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슬프다.

다 지난 추억이라고 생각했는데. 


기괴한 안내방송과 위아더칠드런오브다크니스~하던 웅장한 음악으로 시작하던 그 이상한 라디오.

때마다 들려주던 삼태기 메들리와 라디오로 다섯번은 족히 들은 듯한 빨간 당구공 이야기. (근데 빨간 당구공 이야기는 매번 들으면서도 매번 결말이 기억 안나 무서워했었다.)

동동이랑 영숙씨 이야기들. 동동이랑 동동이 동생 이야기. 아마 동동이 동생 낳기 전에 라디오에서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아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정확히 기억은 아니지만.

수요일에 하던 쫌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를 되게 좋아해서, 다음 날 학교가는 거랑 상관없이 꼭 두시까지 기다려서 챙겨 듣고 다음 날 학교가서 졸고 그랬었는데. 

가끔 라디오 들으려고 기다렸는데 정파 시간이랑 겹쳐서 방송 안 하거나 그가 땡땡이를 쳐서 한 시간 내내 음악만 나올 땐 짜증도 났었고...

방송을 통해서 좋은 노래도 많이 알았고, 그가 해주는 이야기들 들으면서 이것저것 영향도 많이 받았었고. 

아 방송 시작하자마자 내내 생뚱맞은 자기 꿈얘기를 오래오래 하고서는 이것 보라고, 꿈얘기는 하는 사람만 재미있지 듣는 사람은 하나도 재미없다고. 했던 것도 생각이 난다. 아직도 남한테 내 꿈얘기를 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저 말을 떠올리곤 하는데. 저 말은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네. 


음...

지나버린 중고등학교 내 청소년기의 추억이지만... 오늘은 많이 그립다. 그 시절도 그 라디오도.

음악으로 성공하는 게 뭔지 수다떨 땐, 꼭 '그대에게' 같은 곡 하나 써서 평생 저작권료 받고 사는 게 꿀일거라고 친구들이랑 우스개 소리도 했었는데.

꿀 좀 더 드시다 가야 되는데, 이렇게 어이없게 허무하게 빨리 떠나버렸네.

언제나 자기 말을 꼭 맞는 이야기처럼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던, 그리고 참 세련되게 시크한 저음을 가지고 있었던, 그 마왕이... 벌써부터 그리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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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영화제에서 함께 일했던 K가 추천해준 책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를 읽었다. 우리가 완전히 공감할 수 있는 책이라던 K의 말이 온전히 와닿았다. 


아직도 조심스럽긴 하지만 1년 넘게 지났으니 이제야 말할 수 있는 건 독립 영화제의 실무진(총 9일의 영화제를 단 세 명의 실무진이 준비한다. 한 명은 상근이고, 나와 K 두 명은 영화제 기간에만 한시적으로 고용되는 계약직이었다.)으로 일했던 3개월의 경험은 내게 대기업 정규직에 대한 갈망을 남겼다는 것이다. 나는 좋아하는 일이라면 일도 즐거울 것이라는 환상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알게 되었고, 특히나 좋아하는 일이 '영화'라면 거기엔 발도 들여놓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일은 웬만하면 취미로 남겨두는 것이 좋다. 이것은 좋아하는 노래를 아침 알람으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딜가나 노동자는 '쥐어짜내'지게 되어있고, 이왕 '쥐어짜내'질 거라면 체계도 있고, 월급도 더 받는 대기업 정규직이 되는 것이 최선이다. '즐거운 노동'은 환상이다. 내가 동경하던 영화 감독과 술 마시는 건 즐거웠지만, (저녁도 굶고 일한 후에 하는 저녁 식사 겸 회식인데도) 그 술값을 각출해 내야 했던 현실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교대, 경영학과 가라던 부모님 뿌리치고 취업 안되는 사회과학대 오던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날이 올지는 나도 몰랐지만, 아무튼 3개월만에 이런 현실을 배우게 되다니 싸게 배운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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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뇌구조를 읽고  (1) 2013.02.01

2013년 10월 5일 토요일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엘지트윈스가 정규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 직행을 확정지은 날이기 때문이다. 


삼수 때는 
아침에 교대역에서 언제나 무료 스포츠신문을 챙겨서 전날의 엘지 경기 결과를 찾아보는 게 일이었고 
아싸였던 대학교 저학년 때는(물론 지금 아싸가 아니란 소리는 아니다;) 
방과 후 매일 혼자 컴퓨터 앞에서 꼬박꼬박 야구를 챙겨봤다.


내 인생의 암흑기를 함께해준 엘지트윈스였고 
그래서인지 은연 중에 야구를 보면서 
엘지 야구가 잘 되면 내 인생도 잘 될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근데 언제나 엘지 야구는 잘되려는 듯 하다가 결국은 잘 안되었고, 내 삶도 그랬다.
엘지가 포스트 시즌 진출에 번번이 실패하는 동안, 나도 이것저것에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던 엘지가 드디어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그것도 2위로.


그러니까 이게 나한테 무슨 의미냐면.










 


울컥한다

화이팅 엘지트윈스! 

 마광수의 뇌구조라는 마광수가 자기 얘기를 쓴 책을 읽었다. 도서관에서 마광수라는 이름을 보고 집어들게된 책이다. 나에게 있어 마광수의 책은 욕하면서 보는 막장드라마다.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쉽게 덮을 수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욕하려고 읽는다는 이야기다.


 마광수라는 노친네는 아주 스스로를 프리섹스의 화신으로 설정하고, 자신을 현대인 특히 여성의 성적 욕망 해방에 큰 업적을 가진 순교자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마광수의 대표작이자 최고의 문제작인 즐거운 사라를 아직 읽지 못하고 그의 다른 단편집인 '발랄한 라라'와 '마광수의 뇌구조'만 보고 그를 평가하기는 좀 미안한 감이 있지만, 내 생각에 그는 순교자가 아니다.

 

 그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전형적인 '천재 예술가' 스타일이다. 천재 예술가가 아니고, 천재 예술가 스타일이다. 그는 자신이 남과 다르기 때문에 자신을 천재적이라 믿는 사춘기적 망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인간들은 주위를 조금만 둘러봐도 한 트럭도 넘게 존재하고, 마광수 시대에도 이런 인간이 많았다. 예를 들어 조영남 같은 부류. 뭐 요새는 말할 것도 없이 더 하다. 가끔 일베나 소라넷 같은 곳에 이상한 행위를 한 후 자랑하듯 올리는 또라이들이 이런 마광수적 기질을 가진 이들인데, 걔네가 마광수보다 못한 건 마광수보다 가방끈이 길지 못하거나 지들의 똘끼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 정도다.


 마광수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마광수보다 멍청하며 쓸 데 없는 윤리의식에 집착했던 사회 지도층(?)에 의해 떴다. 단지 그것뿐. 2013년의 내가 읽기엔 마광수의 글은 탁월하게 창의적이지도, 파격적이지도, 천재적이지도 않다. 


 그는 자신이 여성의 욕망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과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볼 땐 머릿속이 온통 섹스로 가득찬 중2수준의 뇌구조를 가진 섹스 집착 노친네일 뿐이다. 자기 머릿속이 섹스로 가득 차 있으니 남들도 그러리라 생각하겠지. 여성의 욕망을 잘 이해하긴 개뿔. 그 자신은 굉장히 남성중심적이고 마초적이고 가부장적이다.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이것이, 천재예술가 스타일 망상꾼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가 자신이 가부장적이지 않고 열려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라도 되는 줄 안다.


 그래놓고 페미니스트들조차 '즐거운 사라' 사건에 있어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며 욕하고 있다. 물론 시대의 경직성이 그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던 것은 매우 촌스러운 일이지만, 페미니스트들이 그 촌스러운 흐름에 동참했던 것은 그 시대 특유의, 자유에 대한 인식 부족 보다는 단지 그의 글이 싫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만, 자신이 지지하는 의견의 표현의 자유는 옹호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자 한다. 페미니스트들이 볼테르의 말을 상기해 마광수의 편을 들어주었다면 좋았겠지만, "내 글 너네한테 도움되는 글인데 왜 내 편 안드냐!"하는 마광수의 반응은 틀렸다. 


 그의 소설 자체는 파격이고 다수의 공감이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다기 보다, 지금보다 훨씬 성적인 매체를 광범위하고 쉽게 즐길 수 없었던 시대에나 주목받을 수 있었던 자기만족적 글쓰기에 불과하다. 그의 글들이 있어야할 곳은 지금으로 치면 개인 블로그 정돈데, 뭐 블로그에 대학교수라는 신분을 밝혀놨다면 좀 인기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새로 치면 마광수 같은 인간은 발에 치일만큼 널렸고(예전에도 널렸을 것이다. 그들이 인터넷처럼 자신을 드러낼 곳을 갖지 못했을 뿐이겠지.) 그가 그런 사람들과 다른 건 대학 국문과 교수라는 지위로 책을 출판할, 즉 자신을 사회에 드러낼 기회를 가졌을 뿐이라는 것 정도다. 


 그의 글에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는 단지 자신이 애정하는 것만을 애정한다.


 단 한 가지, 그에게서도 괜찮은 구석을 찾아본다면, 책임질 일을 저질러 놓고 나몰라라하는 쓰레기보다는 애초에 나는 책임 안 질거다 하고 선전포고 해놓는 쓰레기가 그나마 낫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아무튼 예전엔 어떤 은퇴한 여배우, 서 무슨 숙이었던 것 같은데, 그 여자가 나는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어쩌는 섹스 자서전을 써서 난리가 났던 것도 그렇고, 마광수도 그렇고 지금 보면 별 것도 아닌 성적 자극에도 과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그 여배우가 TV에 기자회견하는 모습이 연일 나오는 것을 보면서, 당시 초등학생 정도였던 내가 엄마한테 포르노그라피가 뭐냐고 물었던 게 기억난다. 시대의 촌스러움이었는지, 마광수나 그 여배우가 갖는 지위의 탓인지 조금 헷갈리기는 하지만, 요새야 뭐 소라넷이나 디씨같은 인터넷 사이트만 가봐도 마광수보다 훨씬 더 또라이들이 넘쳐난다.


 음 하지만 나나 마광수나 하루키의 섹스담론은 공통적으로 싫어한다. 마광수는 섹스를 즐겁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닌 허무의 극복을 위한 수단으로 묘사한다는 이유로 하루키를 싫어하고, 난 하루키에게서도 남성중심적 시선의 폭력성을 느끼기 때문에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루키가 젊은 남자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은 건 하루키의 성 담론이 마광수의 그것보단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반증일 것이다. 물론, 많은 여자들 또한 하루키를 좋아하는 걸 보면 나 또한 남성중심적 시각에 의한 전형적인 여성상에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민감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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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시드니 폴락


이런 구분을 내린 뒤에 생각할 일은, 감독이라면 자신을 위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 우디 앨런


나는, 글쎄, 내 자신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 마틴 스코시즈


일반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어떤 사상을 이미지로 옮기는 일이다. 그러나 내 비밀스러운 정의를 밝히자면, 영화는 늘 개인적이고 추상적인 무언가를 탐구하는 방법이었다.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영화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무엇보다 우선 내 자신을 위해 만든다. 

- 기타노 다케시


그때 깨달았다. 내 삶으로 영화에 연료를 채워야 가장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 올리버 스톤



밤새 읽은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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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동원을 처음 본 건 내가 어렸을 때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에서였다. 건장한 아저씨가 나와서 말을 재밌게 했다. 내 기억엔 사투리를 썼던 것 같다. 어린 나는 주말에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야구에 빠져있던 삼촌들을 보면 다른 데로 채널을 돌리고 싶어 안달났었다. 최동원이 야구선수였는지 뭐였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저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에 나오는 그저그런 패널이었다. 부인도 한 두 번쯤은 같이 나왔던 것 같다. 나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부터 그 아저씨는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가보다 했다. 뭐하는 아저씨인지도 몰랐으니.

 야구에 관심이 없을 때에도 선동열은 알고있었다. 알고 있는 야구선수는 선동열, 박찬호, 이승엽이 전부였다. 선동열이 엄청나게 대단했던 투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라이벌인 최동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 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최동원을 알게되었다. 처음엔 그 대단한 투수 최동원이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 최동원인지 몰랐다. 쇼프로그램에서 본 모습은 한 분야의 레전드와 잘 매치가 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쇼프로그램에서 내가 본 최동원의 모습은 소박하고 털털한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야구를 더 알게 되고 투수라는 포지션을 좋아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한국시리즈에서 찍힌 모습이었는지 김광현의 투구폼을 보게 되었는데, 그 모습에 반하게됐다. SK팬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역동적인 투구폼. 투구폼은 간결한 게 부상의 위험도 적고 좋다지만 나는 그  투구폼이 정말 좋았다. 야구 만화 주인공처럼 멋있었다. 그 이야길 아빠한테 하자 아빠는 "넌 그러면 최동원의 투구폼도 분명히 좋아할거야. 찾아봐." 라고 말했다. 최동원이 좌완인지 우완인지도 몰랐던 나는 그 길로 최동원의 투구폼을 찾아보게 되었다.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이라 다행이다.

 좋지 않은 화질이었지만 역시나 나는 그 투구폼에도 반하게됐다. 아빠는 그 동영상이 최동원의 원래 투구폼보다 훨씬 덜 다이나믹한 동영상이라고 말했지만 그마저도 나한테는 정말 멋있었다. 저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 영향일까. 다른 선수이긴 하지만 내가 가진 유일한 야구 유니폼의 등번호는 11번이다. 11번 박현준이지만.



 그러던 작년이었나 인터넷 야구 커뮤니티에서 한 글을 보게 되었다. 어쩌다가 어떤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명함을 받았는데 최동원이라고 써있길래 다시보니 자기의 우상이었던 그 야구선수 최동원이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르고 수척해서 그가 암투병중인 것 같다는 글이었다. 꽤 화제가 됐었지만 최동원 선수 측에서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댓글들도 그럴리 없다는 말이 대다수 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난 그 글에 이상하게도 신뢰가 갔다. 최동원의 팬인 아빠한테도 말했었다. 암인데 말을 안하고 암투병 중인 것 같아.

 그리고 올해 경남고 레전드 경기에서의 수척한 모습을 보고 다시 그 암투병 글이 떠올랐다. 그는 다이어트를 너무 많이 해서 라고 말했다. 끝까지 자존심을 세운 거였다. 한 시대를 풍미한 야구스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자존심을 세우는 모습이 가슴아팠다. 롯데 자이언츠 팬도 아니고 최동원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도 그랬다. 아빠에게 또 다시 말했다.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본 최동원을 떠올리면 저 모습은 다이어트의 모습일리가 없다고...그는 아픈 것 같다고. 아빠는 별 말이 없었다.

 나같은 범인은 한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들이 왜 자신의 마지막 약한 모습을 내보이지 않으려 하는지 잘 모른다. 장효조도 최동원도 그렇게 갑작스럽게 갔다. 그들에게는 갑작스러운 게 아니었겠지만 팬들에게는 정말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많은 팬들은 그들의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직 젊은 나이에 최동원은 그렇게 갔다.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에 나오는 아저씨의 모습으로 시작해 인터넷 동영상으로 보게 된 다이나믹한 투구폼의 소유자, 내가 좋아하는 팀의 신인투수가 말하는 그의 롤모델로, 그저 그뿐이었고 사실 나는 최동원을 잘 몰랐다. 투구폼과 스타일 때문에 훨씬 먼저 안 선동열보다 조금 더 정이가는 투수였던 정도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자기의 암투병을 알리지 않고 싶어하며 꼭 회복할 거라 말했던 야구 레전드의 자존심 앞에서는 숙연해진다.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선동열이 그의 유족을 위로하고 있는 모습에는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곳에서도 야구하면서 행복하시길. 명복을 빕니다. 





 

친구가 먼저 떠나고 알바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영풍문고를 서성이다가 집어들게 된 강준만의 강남좌파.
사실 강준만의 책이라고는 도서관에서 독학으로 수능 공부할 때 이제 문과생이고 역사를 선택했으니 역사책들을 읽어야지 하면서 본 한국근대사산책, 한국현대사산책이 유이했다.

강준만의 글빨에 몰입도 되고 나와 비슷한 입장을 확인도 하고 서점에서 앞 부분 조금 읽다보니 사야겠다 싶었다. 요새 책을 읽다가 중간에 다 못읽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잘 읽히고 재미있어서 샀다.

강남좌파는 내가 언제나 주목하고 있던 키워드다. 나는 왜 김규항과 하종강에게 열광하지 않으면서 조국과 홍세화에게 열광하는가. 조국은 강남좌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나는 사실 강남좌파를 좋아한다. 왜냐면 강남좌파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떼돈벌어놓고 사회 단체에 기부 팍팍하고 퍽퍽한 좌파언론에 조건없이 큰 돈 툭툭 쾌척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강남좌파는 내가 계속 주목해오던 키워드다.

좌파와 우파를 떠나 강준만은 엘리트와 비엘리트로 그들을 구분하기도 한다. 예리한 지적이었다.
학벌사회와 엘리트주의에 대한 내용에는 구구절절 공감했다.
삼수를 하면서까지 그렇게 의대와 한의대 삼수 때 문과로 전향하면서는 그놈의 서울대.
결국 지금도 내 주변의 극히 일부 지인들만 아는 얘기지만 삼수해서 대학에 와놓고도 서울대에 대한 미련을 못버려 휴학을 하지 않은 채로 수능을 또 봤었다. 결국 서울대 못갔지만 써보기라도 했으니 다행일까.

아직도 찌질하게 삼수시절 강남대성학원에서 (공부로) 날리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때가 차라리 행복했었지' 하는 나는 학벌사회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서울대'라는 이름의 막강한 힘을 (삼수했기에?) 너무 잘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서울대에 가서 간판을 얻은 후 내가 살고싶은 대로 막 살고 싶었다. 그게 내 꿈이었다. 맹세코 출세하기 위해 서울대에 가고 싶었던 적은 없다. 그냥 그 간판을 갖고 싶었다. 이과로 수능을 두 번 볼 때도 진정 의사가 꿈이었던 적은 없다. 내 꿈은 의대생이었다.

왜 이런 얘기를 이제와서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학벌의 노예였다. 아니 과거형으로 쓰기엔 현재도 그렇다. 그리고 강남좌파가 실은 학벌좌파라는 얘기에 공감한다. 아직 바뀌지 않았기에 잘못된 제도고 관행이라도 그에 맞춰 사는 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에도.

그런데 책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자알 읽고 나서도 내가 어리석은 건지 의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강준만 당신은 강남좌파입니까? 지식인은 강남 좌파의 구분의 밖에 서있나? 조국을 강남좌파라고 하면서 강준만은 강남좌파인가? 궁금하다. 그 시절에 대학 졸업하고 미국 유학은 무슨 돈으로 갔는지도 궁금하다. 우리 아빠가 강준만이랑 같은 대학을 나와서 서울대 친구들을 수두룩하게 두고도 강남은 커녕 분당좌파 일산좌파도 못되어서 당신들이 부러워서 하는 질문만은 아니다.  

학벌일색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왜 이 책 날개의 저자소개의 첫줄은 '저자는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00대학에서 신문방송학 석사~' 인지 궁금하다. 관행이 바뀌지 않아서 그에 순응할 뿐일까? 순응하지 않으면 저자는 손해를 보나? 책날개에 저자가 무슨 대학을 나왔는지를 쓰느냐 안쓰느냐에 따라 책의 판매량이 바뀌나? 뭐 그런 사소한 것들도 궁금해졌다.  

무튼 오랜만에 400쪽 가까이 되는 책을 별로 쉬지않고 꼼꼼히 재미있게 읽었다. 잘 안읽히는 부분도 별로 없었고. 강준만은 책을 정말 잘쓴다. 집에서 돈 한 푼 안받고 알바로 근근히 살아가는 퍽퍽한 대학생의 '만 육천원' 만큼의 효용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삼수까지했는데도 맘에 안드는 대학에 와서 그 열등감을 가지면서도, 때때로 마음속에서는 은근한 엘리트의식이 고개를 들려하곤 한다. 언제나 경계하려고 노력한다. 사회에서 나름대로 알아주는 대학을 다닌다는 것에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는 나자신에게 혐오를 느낄 때도 있다. 고종석이 대학에 입학하는 아들에게 썼다는 글에 이런 비슷한 말이 있었다. 너와 비슷한 환경이었으면 너보다 더 열심히 잘 대학에 다녔겠지만 상황이 안되서 못그러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잊지말고 언제나 사회적 약자를 생각하라는 그런얘기였다. 언제나 그것을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아무리 죽는 소리하고 우리집 힘들다고 징징대도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 나와 같은 기회가 주어졌으면 나보다 훨씬 더 잘 하고 있었을 사람들이 많을거다. 남들보다 많은 기회를 가져왔음을 자각해야한다. 나는 내 안의 엘리트 의식을 배척하자.

최근에 어디 대학 다니냐는 질문을 두 번이나 받았다. 전공이 뭐냐는 질문이 먼저 잽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그들이 진짜 궁금했던 본론이 그 다음으로 훅 들어온다. 그 질문을 한 두 사람은 의외의 사람들이었다. 운전면허 도로주행 강사와 한의사였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질문이 내 또래의 누군가에게는 일상 속 폭력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내 안에 생기는 그, 찰나의 의기양양함이 솔직히 혐오스럽다. 맘에 안드는 대학으로도 엘리트 의식 가지는 내가 내가 바라던 대학에 갔으면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살았을까 싶어서 철렁하기도 한다.

그래서 결론은 학벌 사회를 내가 바꾸겠느니 그런 건 사실 자신 없는 얘기고 나는 내가 어디가서 학교랑 학과를 얘기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를 소망한다. 남들보다 더 길었던 수험생 시절, 친구들의 미니홈피에 달려있는, 자기가 어디 대학을 다닌다는 것을 과시하는 명문대 클럽 배너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 했었다. 저런 애들은 내세울 게 대학밖에 없는 애들인거라고. (물론 대학만 내세워도 먹고 살 수 있는 정말 엄청난 학벌사회긴 하지만) 그 때 그 배너를 보면서 재수생 삼수생 내가 느꼈던 박탈감과 열등감...그 모든 것들을 사회의 학벌경쟁에서 성공하지 못한 많은 구성원들은 아직도 느끼겠지. 다른 이유가 아니고 그 이유가 학벌이라면 타인이 나를 보면서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 첫걸음으로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한다. 학벌 내세우지 않고 사는 사람이 되지 않기위해. 나 자신을 되도 않는 엘리트의식에서 구해내야 한다.





수업시간에 까뮈의 이방인을 과제로 내줘서 읽었는데
정말정말 재미가 없었다
그냥 주인공이 병신같았다
허무하고
문장의 수려함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서양소설을 별로 좋아하지않는다
번역이 정말 잘된 몇몇을 빼고
별로 감정이 전해지지않는다

한국어로된 소설,시,가사가 좋다
한국어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음

아무튼 이방인 읽고 뭐라도 느낀 것처럼 독후감을 써야했었는데 그게 고역이었다

사실 서양문학 잘 읽지도 않는데 이방인은 참
뭐가 있는가 있는가 싶어서 따라가봤더니 아무 것도 없다해야할까?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읽는 '재미'('웃음'이나 '유머'말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
하여튼 겁나재미없다
내가 멍청해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생떽쥐베리의 야간비행도 읽었다
어린왕자는 어렸을 때 봤는데 야간비행은 정말 시망이었다
안읽혀서 혼났다 번역도 매끄럽지 못하고(원래 문장이 안매끄러운 것일 수도 있다)
암튼 이것도 꽤나 재미가 없었다

서양문학 특히 고전을 읽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좀 봐야겠다
근데 우리나라 현대문학 그러니까 일제강점기때부터 지금까지의 문학 중 고전이라 하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 읽는 재미가 있는데 서양문학은 영 그런 게 없다
그냥 내 개인적 취향인 것 같다

위대한 개츠비도 처음 읽었을 때 이딴 게 왜 고전이야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역시나 정말 재미없었는데


서양문학 중에 재밌게 읽었던 것은 베르나르베르베르의 뇌,신 이거랑
프랑소와즈 사강 맞나 암튼 그 작가가 18살에 썼다는 슬픔이여안녕...놀라운 책이었음
고전같은 것 중에서는 행복한 왕자가 제일 기억에 남는듯

신바람 야구의 얼굴, '스마일맨' 송구홍
[야구의 추억, 예순한 번째] 트윈스 최고의 허슬플레이어

김은식 기자
2007-08-21 22:20



유독 상대팀 선수와 팬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선수들이 있다. 나는 그 중에서 제일 먼저 90년대 초반 LG 트윈스의 3루를 지켰던 송구홍을 떠올린다.


그 시절 내가 응원했던 팀은 돌핀스였다. 그리고 돌핀스 팬들에게 있어서 트윈스는 참 미운 존재였다. 라이벌이어서가 아니다. 라이벌이라면 최소한 상대를 적수로 인정하고 그에게 한 번 이기는 것을 기꺼이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하는 관계를 말한다. 그렇지만 트윈스에 있어서 돌핀스의 도전은 항상 코웃음 나는 일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항상 '내가 아무리 망가진들 너한테 지랴'는 듯 건들거리며 자근자근 짓밟아오곤 했다.


그래서 어느 해건 트윈스에게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이 익숙한 것은 당연했지만, 89년과 94년, '돌풍'이라 일컬어졌던 딱 두 번의 시즌에조차 상대전적에서 트윈스를 넘어서지는 못했던 것이 돌핀스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주먹 불끈 쥐고 찾은 잠실구장에, 어차피 베어스나 타이거즈와의 경기도 아닌 터에 굳이 관심도 없다는 듯 한산한 홈 관중석을 보며 이를 갈던 것이 돌핀스 팬이었다.


그런데 하필 송구홍이라는 선수가 그곳에서 내내 웃고 있었다. 타석에서든, 누상에서든, 혹은 글러브를 잡은 그라운드 위에서든 그는 웃었다. 뽀얀 모래바람 속으로 칼끝 같은 긴장이 교차하는 승부의 그라운드에서, 그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웃어댔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에게 '스마일맨'이라는, 식상한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웃음에 소름이 끼쳤다. 아까운 가운데 밋밋한 직구를 그대로 보내버린 순간, 방망이를 든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이고는 또다시 재미있어 견딜 수 없다는 듯 투수를 응시하며 흘려대는 웃음. 심지어는 한 번 더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가운데 직구에 삼진을 먹고 돌아 나가는 순간에조차 '별 꼴을 다 당한다'는 듯 싱글거리는 얼굴. 마치 앞발로 먹잇감의 목을 눌러놓고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침을 흘리는 맹수 같던 그 살벌한 웃음.


슬라이딩을 즐기는 남자


그는 아주 인상적인 슬라이딩을 하는 선수였다. 진루를 할 때면, 도착지의 대여섯 걸음 앞에서부터 비행기의 랜딩기어처럼 단단하게 땅과 닿은 배를 경쾌하게 마찰시키면서도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마치 비행을 하듯 진로를 가늠하다가, 혹시 먼저 도착한 공을 쥐고 앞에 버텨서는 야수의 글러브가 나타나면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피해나가며 빠른 손짓으로 베이스를 움켜쥐곤 하던 감각적인 슬라이딩.


그는 그런 슬라이딩을 즐기는 듯했다. 그래서 종종 그냥 서서 들어가도 충분할 상황에조차 굳이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강행하곤 했다. 비어있는 베이스를 향해 자욱한 먼지를 날리며 요란하게 진입해서 다시 그 악동 같은 웃음을 흘리며 두 손을 치켜든 뒤로 굴러들던 맥 빠진 송구. 그러면 트윈스를 응원하는 친구들은 '여유 있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며 열광했지만, 나는 구름만 조금 끼어도 비옷에 장화까지 챙겨 신으며 법석을 떠는 성가신 꼬마 녀석을 보는 듯이 못마땅했다.


93년, 해태와의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한 장면은 그에 대한 나의 기억을 가장 결정적으로 지배한다. 한 점 승부처에서 역전타를 날린 송구홍은 외야에서 날아든 무모한 홈 송구가 포수 뒤쪽으로 빠지자 눈을 부라리며 한껏 벌린 입술 사이로는 이를 악문 턱이 당겨져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개 같은 표정으로 득달같이 홈으로 내달렸고, 역시 언제나처럼 대여섯 발을 남기고부터 그라운드 위를 스치듯 날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쯤 짓물러있던 흙바닥에 허리띠 버클이라도 걸렸던지, 한 팔 정도가 모자란 곳에 멈춰버리고 마는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슬라이딩이 필요하지 않았을 상황이었기에 그제껏 공은 날아들지 않고 있었고, 그제야 엉덩이를 조금 들어 올린 채 포복을 하듯 두어 번 허우적거린 송구홍은 홈베이스를 찍고 또다시 만화 속에나 나올 듯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환호했다. 요즘 같았으면 '몸 개그' 시리즈로 인터넷에서 유명세 깨나 탔을 법한 장면이었다.


그는 다른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보기에 얄밉도록 자신감이 넘쳤고, 또 요란스럽게 끓어올랐다. 도무지 구김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그는 야구장에 묘한 흥분을 불러오는 에너지원이었고, 또 여러 가지 이유로 그의 몸짓에 주목하게 하는 존재였다.


신바람 야구의 얼굴


데뷔 2년차였던 92년, 송구홍은 3할대의 타격에 딱 스무 개씩 맞춘 홈런과 도루로 역대 4번째 '20-20'을 달성하며 한대화의 3루수 부문 7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 기록을 저지했다. 그는 그 해 빛나는 선수 중의 하나였고, 또 가장 빛나는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선수였다.


더구나 팀의 상징이었던 김재박과 이광은 그리고 백인천 감독의 황태자 윤덕규를 내보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7위로 곤두박질쳤던 그 해의 트윈스에서 오로지 팬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뿐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93년에도 타격 3위에 오르며, 여전히 어려웠던 팀을 4강에 올려놓은 그는 그대로 트윈스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94년. 그의 운명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해, 어차피 방위병으로 복무하느라 정상적인 선수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허리 부상까지 겹치며 시즌 내내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하는 공백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팀의 타선과 내야진의 핵인 그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아마 채우지 못할 것이라고들 했던 그 해, 팀은 거짓말처럼 우승을 차지해버린다.


94년 트윈스의 우승은, 시즌 전까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호재들의 극적인 상승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우선 데뷔 첫 해 9승 9패로 가능성만 엿보였던 이상훈이 18승을 올리며 에이스로 성장해준 것을 비롯해 김태원과 정삼흠이 오랜만에 함께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하며 15승 이상을 올리는 등 선발진이 안정되었고, 마무리 김용수가 63이닝만 던지고도 30세이브를 올릴 수 있을 만큼 차명석, 차동철 콤비의 허리가 단단하게 가동되었다. 그리고 '한 물 간' 것으로 평가되던 이적생 한대화가 '해결사'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며 '우승 청부사' 노릇을 확실히 해낸 것도 기대 밖의 호재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정작 팬들을 열광시켰던 것은, 바로 지난 2년간 송구홍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핵심적인 근거였던 3할 타격, 20-20, 골든글러브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하나씩 달성해보이며 신인왕 타이틀 경쟁을 벌였던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의 신인트리오 등장이었다.


94년의 송구홍만큼 극적으로 팬들의 관심에서 사라진 스타플레이어도 없을 것이다. 그 해, 트윈스의 야구는 그대로 '신바람'이었고, 지난 두 해 동안 바닥을 기는 팀에서 오로지 외로이 몸을 날리는 투혼과 웃음으로 그 단어를 상징했던 송구홍의 존재는 그리워할 틈조차 없었다. 꽤 많은 트윈스의 팬들조차 트윈스 내야진에 송구홍이 사라진 사실을 쉽게 알아채지 못했던 세월이었다.


송구홍이 자리를 비운 한 해 사이에 모든 것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유지현으로부터 시작해 김재현, 서용빈, 한대화로 이어지는 상위타선에는 빈틈이 없었고, 역시 서용빈으로부터 박종호, 유지현을 거쳐 한대화로 이어지는 내야진 역시 완벽했다. 공수 어느 면에서든 송구홍의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허리부상과 운동부족으로 두 해 전보다 한걸음 물러나있던 송구홍에게는, 버거운 상황이었다.


결정적 실책, 무거워진 웃음


그가 돌아온 95년, 한대화가 지명타자로 주로 나서기 시작했지만 3루수 자리에는 이종열이라는 뛰어난 신인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송구홍은 후배와 3루수 자리를 나누며 때로는 유격수 유지현의 뒤를 받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 해 그는 시즌 경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57경기에서 간신히 2할6푼의 성적을 올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 번 꺾이기 시작한 신바람이 다시 불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 해 플레이오프에서 나왔던 결정적인 실책은 그의 선수생활에 또 다른 변곡점이었다.


전년도 우승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던 트윈스는 95년에도 역시 최강의 전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더구나 그 전력의 핵들이 데뷔 2, 3년차의 싱싱한 젊은 선수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에서 타이거즈의 시대였던 80년대를 지나 90년대 중후반은 트윈스의 시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였다.


그 95년, 막판 베어스의 '뚝심'에 일격을 당하며 1무승부 차이로 2위로 밀린 트윈스는 간단한 통과의례처럼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를 치러낸 뒤 한국시리즈에서 베어스에 설욕하리라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김상진과의 역사적인 에이스 맞대결에서 3전 3승을 기록하며 20승에 오른 이상훈의 기세를 생각한다면, 그 순간까지도 그 해 역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가 트윈스였음은 분명해보였다.


그러나 플레이오프가 시작되자마자 승부의 물길은 엉뚱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1차전에서는 '20승 투수' 이상훈이 시즌 내내 단 한 개의 홈런도 없었던 2할대 초반의 롯데 타자 강성우에게 2회에 3점 홈런을 얻어맞으며 맥을 풀어놓았다. 그날만큼은 '크레이지 모드'였던 강성우는 포수 수비에서도 결정적인 블로킹 세 개를 기록하는 동시에 다시 10회초 2타점 결승 적시타를 터뜨리며 거의 혼자 힘으로 승리를 챙겨냈다.


따라서 노장 정삼흠, 한대화, 노찬엽, 김영직의 수훈으로 2차전을 따내 균형을 맞추는 데 성공한 트윈스에게 3차전은 굉장히 중요한 한 판이었다. 특히 한국시리즈 직행을 노리고 시즌 막판까지 다소 무리한 운영을 했던 트윈스로서는 먼저 2승을 따내 우위를 점하는 것이 투수를 비롯한 선수운용 면에서 반드시 필요했다. 여기에다 1차전 패배가 단지 우연일 뿐이었다는 점을 스스로 확인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10월 6일. 경기는 부산 사직으로 옮겨졌고, 3-3으로 팽팽하던 7회초에 터진 김재현의 홈런과 서용빈, 한대화의 연속 2루타로 신바람에 불을 댕기며 석 점을 달아난 트윈스는 부산 팬들의 열기를 등에 업고 곧장 치고 올라온 자이언츠의 7회말 1사 만루 상황만 넘기면 한국시리즈와 우승으로 향하는 길이 보일만한 고개까지 이르고 있었다. 타자는 마해영, 투수는 김용수였다.


2-3 풀카운트. 데뷔 첫 해 김민호를 밀어내고 4번을 꿰찬 마해영의 기세가 거칠었지만, 이런 날카로운 상황은 김용수의 전장이었다. 마해영은 긴장했고, 김용수는 침착했다. 김용수의 결정구는 몸 쪽 유인구였고, 생각지 못한 코스에 허겁지겁 휘두른 배트에 맞은 공은 3루 베이스 바로 곁에 서있던 송구홍 쪽으로 날아갔다. 송구홍이 바로 오른발을 뻗어 베이스를 찍고 1루로 던져 빠르지 않은 타자를 잡는다면 자이언츠의 만루는 그대로 잔루로 전락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불타오른 의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금씩 밀려나던 시간의 조바심 때문이었는지 송구홍은 공을 곧장 홈으로 던졌고, 긴장으로 굳은 어깨에서 뿌려진 공은 지레 기대를 버린 채 꼿꼿이 서서 홈으로 들어서던 3루 주자 김민재의 등을 맞히고 말았다. 공은 결국 엉뚱한 곳으로 한참을 흘러갔고, 그 사이 3루에 도착해있던 전준호마저 홈을 밟으며 경기의 흐름은 결정적으로 자이언츠에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결국 7명의 투수를 투입하며 승부수를 띄웠던 트윈스는 9회말 김응국의 3루타와 김선일의 끝내기 안타를 맞고 주저앉았고, 이후 4차전과 6차전을 다시 내준 끝에 정말 아깝게도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놓치고 말았다. 최강의 젊은 라인업을 가지고도 90년대 내내 더 이상의 우승신화를 써내려가지 못한 트윈스의 역사 역시 그 순간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면, 조금 지나친 상상일까.


그 이듬해에도 송구홍은 웃으며 그라운드에 나섰다. 그러나 더 이상 그의 웃는 얼굴을 놓고 시비를 거는 이도, 또 핏대를 세우며 환호하는 이도 없었다. 그는 그저 한 때 잘 나갔던, 그리고 꽤나 열심히 뛰는 한 명의 선수였고 그 이상은 아니었다.


98년, 그는 이종범이 일본으로 진출하며 얇아진 내야를 보충해야 했던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했고, 그곳에서 2할9푼에 가까운 타율로 재기하는 듯도 했다. 그러나 넘치는 의욕이 무리가 되었는지 재발한 허리부상 때문에 막판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99년, 선수장사로 연명하며 '가치 있는 선수'와 맞바꾸어진 '무늬만 선수'들로 선수명단의 칸을 채워가던 마지막 순간의 쌍방울 레이더스로 폐기처분되듯 던져지는 순간, 그의 선수생명은 사실상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듬해인 2000년, 그는 친정팀 트윈스로 돌아왔다. 물론, 팀이 그의 재기가능성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해 고작 11경기에 교체 투입되어 단 4개의 안타만을 기록했던 그에게 은퇴를 준비할 시간을 준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라운드가 아닌 더그아웃에서나마, 그는 웃고 소리 지르고 박수치는 '산소발생기'로서 팀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존재였고, 그 에너지를 인정받은 그는 코치로서 팀과 함께할 기회를 다시 부여받았다.


너는,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 항상 최고 인기 팀 자리를 다투는 트윈스라는 팀은, 그러나 나처럼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팀은 아니었다. 구김살 없고 당당한, 그래서 지켜보면 시원시원한 팀. 그래서 서용빈의 세련된 옷차림과 김재현의 미사일 같은 홈런포의 궤적, 그리고 송구홍의 거침없는 웃음으로 기억되는 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화려했던 신바람의 시절을 지나 몇 해째 '중흥'과 '회복'을 부르짖는 침체기에 돌아보면 또 다른 것이 떠오르곤 한다. 무리한 훈련으로 항상 부르터있던 서용빈의 손바닥, 유지현의 머리와 김재현의 무릎을 괴롭혔던 통증과 도전, 그리고 95년 가을 이후 묵직해져있던 송구홍의 웃음. 그들을 키워왔던 속살의 성장통과 드라마와 감동이 꼴찌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부상과 이른 퇴장은 프로선수의 직무유기다. 오직 몸으로써 최고의 플레이를 선보이며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임무로 하는 운동선수에게, 너무 일찍 닳아버린 몸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 혹은 그보다 더욱 난감한 막막함이나 무료함 앞에 서서 '허슬 플레이어의 몸짓'을 떠올린다.


그들은 안도현 시인의 시 구절처럼 '너는…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중에서)는 질문을 온몸으로 던져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