는 처음부터 전혀 관심이 없어서 핸드폰만 보고 나만 과몰입해서 보다가
중간부터 남자친구가 핸드폰으로 소리까지 켜서 다른 걸 보는 모습에 뭔가 현타가 와서 다 안 보고 집에 왔다.

그래도 더타임호텔이랑 피의 게임2는 남자친구랑 같이 봤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어서
당연히 남자친구도 재미있게 볼만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서 튼 건데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사실 남자친구랑 취향이 다른 게 뭐 대수겠는가. 남자친구일 땐 별로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이 이제 결혼해서 평생 이 사람과 저녁시간을 보내겠지 싶으니까 문제처럼 느껴진다.

남자친구와 나의 영상 컨텐츠 취향은 엄청 많이 다르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보면 겹치는 영상이 하나라도 있을지 모르겠다.

난 주로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나름 대중적인 취향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남자친구는 주로 싫어한다. ㅋㅋㅋ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과 남자친구의 반응

  • 금쪽 같은 내 새끼 - 남자친구가 너무 스트레스 받아하고 극혐해서 남자친구 앞에선 이제 틀지도 않음.
  • 금쪽 상담소 / 결혼지옥 - 마찬가지. 틀어놓으면 남자친구가 극단적으로 욕하기 때문에 나도 괜히 기분이 상해서 안 틈.
  • 스우파 - 무관심
  • 나는솔로 - 빌런이 나오면 난 그게 재밌는데 남자친구는 격하게 스트레스 받아함. 이것도 금기 프로됨.
  • 데블스 플랜 - 남자친구는 복잡한 게임 설명에서부터 나가 떨어진다.
  • 강철부대 - 피지컬에도 관심 없고, 경쟁은 싫어하는 남자친구
  • 피지컬100 - 경쟁 싫어한다...서바이벌 프로 다 싫어하는듯
  • 야구 - 모르고 좋아하지 않음.

내 취향 너무 대중적이지 않냐구...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프로그램과 나의 생각

  • 미드 프렌즈 - 옛날 화질이 싫어서 남자친구 만나기 전 고딩친구들이 다 프렌즈 프렌즈 노래를 부르며 거의 10년 동안 보라고 난리쳤는데도 몇 편 보고 안 봄.
  • 일드 히어로 - 옛날 화질 싫다. 자막 읽기 싫다.
  • 일본 애니메이션들(지브리 등) - 일단 자막 읽기가 귀찮다. 한번 보려면 계속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 게 피곤함. 싫지는 않지만 마음 먹고 봐야한다.

둘다 좋아하는(했던) 프로그램

  • 나 혼자 산다 - 대중성 끝판왕 인정합니다. 근데 출연진에 따라 재미가 갈린다.
  • 동물농장 - 둘다 동물 좋아함.
  • 싱어게인, 음악 서바이벌 - 처음엔 같이 재밌게 보다가 남친이 좋아하던 출연자가 못해서 떨어지게 되면서 분위기가 나빠짐ㅎㅎ
  • 1호가 될 수 없어 - 같이 재밌게 봤었는데 점점 대본티가 나면서...그리고 남자친구는 뭔가 갈등 구조가 나오면 엄청 스트레스를 받아해서 이거 보면서도 갈등 구조 나오면서 점점 남친이 안 보게 됨.
  • D.P - 둘 다 재밌게 본 프로그램 맞음.
  • 기묘한 이야기 - 남자친구가 더 좋아했지만 나도 재밌게 봤다.
  • 서사가 있는 외국 영화들 - 영화 보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가 잘 통함. 근데 난 영화는 보는데 에너지가 들어서 사실 자주 보고 싶진 않다. 주말에만 한 편 정도씩 보고 싶음.

 
써놓고 보니 이 정도면 겹치는 취향도 많은 건가 싶은데, 내가 일상적으로 보는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남자친구는 대부분 안 좋아하고, 남자친구가 주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내가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에 취향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다. 또 같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나도 남자친구도 엄청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 커진다.

어릴 때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음악 취향이 비슷한 남자가 이상형이었다. 고등학교 때 남자 선배가 내 이상형을 듣고 "그런 거 하나도 안 중요해. 널 좋아하면 남자가 니 취향에 맞출 거니까." 라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맞는 말인데 틀린 말이다. 나한테 맞춰주지만, 그건 진짜가 아니니까 진짜 취향이 같은 거랑은 다름.)

선배가 말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도 나이를 먹을수록 '취향은 친구들이랑 통하면 됐고, 남자와는 가치관이나 성격이 맞으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남자친구와는 비슷한 것도 많다. 정치 성향도 그만하면 꽤 비슷하고, 하드한 유머 코드도 잘 통한다. 비슷한 것들이 많은데, 나에게 중요한 것 하나가 정말 다른 게 크게 느껴진다.

언젠가 친구 Y네서 한 달을 살 때, 저녁마다 우리는 같이 요리를 해놓고는 인터넷으로 '프로듀스101'을 틀어 수다 떨면서 같이 보곤 했다. 그리고 나선 각자 맥주와 와인을 꺼내 홀짝 홀짝 마시며 보드게임을 하거나, 빙고를 하고 또 이런저런 수다를 같이 떨다 잠들곤 했다.

그 저녁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도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친구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행복이 나에게 상징적으로 남은 이유는, 그런 저녁 시간은 내가 원가족 안에서 겪어본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은 각자 너무 취향이 달랐고, 그래서 각자 방에서 TV나 컴퓨터, 아이패드로 각자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보는 가족이다. 보드게임? 엄마는 그런 걸 안 좋아하기 때문에 가족이서 그런 걸 해본 일이 없다. 명절 고스톱 정도?

함께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같이 보는 것, 그리고 같이 보드게임을 하는 것

이게 내가 가족의 저녁시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로망이다.

그래서 친구네 가족이 넷이서 보드게임을 맨날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마음 속에 순간적으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이 로망은 엄청나게 크거나 꼭 채워져야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는 사람은 없다는 것도 잘 안다. 내게 좋은 저녁 시간을 알려준 친구 Y와는 정치 성향이 완전 달라져서 지난 번 만났을 때 한바탕 싸웠다.

이걸 머리로는 알지만 내가 원래 가족과 보내지 못했던 그 저녁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욕심이 마음 한 구석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나 보다.

내가 꾸리는 가정은 이랬으면 좋겠다, 이렇게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욕심.

함께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TV로 함께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같이 웃고, 가족끼리 (누가 이기든 지든 감정 상하지 않고) 때때로 보드게임도 하는 가족

한국 예능 프로그램은 대부분 싫어하고, 보드게임이든 뭐든 경쟁하는 건 다 싫다는 남자친구와는 꾸릴 수 없는 가정이겠지. ㅋㅋㅋ

그래도 뭐 어쩌겠나. 받아 들여야지.

가족 중 누군가가 싫어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나 때문에 억지로 봐주거나, 보드게임을 나 때문에 억지로 해주는 걸 바라는 건 아니니까.

받아들일건데! 뭔가 외로운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ㅎㅎ

평생 취향의 간극을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텔레비전 2대로 평화를 찾은 우리 엄마와 아빠도 잘 사니까...ㅋㅋ
나도 뭐...그렇게 살면 되겠지.

읽다 보니 생각이 정리되어서, 원래 제목에 물음표를 붙였다가 뗐다.
뭐 어째. 받아들여야지. 취향이 다른 걸.
알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왠지 좀 더 외로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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