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10&oid=469&aid=0000166457&viewType=pc
부르주아의 건강성이라는 것을 세상은 너무 맹신한다. 윤리마저 금수저에게만 허락된 사치쯤으로 여기며 가난한 이들의 도덕의지를 멸시한다. 결핍 없는 삶이 부여한 넉넉한 인심과 꼬인 데 없이 해맑은 영혼이 어떤 부르주아들에게는 있다. 그렇다고 프롤레타리아의 건강성은 존재하지 않는가. 기자로서 나는 가난이 굴복시키지 못한 인간의 존엄과 품격을 증거하며 윤리가 부의 산물인 양 거들먹거리는 자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 책임을 느낀다. 어제의 가난이 오늘의 가난을 예고하고, 오늘의 가난이 내일의 가난일 수밖에 없는 이 출구 없는 터널에서 어쩌면 그것은 종교적 체념이거나 정신승리이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가난해서 죄송한 세상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다.
취업 시즌이다. 아직도 ‘느그 아부지 머 하시노?’를 묻는 입사지원서가 수두룩하다. 이것만이라도 못하도록 블라인드 면접을 의무화해야 한다. 수저결정론의 공고한 터널에 작은 구멍이라도 하나 내야 한다. 가난이라는 게 젊어 한때는 사서도 할 만한 일시적인 것이어야 우리는 미당의 시를 읊을 수 있다. 지금 나는 자꾸만 미당에게 화가 난다.
- 기사 중에서
"너희 집 어떡해."
내게 가난은 친한 친구의 입을 통해 처음 다가왔다.
수능이 몇 주 남지 않았을 때 우리 집은 망했다. 엄마 아빠는 내가 신경쓸까 소식을 숨겼다. 하지만 친구 엄마를 통해 친구 귀에 소식이 들어가게 됐고, 친구는 내가 모를 줄 모르고 날 걱정해주었다. 부모님 마음을 알 것 같아 나도 수능을 볼 때까지 집이 망한 걸 모르는 척했다.
아빠는 그 후로도 몇 년동안 직업을 구하지 못해 집에 있었다. 엄마는 베이비시터 자격증을 따서 일을 하다 손목 터널 증후군이 생겨 수술을 했다. 부모님이 빈 손으로 결혼한지 20년만에 겨우 장만했던 32평 아파트는 날아갔고, 차도 바뀌었다. 전에도 딱히 잘 살았던 적은 없지만, 집은 급격하게 가난해져 갔다.
세간 사람들 말대로 가난은 내게 결핍을 만들었다. 자꾸만 마음에 구멍을 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마냥 밝아서 웃음 소리가 너무 크다는 지적을 받으며 살았는데, 이제 술만 마시면 처지가 슬퍼 눈물이 났다. 나는 점점 자신감이 사라지고, 열등감이 생기고,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일을 더 열심히 하고, 번 돈을 열심히 쓰고, 내 발로 상담소를 찾아가 약한 마음을 다독이며 열심히 살았다. 사회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가난한 것은 아니라서, 가난은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처음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술 마시며 '가난 배틀'을 한 적도 있으니까. 가난한 게 내 탓도 아니고, 평생 성실히 살아온 부모님 탓도 아니고. 그래서 친한 친구들에겐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우리 집 망했어,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그만 둘 수가 없어. 처음 가난했던 때의 나는 이 가난을 안고서도 열심히 살아간다면 사람들에게 인정 받을 수 있을거라 기대했다.
기대는 금방 깨졌다. 많은 사람의 시야엔 가난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
"여러분. 방학엔 알바말고 책을 한 자 더 읽어요. 학생은 공부를 해야지, 괜히 돈 몇 푼 번다고 알바하지 말고."
진보 좌파 운동을 열심히 하던, 좋아하던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말했다. 교수님은 당신이 그런 말을 한 걸 기억도 못하시겠지만,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 날 이후로 교수님을 싫어하게 되었으므로. 그래. 우리 학교에 다니는 당신의 아들은 방학에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되겠지. 교수님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학기 중에 책을 읽기 위해 방학엔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하는 학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희 집 진짜 수입이 0원이라고? 너 등록금 어떻게 내? 말이 되냐 그게?"
엄마와 아빠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집에 있을 때, 동아리방에서 설문조사 용지에 '가계 월수입'을 기입하고 있는 걸 옆에서 지켜보던 선배는 물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가난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했던 나는, "진짠데요."라고 대답을 했다. 토익이 700점도 안되면서 부모님 빽으로 금융 공기업 인턴을 했다며 으스대던 그 선배는 차마 알 수 없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집이 경매에 넘어가서 마찬가지로 경매에 넘어온 이촌동 집에 잠깐 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사정도 모르고 내가 이촌동에 산다며 나를 다르게 대했다. 그 때 알았다. 강남이나 이촌동 같은 부촌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인지.
"어디 살아요?" "이촌동이요." "우와~"
처음 알게된 사람들은 물론, 알던 사람들도 내가 이촌동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자 부러워 했다. 알던 사람들에겐 왠지 속이는 기분이 들어서, "아냐 다 빚이야. 원래 집이 경매 넘어가서 온거야." 라고 솔직히 말을 해도, 내가 웃으며 말한 탓인지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이촌동이잖아!"
내가 여자친구 이촌동 산다니까 애들이 다 엄청 부자동네라 하더라."
이촌동에 살 때 만나게 된 남자친구는 나대신 우쭐해하며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을 잘 모르던 애였다.
"아니야. 우리 집 완전 거지야. 망해서 여기로 이사온 거야."
솔직하게 말해도 남자친구는 대수롭게 듣지 않았다.
친구들은 우리 동네에 놀러오고 싶어했고, 이촌동 맛집을 알려달라 했다. 이게 내 것이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우리 집은 여전히 가난했지만, 그래도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릴 땐 바람이 시원했다.
잠시 이촌동에 살며 나는 가난은 숨기는 게 훨씬 좋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더이상 가난해보이지 않는 내 앞에서 사람들은 쉽게 진심을 말했다.
"가난한 애들은 그늘이 있어서, 억척맞고 구질구질해."
"못사는 동네 사람들은 교양도 없고, 매너도 없어."
"고생 안해보고 산 애들이 성격도 좋지."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나는 가난 때문에 인성도 의심 받아야 했다. 가난해도 꿋꿋이 살아가는 캔디를 대견하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은 드라마 속에만 존재하는듯 했다. 가난한 애들은 촌스럽고, 취향도 없고, 억척 맞고, 교양도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다고 했다. 나는 내가 가난하단 걸 혹시라도 알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저렇게 볼까봐, 내 가난을 꾹꾹 눌러 담았다. 가난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까 조마조마했다.
"넌 가난한 거 거의 티 안 나. 모르고 보면 모를걸?" 절친한 친구의 말이 고마웠다.
내가 가고 싶어 하는 좋은 직장에서 인턴한 친구가 말했다. 친구는 강남에 살았다. 같이 뽑힌 동료도 강남에 사는 애였는데, 그 둘을 불러 놓곤 팀장이
"솔직히 너네 사는 곳 보고 뽑았어. 원래 강남살고 고생도 안해본 애들이 성격도 모난 데 없고 둥글둥글하거든."
이라 했다는 거였다. "정말?" 놀라 묻는 내게 친구는 다른 대기업 인사팀에 있는 오빠도 같은 말을 해주었다고 말했다.
"오빠가 취업하고 이사가라고 하더라. 회사에서 강남 사는 애들 선호한다면서."
친구는 그 회사 수준에 실망했다며 이 얘기를 해줬지만, 나는 역시 가난은 숨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말을 들은 날, 나는 지금 집 주소를 숨기고, 이사온 지 2년이 지난 전 집 주소를 입사 지원서에 적어 넣었다.
그게 고작 며칠 전 일이다.
그래서 기사를 보자마자 펑펑 울었다.
난 가난해도 쉽게 주눅들지 않으려 바둥거렸던, 알바하며 열심히 살았던 내 과거가 훈장은 못돼도 흠은 되지 않을 거라 순진하게 믿었는데 내가 만난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단 사실 하나만으로 심사가 꼬여있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부자를 질투하고, 결핍이 있어 다른 사람과 융화되지 않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가난해봤기에, 가난한 사람, 힘든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람들의 결핍에 마음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낼 것이다.
고마운 글을 써준 기자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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