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우리집엔 케이블 티비가 없었다
아니 케이블은 커녕 유선방송도 없었다
오로지 지상파 방송만 나왔다 채널 네개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에야 IPTV를 설치하고 케이블 방송도 볼 수 있게 됐으니 보통보다 늦은 셈이다
그런 탓에 나는 또래들이 공감하는 투니버스 애니메이션을 하나도 본 적이 없다 아따맘마 같은 거
아무튼 어릴 때 케이블이 없었을 때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채널은 엠넷이었다
중학교 땐 학교가 끝나면 절친이었던 유나네 집에 거의 매일 놀러갔는데, 걔네 집에서 별로 하는 것도 없이 그냥 엠넷 틀어놓고 피자 시켜먹는 게 나의 평범한 일과였다
그 때 엠넷은 지금 엠넷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은 자체 제작 예능 프로그램이 주가 된다면 그 때는 좀 더 음악 채널에 가까웠다

유투브도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 쉽게 볼 수 없는 외국 뮤직비디오를 많이 틀어줬고, 자체 제작 프로그램도 뭔가 특유의 젊고 마이너한 느낌이 지금보다 강했다 VJ문화도 그랬고, 해외 뮤지션 공연 실황 같은 것도 곧잘 틀어주고
노홍철이 나오던 닥터노의 즐길거리나 재용이의 순결한 19 같은 프로그램이 기억난다
중고딩의 나는 그런 엠넷 보는 걸 좋아했다 요새 언어로 말하자면 힙해보였기 때문이다
근데 엠넷이 씨제이에 인수된 후인지 어쨌는지 엠넷의 힙함은 어느 순간 퇴색됐고
요샌 SBS MTV가 예전 엠넷의 힙함을 재현하고 있는 것 같다 해외 뮤지션 다큐나 뮤직비디오도 많이 틀어주고, 젊고 세련된 느낌이 있다 엠티비 덕분인가
때문에 자주보진 않지만 간간히 돌리다 본다

이 글 왜썼냐면
엠넷에서 지산 락페 중계해주고 있길래ㅋㅋㅋ
지산도 씨제이가 손대고 나서 맛갔단 말이 많지만
덕분에 엠넷에서 실황도 보고 좋네 간만에 음악채널 느낌이다 맨날 돌리다보면 주구장창 언프 재방만 하고 있던데


덧.
케이블이 없었기 때문에 마이너한 컨텐츠를 자주 방영해주는 EBS 또한 즐겨보며 자랐는데,
EBS에서 방영해주던 '애비로드 라이브'는 내가 알람 맞춰놓고 챙겨볼 정도로 정말 좋아했던 음악 프로그램이다
EBS도 어울리지 않게 힙한 느낌이 꽤 있는 신비한 방송국이다 지금 하고있는 EIDF도 그렇고






 어제 유투브로 이런 저런 야구영상을 보다가 jTBC에서 올해 wbc 전에 했던 '정수근의 찾아가는 인터뷰'라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정수근'하면 보통 별로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겠지만, 나는 그런 사건들이나 그의 현역시절 활약보다도 야구를 좋아하지 않을 때 서세원 쇼에서 봤던 그의 재치있는 입담을 먼저 기억하는 터라 기대를 가지고 보았다.



결과는... 완전 재밌었다. 


대부분의 야구선수들이 후배인지라 반말을 하면서 편하게 대화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자연스럽고 편해보였고 보통의 리포터들이 하는 인터뷰보다 선수들이 훨씬 편하게 인터뷰에 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수근이 야구선수의 입장을 잘 알기에 야구선수 입장에서 때론 난감할 수 있는 질문도 편하게 잘 물어보고. 한 선수 당 두 편씩 15분 정도 밖에 되지않는 인터뷰임에도 굉장히 알차고 재미있어서 밤새 여러 선수들의 인터뷰를 몰아서 보았다. 



야구를 좋아하는 터라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빼놓지 않고 본다. 우리 팀은 요새 좀 잘 나가는 터라 경기 후에 수훈선수 인터뷰도 자주 있다. 하지만 요새는 수훈선수 인터뷰를 챙겨 보지 않게 된다. 우리 나라 스포츠 방송국들은 보통 수훈선수 인터뷰를 젊고 이쁜 여성 리포터가 하거나, 캐스터와 해설자가 통화하듯이 한다. 캐스터와 해설자가 인터뷰를 할 때도 딱히 재미있게 인터뷰를 잘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 리포터가 인터뷰를 할 때는 정말 최악이다. 구장 인터뷰는 신인급 스포츠 아나운서들이 나가서 더 한 것 같긴 한데, 준비해온 질문지 읽기에 급급한 (가끔은 선수의 대답에 관심도 없어보인다.) 스포츠 아나운서들의 모습에 수훈선수 인터뷰를 보고 있는 내가 다 민망해진다.



야구시청 짬밥을 좀 먹으니, 이제 그 날의 수훈선수 인터뷰를 안보고도 내가 질문지를 작성할 수 있을 것 같다. "0회 타석에 들어섰을 때 홈런을 칠 느낌이 드셨나요?" "홈런을 친 공은 어떻게 노리고 친 건지." "홈런을 쳤을 때의 마음?" "요새 팀 분위기는 어떤가요?" "올해 팀이 가을 야구 할 수 있나요?" 질문이라고는 있는 질문지에 상황에 따라 조금씩 말바꿔서 하는 정도? 정작 수훈선수 인터뷰를 보고 있을 응원팀 팬들이 정말 궁금한 질문을 하는 건 드물다. 선수의 대답에 따라 적절한 후속 질문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물론 그 날 그 경기에 대한 인터뷰인지라 질문이 한정될 수 밖에 없는 건 이해하지만, 그 와중에도 좀 더 재미있는 질문 한 두 개씩을 추가하면서 인터뷰를 좀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스포츠 아나운서고 피디고 그런 노력이 있는지조차 궁금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노력이 없으니까 스포츠 방송국 4개가 다 비슷한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고, 다 비슷한 야구정보 프로그램을 하는 거겠지. 프로그램을 차별화할 생각은 안하고 반반한 아나운서 얼굴로, 몸매로 쉽게 쉽게 시청률 올릴 생각만 하고.



임찬규 물벼락 사건도 이런 연장선에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어제 다저스 경기를 마치고 푸이그가 곤잘레스와 다저스 아나운서에게 파워에이드를 어마무지하게 뿌려대는 걸 보면서 내가 다 시원하고 그 경기를 이긴 선수들의 신나는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는데, 한 편으로는 임찬규 물벼락 사건이 떠올라서 마음 한 구석이 싸했다. 물론 그 사건은 물을 뿌리지 말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뿌린 임찬규의 과실이지만, 경기 후 승리의 즐거운 순간에서도 아나운서 눈치보면서 물을 뿌리면 안 되는 한국 방송의 분위기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말로 인터뷰어가 정수근 같은 선수 출신 리포터였어도 경기 후 승리해서 즐거운 맘에 물뿌리는 걸 가지고 그 난리를 쳤을까. 야구 선수 무식에 감전사까지 운운하면서. 시발놈들.



애초에 야구 선수라는 사람들이 연예인들처럼 인터뷰하는 말발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런 경우엔 인터뷰어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스포츠가 아니라 다른 분야를 봐도 그렇다. 같은 사람을 인터뷰한 거라도 지승호나 김혜리가 한 인터뷰가 다른 기자들이 한 인터뷰보다 재미있고. '설국열차' 관련된 수많은 봉준호 인터뷰를 봐도 봉준호 후배라는 경향신문 기자나 익스트림무비가 한 인터뷰가 그 수많은 인터뷰 중에서도 제일 재미있는 것처럼.     



말빨 좋은 선수출신 수훈선수 인터뷰어를 정해두고 해당 인터뷰어가 인터뷰를 하면 수훈선수 인터뷰가 훨씬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구장 수훈선수 인터뷰 자체가 지금은 짬낮은 애들이 하는 거라는 인식이 좀 있어서 선수 출신이 하긴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인식이야 바꿔 나가면 되는 거고. 은퇴한 선수들 팬서비스 느낌으로 팬들도 좋고 일자리도 제공해주고 좋지 않나. 



야구장에 여성팬들이 늘고 있다고 하고 실제로 야구장에 가도 체감상 여성 관객이 40퍼센트는 되는 것 같은데 왜 스포츠 방송국들은 야구 경기나 후속 야구정보프로그램의 타겟 시청자를 남자로만 잡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니 시청률 올릴 생각이 있으면 다른 방송국과 차별화하고, 타겟을 넓혀야지. 스포츠 전문 방송국도 어느새 네 개나 되는데, 그 넷은 서로 경쟁할 의지도 없어보인다. 아이러브베이스볼이나 베이스볼투나잇야나 베이스볼S, 베이스볼워너비까지 진행하는 여자 아나운서 얼굴빼고 다른 게 대체 뭔지. (그나마 후발주자인 XTM의 베이스볼워너비가 방청객 시스템도 만들고, 워너비 문자투표도 하면서 노력을 하고 있는데 다른 방송국은 그냥 의지가 없다.) 프로그램 진행이야 여자 아나운서들이 발음도 좋고 진행 전문가들이니 그대로 한다고 쳐도, 수훈선수 인터뷰나 구장 찾아가서 선수들이랑 이야기하고 노는 곁다리 코너까지 걔네가 할 필요는 없잖아. 담벼락 인터뷰니 뭐니 맨날 똑같은 화면 비슷한 내용들 이제 지겹다. 스포츠 방송국 피디들은 경인방송의 '불타는 그라운드'가 왜 성공했는지 생각좀 해봐라.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는 스포츠를 엄청 좋아해서 스포츠 방송을 하게 된 스포츠 덕후들처럼 보이지 않고, 스포츠 프로그램 피디도 마찬가지로 피디가 되고 싶었는데 스포츠 방송국에 입사하게 돼서 그냥 일하는 사람들로만 보인다. 매일 하는 야구정보 프로그램들만 가지고 이런 소리 하는 게 아니다. 얼마 전에 '류현진과 친구들'에 낚인 거 생각나서 또 빡이...친다. 프로그램들을 진정 그 따위로 밖에 못만드나. 물론 제작 환경 상의 한계도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런 환경 속에서도 더 나은 프로그램을 만드려는 노력들을 좀 했으면 좋겠다. 스포츠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없는 건 나뿐인가. 아니 팬 입장에서 스포츠 시장이 얼마나 제대로 된 프로그램도 없는 블루오션인데...팬이 보고싶은 그런 프로그램 하나를 못만들어 주나.   



+)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인터뷰어와 선수 사이에 느껴지는 묘한 권력관계가 불편한 사람은 나뿐일까. 여성 리포터와 선수 사이의 인터뷰는, 말하자면, 섹션 티비 볼 때 김슬기나 황제성 같은 인터뷰어와 톱스타가 인터뷰할 때 느껴지는 권력관계 같은 게 느껴져서 불편하다. 선수 입장에선 '야구도 모르는 애들이 인터뷰하네.' 하는 속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달까. 그에 비해 정수근과의 인터뷰는 그것보다는 '야구 잘했던 야구 선배'와 하는 인터뷰 같이 느껴져서 그런 권력관계가 거의 느껴지지 않고, 보는 사람도 한결 편하다. 인터뷰어는 인터뷰이와 공감대를 가지고 정서적으로 친밀한 사람이 하는 게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다. 물론 여성 아나운서도 그럴 수 있겠지만, 여성 아나운서가 그런 인터뷰어의 역할을 위해 선수들이랑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는 건 한계가 있을테고, 사실상 불가능할테니 말이다. 




 

 방학이 되어 드라마를 꽤 봤다. 남는 시간을 보내는 데 드라마만한 게 없다. 내가 여행가있을 때 방영되었던 '골든타임'을 이제서야 보았고, jTBC의 역작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장항준의 작가 입봉작 '드라마의 제왕'과 인기리에 어제 종영한 '학교2013'까지 단기간에 꽤 많은 드라마를 봤다. (본 글에는 위 드라마들의 결말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요즘 드라마' 여러 편을 보면서 느낀 건 언젠가부터 드라마의 엔딩이 굉장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드라마들은 대책없는 해피엔딩이 특징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어두운 분위기의 드라마에는 새드엔딩도 많았지만, 밝은 호흡의 드라마는 주로 해피엔딩이었다. 하지만 요새 드라마들은 다르다. 드라마의 클리셰가 끊임없이 지적을 받고, 시청자들의 놀림감이 되어버린 탓인지. 드라마를 만드는 이들의 고민도 깊어진 모양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트콤 감독 김병욱은 결말로 시청자 엿먹이기가 특기였다. 김병욱 시트콤의 결말은 한결같이 비극적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대책 없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현재 절망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온 것처럼 절망을 이야기해왔다. 한없이 냉소적인 현실주의자랄까. 심지어 그는 점점 더 절망을 이야기하는 쪽으로 깊어져가고 있다. ㅡ참조: 김병욱 감독 인터뷰 http://talk.imbc.com/news/view.aspx?idx=48087ㅡ 냉소적 현실주의자 김병욱의 결말은 대다수 시청자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곤했다. 드라마에서조차 절망을 이야기하는 현실주의자가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 외에는 모두들 '드라마는 판타지'라는 드라마의 공식에 충실했다. 하지만, 이제는 김병욱시트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드라마들도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드라마의 제왕에서 드라마 제작자인 김명민이 맡은 앤서니 김은 후반에 이르러 눈이 실명되는 병에 걸린다. 미국에서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되고, 그는 운좋게도 새로운 치료법의 시험대상자로 선정된다. 여기까진 기존 드라마의 클리셰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미국에 출국하지 못한다. 자신이 만든 드라마의 마지막을 제대로 끝내야 한다는, 어이없는 사명감도 사명감이지만 '어차피 시험을 받는다해도 내 눈이 완치될 확률은 00% 밖에 안된다.'라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이유로. 결국 앤서니는 실명한다.


 20대 남녀의 결혼준비를 다룬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도 처음부터 끝까지 참 현실적인 드라마다. 결혼을 준비하는 연인은 사소한 이유로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모든 일이 장애물이 된다. 우여곡절 끝에 연인은 결혼에 골인하지만 20회 내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혜윤 어머니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잣집인 정훈의 집에서 강남의 아파트를 얻어내주고야 말겠다는 어머니의 욕심은 원래 제시되었던 강북의 아파트조차 얻어내지 못한 채 끝이 난다. '우결수'의 마지막 장면은 결혼에 골인한 연인이 바쁘게 출근을 하고, 욕심을 부리던 혜윤의 어머니(이미숙)가 힘들게 손자를 돌보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혼을 준비하던 혜윤의 언니 혜진 부부도 끝까지 화해의 기미를 보여주면서도 결국 간격을 줄이지 못한 채 이혼한다. 


 골든 타임은 결말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드라마들에 비해 많은 희망을 이야기한 드라마지만 절망을 일부러 피해가지는 않는다. 해운대 세중병원이 추진하던 두 가지 주요한 사업인 보건복지부의 헬기지원도 무산되고, 외상센터 설립 지원도 무산된다. 골든 타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자'고 이야기하며 비교적 밝은 결말을 보여주지만 드라마 내내 드라마가 보여주는 높은 현실의 벽과, 바꿀 수 없는 의료 체계의 여러 한계들은 충분히 현실 속 절망을 이야기한다.


 절망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어제 인기리에 종영한 학교2013의 결말은 더 큰 절망을 이야기한다. 드라마 내내 아슬아슬했던 문제아 오정호는 여러 주변 이들의 관심으로 이전과 다른 모습을 갖게 되지만 그런 오정호의 앞에는 3학년을 올라가는 것을 막는 더 큰 장애물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아파져 당장 돈을 벌어야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금전적인 부분을 도와주겠다는 강세찬 선생에게 정호는 묻는다. "선생님이 절 대체 언제까지 도와주실 수 있는데요. 이번 달이요? 다음 달이요? 저 같은 애 또 나타나면 언제나 그렇게 도와주시게요? 전 게다가 어차피 그 돈 갚을 수도 없어요." 문제아가 마음을 잡으면 주변 문제도 덩달아 뚝딱 해결되고, 적성을 찾아 결국 훈훈해지던 기존의 드라마와는 달리, 학교2013은 '종례가 끝나도 정호는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결국,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곧 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88만원 세대'의 한숨, 사오정 오륙도의 처진 어깨, 세대에 무관하게 사회 구성원 누구나가 절망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절망으로 물든 마음을 치료해주겠다던 '힐링'담론조차 절망하는 이들에게는 배부른 소리고 기만처럼 느껴진다며, 탐탁지 않아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는 걸 보면 우리는 분명 절망하고 있는 모양이다.

 

 드라마만이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몇 달 전 개봉했던 영화 '피에타'에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높은 권위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이기도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상을 받은 것부터가 어쩌면 세계적인 '절망'트렌드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김기덕은 절망을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한 도구로서가 아닌 절망 그 자체로 담담히 이야기해온 몇 안 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그동안 많은 대중에게 '왠지 불편하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피에타'는 그전 그의 작품세계와 뚜렷이 배치되는 작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이상 이전만큼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은 현실 속 절망에 익숙해져가는 중이다. 

 

 시사잡지 또한 절망의 최전선에 있다. 어린 시절부터 10년 넘게 읽어온 한겨레21이건만, 대선 이후로 한겨레21을 읽기가 처음으로 힘이 들어 한겨레21을 덮어버렸다. '요새 왜 한겨레21 안보냐'는 아빠의 질문에 저렇게 대답하니, 아빠 또한 동의하셨다. 절망하던 이들이 갈망하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람들은 절망을 조금씩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거라던 낙관조차 잃어 버렸다. 나조차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인지라, 대선이 끝난 다음 호 한겨레21 전체에 깔린 깊은 절망과 패배의식이 꽤나 불편했다. 드라마나 영화의 절망보다 더 가슴을 직접적으로 후벼파서 그랬던 걸까. 정치적 성향을 떠나, 절망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어떤 변화이건, 변화가 희망처럼 보이곤 한다. 이명박의 당선도 그런 절망시대의 산물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엔 오히려 절망은 깊어졌는데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다들 체념하고 현실은 절망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일까. 희망을 말하는 드라마가 '비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요새 드라마는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MBC 스페셜 '졸업'편을 보게 되었다. 일부러 챙겨본 건 아니고 어쩌다가.

'졸업'편에서는 "섬마을 위도에서 13년 동안 홀로 키운 손자를 뭍으로 보내야 하는 할머니,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로 제자들의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된 중학교 담임교사" (mbc스페셜 홈페이지 참조)의 두 이야기를 교차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 중에서 내 마음에 와 박힌 건 예상치 못한 일로 제자들의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된 3학년 7반 담임교사, 말마쌤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는 예상치 못한 일이란, 역설적으로, 이 상식을 뛰어넘는 정부와 사회하에서는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십년을 기다려 교사가 된 대구의 한 중학교 3학년 담임교사인 '말마쌤'은 전교조에 소속된 선생님으로서 특정 정당에 한 달에 만원씩 후원금을 내었다는 이유로 학기 중간에 해임 통보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말마쌤은 평소에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와 동료 교사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대단한 선생님이었다. 말썽꾸러기들을 당신의 여가시간을 내서 만든 특유의 '예절교실'로 불러 훈계나 체벌이 아닌 대화로 아이 스스로 반성시키고, 108배와 명상으로 문제점을 고치게 만든다. 시험기간에는 땅콩과 초콜릿으로 만든 '시험잘 보는 약'을 나눠주시고, 급식시간에는 아이들 앉을 자리를 찾아주며 분주히 다니시다가 모두가 다 밥을 먹은 후에 제일 늦게 식사를 하신다. 형편이 어려운 제자의 가족까지 직접 챙기신다. 교사와 학생이 아닌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꿈꾸시는, 천상 교육자시다.

해당 학교 학생들이 직접 올린 것으로 보이는 네이트판(
http://pann.nate.com/b201867633)을 보면 선생님의 교육방침이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 지 알 수 있다.







해당 학교 학생들이 올린 네이트판 내용 중 (http://pann.nate.com/b201867633)



 나는 학원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친다. 다른 학원에서도 중학생을 가르쳐본 적이 있다. 일주일에 18시간씩 중학생들을 가르친다. 중학생들을 가르쳐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중학생은 정말 대하기가 힘들다.

 특히 이제 3학년이 되는 예비 중3들은 어느 학원을 가든 골칫거리다. 왠만한 체벌에도 꿈쩍안하고 반항만 하고, 머리가 컸다고 내 말에 토달기가 일쑤다. 부모님조차 두 손 두 발 놓으셔서 학원에 이런 애를 보내 미안하다고 말하시는 부모님이 계실 정도다. 때로는 여기가 학원인가 비행청소년 될까봐 맡겨두는 청소년 탁아소인가 싶다. 물론 백지와 같은 아이들이니만큼, 한 명 한 명 진정한 애정과 관심을 주고 내 시간을 투자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변한다. 그런데, 그러기엔 시간과 노력이 장난 아니게 든다. 내가 이 애 부모도 아닌데 왜 그래야하나 싶다. 왠만한 사명감을 가진 선생님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과 고작해야 여섯 일곱 살 차이 정도 나고, 언제나 학생인권을 보장해야한다고 말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모두들 '꼰대'들이 되어버린다고 사람들을 비난하는 나도, 노력은 하지만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기가 쉽지 않다. 한 반에 여섯명뿐이어도 그 개개인의 감정을 살펴보아 주기가 힘든데, 한 반에 기본이 서른 명인 일선 학교의 교사들은 어떻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을 정말 어려운 직업이라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생님이 편한 직업이라 하는 사람도 많다. 고3 담임만 아니면 일찍일찍 끝나지, 주말,공휴일 다 쉬는 데다가 남들에게는 없는 여름방학, 겨울방학도 있다. 그래. 선생님은 대충대충 하기엔 정말 괜찮은 직업이다. 그냥 우리가 학창시절에 봤던 그저그런 기억에 남지 않는 선생님들처럼 그냥 와서 교과서좀 읽다가 학교끝나면 칼종례시켜준 후 퇴근하면 된다. 그렇게 대강대강 하기엔 선생님만한 직업이 없다.

 하지만 선생님을 '제대로' 하려면 얘기가 달라진다. 수많은 사람들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칠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누군가의 삶을 구할 수 있는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물론 처음에는 사명감을 가지고 들어오는 교사들도 많다. 내가 만났던 좋은 스승님들이 모두 공립학교의 부임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젊은 선생님들 이셨다는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대부분의 교사들은 곧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가만히 있어도 월급은 나오고, 노력해도 아이들의 변화는 더디며, 학교에서 시키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과는 무관한 수많은 행정일들은 그들을 지치게 만든다. 결국 초기의 사명감은 온 데 간 데 없이, '그저 그런' 선생님이 되고 만다.

 그 수많은 '그저 그런' 선생님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선생님이 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다녀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지 않나. 제대로 된 선생님이 얼마나 드문지를. 그것은 곧 제대로 된 선생님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타내는 반증이기도 하다.   

 나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자신이 없어 선생님이 정말 어려운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제대로 된 선생님들 중 한 명. 그 제대로인 선생님들 중에서도 가히 대왕급이라 할 만한 분인 말마쌤이란 분을 어른 세계의 논리, 정치적 논리로 해임시켜버린 것이다. 

 대체 내가 만난 어떤 선생님이 학생이 돈을 잃어버렸다고 할 때 일단 내 돈 써 하시며 당신의 돈을 선뜻 내주시던가. 대체 어떤 선생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화 한 번 안내시고 존댓말을 하시며 우리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시던가. 대체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던가. 말마쌤은 그러셨다.




 요즘 애들 어쩌고 하는 말, 정말 '꼰대'스러워서, 싫어한다. 요새 애들은 버릇이 없고, 요새 애들은 우리 때랑은 또달라. 어쩌고 저쩌고 하며 요새 애들을 욕하는 그 말들 말이다. 친구들이랑 얘기하다보면 우리는 이십대 초반인데도 애들이 저런 얘기를 하는데 나이를 들면 얼마나 더 심할까 싶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싸잡아 비난하는 요새 애들보다도 못한 어른들이 많다. 아이들은 잘못을 지적하고 사랑과 관심으로 대해주면 대부분 변한다. 그런데 어른 세계의 논리라며 제대로 된 교사를 해임하는 '꼰대'들은 어떤가. 이곳 저곳에서, 학생들이, 학부모들이, 동료교사들이 이건 아니라고 다들 관심을 가지고 얘기해주는데도, 그 '꼰대'들은 지들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말썽부리는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두 달만에 변화시켜준 그 선생님을 자르고, 아이들을 싸잡아 비난하며, 애들은 때려야한다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반증하고 깨닫게 해줘도 지들 잘못은 죽어도 모르는


바로 그 수많은 꼰대들이 문제다.




 

http://news.nate.com/view/20110124n25473

 기사 링크


동성애에 대해 고민하는 남학생의 사연에 대한 이윤석의 상담


'남자의 자격'의 오그라드는 자막이 드디어 한 건 했구나.
시청률이 그렇게 높다는 1박2일은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도 남격은 나름 꼬박 챙겨본다.


나는 무한도전의 팬인데 뭐 무한도전을 베꼈느니 마느니 보다도 무한도전과 거의 동일한 포맷이면서도
다른 구성원들이 가지는 나름의 맛이 있어서 즐겨보는 편이다. 이경규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데 자막에 관해서는 평소에도 오그라들고 자막이 저프로를 망친다 하는 느낌이 자주 들었었다.
올드한 느낌? 대체 남격 자막은 누가 쓰는 걸까.했었다. 내가 너무 무한도전 자막에 익숙해서 그런가?하면서.


사실 이성애자의 입장에서 이윤석의 저정도 발언("어렸을 때는 그럴 수 있다. 나도 그런 친구들이 있는데 크고나서 다들 여자좋아하고 잘산다"정도의 발언)은 어느정도 용납되는 수위가 아닌가 싶다.
이윤석이라는 사람 자체가 좀 마초적이거나 가부장적인 면이 강하고, 방송에 나오는 여타 연예인보다 예술적인 성향이 약한, 생각의 폭이 좁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왔고.
저정도 수위는 동성애자들이 받아들이기에도 이성애자인 이윤석의 개인의견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어느정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위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윤석의 발언보다도 공영방송이라는 KBS의 간판 예능프로그램이라는 (프로그램의 이경규가 2010년 대상을 받기도 했고, 요새 나오는 KBS광고에도 남격 합창단 얘기가 맨앞에 나오는 걸 보아하니) 남자의 자격에서 저 자막이 적절했는가다.


동성애자도 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들도 공영방송을 보고 수신료를 낸다.
KBS가 공영방송 공영방송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들한테 내는 수신료 아까워하지 말라고 광고를 하면서
대표 간판 예능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대놓고 동성애자를 배척하는 자막을 내보내는 것이 옳은 걸까?


대놓고 밝힐 수 있지만 나는 여자고, 이성애자다.
어떤 사람들은 '게이물 좋아하는 여고생or여대생아님?' 쯤의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나는 여자고, 이성애자고, 게이물 정말 싫어한다.
아 또 여기서 주위에 레즈비언이나 게이있으면 역겨워할거면서 인터넷에서만 인권변호사인양 군다고 시비걸고싶나? 미안한데, 아닌데?

내 친구들 중 한 명은 레즈비언이고, 그애와는 오래된 친군데 친구가 된 지 꽤 지났을 때 나한테 커밍아웃을 했다. "뭐?!진짜?" 하는 놀람의 과정조차 없이 그전과 전혀 변함없는 사이로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낸다.
내가 대단하고 비범한 사람이라서?
막상 당신들도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동성애자라면, 그걸 혐오한다면서 그들을 내칠 수 있을 것 같나?
동성애자를 싫어하던 사람들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동성애자라면 받아들이고, 그들의 편이 되어줄걸? 적어도 내친구의 주위사람들은 나뿐 아니라 모두 그랬다.
내가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쓰는 데는 내 친구의 존재도 한 몫 하니까."누가 내친구한테 욕해!" 같은 거지.
난 이제 친구 여자친구 얘기도 듣고, 친구 여자친구랑 놀기도 하고... 뭐그렇게 잘 지낸다.

물론 걔가 이쁜 여자보고 좋아할 때나 그럴 때 은근히 짜증?어색함?을 느낄 때도 있다.
나도 인간이니까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본질적인 거부감이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근데 그게 뭐? 내가 때때로 그런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그걸 표출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 않다. 내가 그 순간순간 기분이 별로라고 해서 친구의 정체성 자체에 상처를 줄 순 없는 거다.
자기가 사회 속에 있는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고 그 사실을 표출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누구에게도 남을 단지 그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싫어하고, 대놓고 그사람들을 무시하고, 그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권리는 없다.



심정적으로 싫어하는 것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달라야 하지 않나?


아무리 우리가 동성애자들이 맘에 안들고 싫다해도 동성애자들은 사회에 다수 존재하고,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런 사회에서 어떤 존재에 대해 비정상이라고 규정하고, 혐오하는 것. 그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인가?


소수자,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이 바로 파시즘의 시작이다.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토대가 아닐까.
소수자들을 배척하는 것이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폭력이 되버린 것 같은 우리 사회가 조금 무섭다. 




SBS 예능프로 '밤이면 밤마다'에 남격 출연자 중 한 명인 김태원이 출연해 말했지.
"도대체 정상과 정상이 아닌 것의 기준은 뭡니까? 그런 게 존재합니까?" 라고.


국가가 규정한 불법행위인 마약반입을 저지른 범법자인 김성민에 대해서는 다같이 나서서 탄원서를 내주고
불법행위인 마약복용을 해서 두 번이나 수감되었던 김태원에 대해서는 고정멤버로 받아들이는 정도의 열린 모습을 보여주는 남격 제작진이
(이러한 남격 제작진의 기존 태도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심정적으로 평소에 동조하는 부분이 많았었음.)

왜 불법행위도 아닌 동성애에 대해서는 유독 이렇게 무지하고 최소한의 교양조차 없는 자막을 내보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남격의 자막은 평소에도 오글거리고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될 정도도 종종 있었지만
이번 자막은 특히나 공영방송의 자막으로서 적절하지 못했다.
상담을 요청한 저 아이가 실생활에서 '게이'라고 놀림받고 상처받거나, 실제로 동성애자가 되어서 자기가 대놓고 비정상취급받았던 저 상담의 기억을 인생의 상처로 여길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프로그램의 자막은 자막을 쓴 PD(혹은 스탭) 일개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 그 프로그램 전체의 의견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수자를 배척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항상 하는 착각이 있는데,
평생 그들 자신은 소수자가 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평생 살면서 자기자신이 동성애자가 될 일은 없을지 몰라도, 당신의 자식이 동성애자가 될 수도 있으며
굳이 동성애자가 아닌 수많은 종류의 소수자들 중 한 편이 될 일이 자신한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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