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는 오래된 것들에 대해 소중함을 갖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규칙이라도 가진 듯이. 특정한 공간에 쌓인 무형의 추억들은 때로 너무 쉽게 무시된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늦게 변하는 사람이나 변하지 않는 사람은 남겨진다. 상처를 덜 받기 위해서는 먼저 변하고 먼저 떠나야 한다. 변하지 않는 사람들은 남겨져서 상대의 뒷모습이나 바라보아야 할 뿐.

홍대 앞 30년 전통의 빵집이 오늘을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대기업 때문에 사라지는 동네 빵집인지,비싼 귀족빵집이었기에 사라진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30년동안 한 자리를 지킨 무언가가 사라지는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 무섭다. 오시오 떡볶이가 사라진다면, 거북이 놀이터가 사라진다면, 너와 내가 걸었던 그 길이 사라진다면. 아직 변하지 않는 상도동이 고맙다. 그러나 서울에 추억을 쌓는 것은 여전히 무모하다.

언제나 늦게 변하는 사람이라 힘들다. 물건도 관계도 웬만큼 깨지고 더러워져도 버리지 못하는 미련퉁이라 힘들다. 세상은 변화를 강요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전제가 가끔 너무 버겁다. 변치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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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습 3일차에


순간을 믿어요                                 songs / lyrics /언니네이발관

한 마음 둘이 되어 거침없는 슬픔 찾아오네
이제와서 꿈속을 헤매어본들 어디에도 너는 없을 거야
I saw something 너의 달콤했던 말 I saw something 너의 영원한 미소 그리워
이 순간들을 다시 헤아려보니 그래도 내게 기쁨이 더 많았어
영원한 것은 없다 생각하지는 말아요
우리 기억속에 남은 순간을 믿어요

한 마음 둘이 되어 달콤했던 순간 사라지네
이제와서 꿈속을 헤매어본들 어디에도 너는 없을 거야
I saw something 너의 달콤했던 말 I saw something 너의 영원한 미소 그리워
이 순간들을 다시 헤아려보니 그래도 내게 기쁨이 더 많은 날이었어
나 항상 너를 뺏길 것 같아 애써 모든 일들을 가리려고만 했지
그 아픈 속을 다시 헤아려보니 그래도 내게 기쁨이었었네
i saw something 너의 달콤했던 말 i saw something   (너의 힘을 낸 고백)
i saw something my peach be alive 이제 모두 영원한 순간이 되려하네

 



역시 엉망인데 이것도 그냥 자기만족 
이건 노래부르면서 못치겠다 어려워서. 근데 재밌다.
기타 잘치는 사람들은 얼마나 재밌을까. 나도 잘 치고 싶다.
그리고 좋은 노래들은 의외로 쉬운 코드 몇 개로 되어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simple is best!

이 연주에선 내 급한 성격과 불안한 감정이 묻어나는 것 같다. 기타를 못쳐서 칠 때의 마음 상태가 더 잘 드러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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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버전 


 나른한 버전 
 
상아 songs / lyrics / 조휴일 

 
상아 너의 차는 땅 속에서 멈췄고
너는 작은 불에 이성을 잃는 노랑나방처럼 퍼덕이지만
나는 물지 않는 벌레도 너무 쉽게 죽여 콧노래를 부를 여유도 있어 
상아 아직 붉게 물든 머리로 
나는 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냥 순수하게 받아들여줘 
나는 한 손으로 갈겨 쓸 싸인 조차 없어 콧노래를 부를 여유는 있어 
너는 좀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어 
너는 음악보단 엄마 말을 들어야 했어 
난 진심으로 널 걱정해 너의 우물 속에 물이         
찰까 새벽까지 잠도 못 잤어 no-oh.



 완전 못치는데 내가 이걸 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난 좋다 
그냥 자기만족.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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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독립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때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혼자 식당에서 밥을 아무렇지 않게 잘 먹을 수도, 애인이 없어도 하나도 안외로워 할 수도, 말없이 혼자만의 비밀이 많을 수도... 그런 일련의 특성들중 어떤 것이 부각되면 독립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나에게 있어서 독립적이라는 이야기는 굉장히 칭찬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독립적인 사람들을 동경하고, 분수에 맞지 않게 독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을 질투한다. 어쨌든 언젠가부터 독립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중이다. 혼자 밥 잘 먹은지는 꽤 오래됐고, 혼자 영화관 가기, 혼자 미술관 가기에 이어 곧 한 달동안 혼자 여행을 갈 계획이다. 그런데 사실 독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데에 있어서 이런 것은 표면의 조건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이 독립적이냐 독립적이지 않느냐는 결국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지느냐 책임지지 않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생각보다 한 입이 먹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먹고 살 걱정 앞에 섰을 때 그 사람이 독립적인지 독립적이지 않은지 드러난다. 독립적인 사람이라는 좀 멀쩡해보이는 라벨의 가치에 비해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건 그다지 녹록치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러니 알바 한 번 안해보고 돈받아쓰는 주제에 나는 독립적인 사람 운운하는 그 입 닥치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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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히틀러와 나치를 엄청 무서워했다 열맞춰서 걷는 그 모습이 엄청 공포다 콧수염도
중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쥐라는 만화책을 읽었는데 나치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것도 되게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애써 정제하지 않으려 한다 이 고단수를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해 거만한 얘기일까? 결국 네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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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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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만들어놓은 좋아하는외국인모음.jpg
친구랑 얘기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외국인들한테 비슷비슷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한 눈에 보려고 만들었다.
휴그랜트, 짐파슨스, 폴 매카트니.
짐 파슨스는 미국사람이긴 하지만 난 뭔가 영국남자 스타일을 좋아하는 듯. 근데 정작 영국은 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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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쉬운 것에는 대가가 있을 것이다
하는 생각 혹은 편견.

그것이 날로 더해가는 기술의 발전을 거부하고 싶은
알 수 없는 내 요즘 심정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다들 예찬하는 그 트위터의 그 잘난 소통 그리고 스마트폰의 편리함 이런 것들이 너무 쉬워서 어려워보인다. 단지 내가 반골이라서? 그런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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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트위터를 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하지않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
스마트폰이 엄청난 속도로 보급되면서 트위터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트위터의 새로운 미디어로서의 기능에 대해 예찬하고 있다.  
대다수가 하는 말엔 딴지걸고싶은 내 특유의 삐뚤어짐때문인지 나는 또 딴지를 걸고 싶어졌다.

 우선 나 말고 트위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주위에는 트위터를 하지 않겠다는 트위터 반대파도 꽤나 있는 듯하지만 그들이 트위터를 왜 안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이유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에 '트위터를 하지 않는 이유'라고 검색해보았다.
세 건의 관련 글과 한 건의 관련 기사를 발견했다.

 그 글들을 모두 읽어보았는데 그중 한 건의 글이 눈에 띈다.
조선일보 문화부 한현우 기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이다. 제목은 '내가 트위터를 하지 않는 이유'
(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userId=hwhan&logId=5243656)
대강 요약하자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일상적 넋두리를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하는 것도 웃길 노릇이고, 트위터를 하면 정제되지 못한 글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위험이 있는데 그게 싫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현재의 삶을 살기에도 바쁘다는 그런 내용이다 여러 모로 공감이 되었다.
(사족을 붙이자면, 사실 조선일보 기자의 글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통 때 같았으면 '느리고 불편하게 사는 법'이라는 블로그 제목에도 진정성이 없다고 속단해버리면서 글조차 읽지 않았을테지만 한현우 기자는 내 언니의 꽤 어렸을때부터의 지인이라 들은 바가 있어 조선일보 기자라는 집단에만 범주화되는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끝까지 읽었다)  

 무튼 내 이유도 한현우 기자가 쓴 트위터 안하는 이유랑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내나름대로 이유를 다시 써보자면

  가장 걸리는 것은 사생활 침해 문제.
 사실 애초부터 트위터를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작년 초쯤 트위터에 큰 관심을 가졌었다. 실제의 친구들은 아직 아무도 트위터를 시작하지 않았을 때였는데 계정을 만들고 혼자 이런 저런 사람들을 팔로잉하면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트위터의 성격을 잘 몰랐던 것인지, 구글에 내 아이디를 쳐보고는 깜짝 놀랐다. 실시간으로 내가 올리는 트윗이 구글 검색결과에 가감없이 뜨고있었기 때문이다. 소름이 돋았다.
내가 사생활이나 개인정보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한 것일까. 나는 온라인상에 내 정보가 검색만 하면 우루루 뜨는 것이 너무 싫다. 그래서 미니홈피도, 블로그도 그 생각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하고 있다. 
내가 그때그때 생각한 별것 아닌 단상들이 나를 모르는 불특정다수에게 보여지는 것이 싫다. 그렇다고 트위터라는 매체는 블로그와는 달리 나의 실제 신분을 드러내지않고 운영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 같고.
 
 트위터를 실제로 하면서 느낀 이유는 저 이유지만 친언니가 팔로워수 1000명이 넘는 트위터리안인지라 옆에서 지켜보면서 느낀 트위터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들은 더 많이 있다.

 우선 트위터라는 곳의 특성상 정부,여당을 까는 트윗이 꽤나 된다.
그게 맘에 안드는 건 아니다. 나는 진보신당 지지자고 어렸을 때부터 집에 널린 노엄촘스키, 한홍구, 강준만 뭐 이런 사람들 책 읽으면서 좌파빨갱이 소리 수도 없이 들으면서 자란 사람이다.
 근데 요즘의 트위터를 보면, 정부나 여당까는 게 그냥 트렌드같은...'너,나 모두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가벼운 스포츠'처럼 되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어차피 내가 팔로잉하는 사람의 글만 보이는 것이니, 정부를 싫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앉아 내내 정부욕만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한나라당과 삼성등등 기득권세력들은 시시각각으로 상식을 뛰어넘는 잘못을 해대니까. 수많은 트위터리안들이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주는 그들의 잘못들을 보고 앉아있으면, 열받아서 머리가 돌아버릴 것이다. 옆에서 언니가 트위터하면서 읽어주는 그 트윗들만 들어도 짜증이 확나니까. 어랏, 정치혐오의 시작인가?


 또, 매체의 발전에 대한 의심이랄지 거부감도 트위터를 하기 싫은 데에 한 몫 한다. 컴퓨터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서로 낭만적으로 시를 써서 편지로 보내지 않고, 여가시간에 책을 읽기보다는 인터넷으로 글들을 읽고, 사람을 실제로 만나는 대신 싸이월드로 안부를 전한다. 난 이미 그 생활에 물들어버렸다. 내 하루중에는 실제로 사람을 보는 시간보다 컴퓨터 화면을 마주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난 자제력도 없다. 그래서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미 상자를 열어버린 지금의 현실이 맘에 안든다. 컴퓨터를 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타 실력도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고, 손글씨도 지금보다는 예뻤을 것이고, 책도 지금보다는 많이 읽었을 것이다. 사람도 더 많이 만났을 것이다. 지금보다 내 맘에 더 드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폰도, 트위터도... 생기고 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손안의 컴퓨터라는 스마트폰까지 생겨버린다면 컴퓨터를 하지 않는 시간에도 손안의 컴퓨터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메신저로도 모자라 스마트폰 속의 카카오톡인지 뭔지로 얘기하는 시간이 늘어나겠지. 하루종일 트위터 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겠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카카오톡으로 대화나누는 소통이, 트위터로 천 명과 하는 소통이 과연 진정한 마음의 위안이 되고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소통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부정적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거고 그들이 트위터를 하고 스마트폰을 사겠지만.
  무튼 트위터를 하기에는 나는 책읽고 영화보고 글쓰는 나만의 시간과 실제 친구들을 만나서 술한잔 마시면서 하는 소통이 더 소중하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글을 쓰다보니 두서가 없고 글이 길어졌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도 다 못 쓴 것 같고...글을 간결하게 쓰고 싶은데...수정을 여럿 거치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것마저 귀찮다. 대강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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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알려줘서 하게 된 철학성향 테스트
꽤 재밌다. 결과에 나온 동양철학자들은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서양철학자들을 보니 나름 잘 맞는듯!
언제나 난 나자신을 쾌락주의자라고 주장해오면서
루소의 팬이엇음...테스트를 하면서도 투덜대면서
자유의지문항에서 루소는 없어? 다 맘에 안들어
했는데 딱 루소가 나와서 신기하다!
다음은 철학성향테스트! 결과를 보고 해당되는 책을 찾아보면 겨울이 금방갈듯!





아래는 내 테스트 결과!




서양편


지혜로운 현자
| 지혜, 직관, 감수성, 우정
육감과 영감을 중시하는 당신은 원효대사 타입! 해골물 한 사발 들이켜고 불현듯 깨달음을 얻는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강력한 ‘촉발’이다. 어느 순간 닥쳐오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좋아한다는 말이며, 직관력이 좋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직관력’이 단순히 ‘감’(感)이 아니고(“이건 여자의 육감인데” 할 때의 육감은 더더욱 아님), 직관력이 높다고 해서 사고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안 했던가? 고차원적 직관은 고차원적 사고와 포개어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이 부류의 철학자들은? = 에피쿠로스, 루소, 니체, 바타유
『철학 vs 철학』에서는?
3장 행복한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4장 사유재산은 정당한가? 로크와 루소
11장 내가 죽은 뒤에도 세계는 그대로 존재하는가? 칸트와 니체
13장 망각은 인간에게 불행인가? 피히테와 니체
14장 에로티즘은 본능적인 것인가? 쇼펜하우어와 바타유
에피쿠로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도덕 윤리 교과서에서 '쾌락주의자'라고 표현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쾌락'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이었을까? 결코 아니다. 일례로 에피쿠로스는 "나에게 작은 치즈 단지를 달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대한 잔치를 벌일 테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의 '쾌락'은 절제와 검소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영혼의 만족'이란 방탕과 만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관해 이야기할 때 두번째로 유명한 이야기는 '에피쿠로스의 정원'과 관련된 일화이다. 그의 정원에서는 그 시대에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던 여성, 아이, 노예들까지 모두가 '우정'에 기초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계층과 계급의 사람들을 한데 묶고 교류하게 만드는 이 상황을 하나의 '우발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절제의 쾌락과 우정의 공동체, 어떤가? 이러한 그의 활동을 볼 때 책상머리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는 근대적 학자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는 어떻게 하면 영혼의 만족을 얻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지혜로운 자, 즉 현자에 가깝다.
[관련된 책]
루소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소설가. 역시 상식에 비춰보자면, 루소가 이 범주에 들어간 것은 의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루소야 말로 '지혜로운 현자 타입'에 아주 적절히 들어맞는 사람이다. '지혜'에는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현자'임이 분명하다. 정치적인 행보는 논외로 하고, 그가 말년에 쓴 『어느 산책자의 고독』이라는 글에서 보이는 일화를 보면 단박에 느낄 수 있으리라! 산책 중에 그를 향해 달려오는 개와 부딪혀 기절한 후, 깨어나서 쓴 글이다.
"순간 처음 느낀 것은 기쁨이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태어났으며, 마치 내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내 연약한 존재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현재의 순간에 빠져들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중략)… 내 존재 전체가 대단히 놀라운 평온함을 느꼈는데, 그때의 느낌을 떠올릴 때 마다, 나는 우리 삶의 모든 즐거움 가운데 이와 비견할 만한 것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찾을 수 없었다." (『죽은 철학자들의 서』루소 편에서 재인용)
돌진하는 개와 충돌하는 경험도 드물거니와, 그 경험으로부터 현재, 지금-여기의 영원성을 경험하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일 것이다.
[관련된 책]
바타유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작가·사상가. 평생을 에로티시즘에 천착해왔다. 왜 그랬을까? 그는 생산과 축적을 강조하던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제한경제'라는 용어로 부른다. 반대로 순환과 선물 경제에 기초한 경제를 '일반경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는 생산과 축적의 과도한 지향은 체제에 에너지 과잉을 불러오고, 이 과잉은 결국 불유쾌한 파멸을 부를 것이라고 말한다. 공황이나 전쟁이 아마 그런 파멸의 선례들일 것이다. 에로티즘도 이런 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인간의 에로티즘은 단순히 종족보존 본능이나, 성욕해소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사치, 소비, 상실, 금지의 가치를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관점에 비춰 볼 때, 그는 '소비사회'를 이야기한 보드리야르의 정신적 지주라는 말은 납득이 가고도 남는다. 무엇보다 그가 이 부류의 철학자로 분류된 이유는, 그의 사고방식이 기본적으로 면밀한 분석과 객관화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과 직관적 통찰에 의존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에로티즘에 관한 책(『에로티즘』(민음사)), 무신론자로서의 입장을 유감없이 드러낸 책(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패러디한 『무신학대전』을 썼다.
[관련된 책]
니체
독일의 철학자. 니체를 표현하면서 '독일의 철학자'라고만 말하는 것은 얼마나 멋대가리 없는 짓인가? 그는 차라리 '시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그의 책들에는 풍부한 역설과 은유가 넘쳐난다. 그가 가상의 자서전으로 썼던 『이 사람을 보라』는, 제목부터 그가 평생에 걸쳐 대결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이 사람을 보라'는 예수를 사형시킨 로마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가리키며 한 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신착란조차도 생生의 긍정성으로 작용하도록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해냈다. 모든 초월성, 창조와 종말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고 말하면서, 영원회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당대에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그의 사상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300년 후 쯤엔 내 생각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게다." 또는 "어떤 사람은 죽은 후에야 태어난다."라고 말이다.
[관련된 책]






동양편


자유로운 아나키스트
| 자유, 깨달음, 자연주의, 생명
"세상을 위해 내 몸에 터럭 하나라도 내놓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타입. 질서니 법칙이니 하는 말에 근본적인 거부감이 있다. 고정된 가치 기준이 없는 당신의 사유는 탱탱볼 마냥 어디로 튈지 모른다, 주의할 것은 한가지! 어떤 진리도, 근본 법칙도, 권력도, 국가도 몽땅 업수이 여기다 보니 '허무주의'에 빠져 몸을 버릴 수 있다. 모든 기성질서를 내려놓고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법을 익혀라! 이 타입의 동양사상가는? = 혜능, 양주, 왕충, 범진
『철학 vs 철학』에서는?
9장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가 가능한가? 양주와 한비자
11장 모든 일에는 절대적인 필연성이 존재하는가? 동중서와 왕충
12장 정신은 영원한 것인가? 혜원과 범신
14장 수양하려는 생각도 집착일 수 있을까? 신수와 혜능
혜능
육조 혜능이라 불리는 이 사람. 무려 1300년 전에 살았던 불교계의 대스타다. 그런데 '육조'는 왜 '육조'인 것일까? 그것은 그가 속했던 교단인 '선종'의 6대 조사라는 의미이다. 불교에는 크게 세가지 교파가 있는데, 율종, 교종, 선종이 그것이다. 율종은 계율을 중시하고, 교종은 자기 수양[참선]을 중시한다. 마지막으로 선종은 혜慧라는 글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혜', 지적인 통찰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율종은 우리에게는 약간 낯설 수도 있는 것이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생활의 미세한 부분까지 간섭하는 유학의 영향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아마도 민중들에겐 '계율'피로증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율종이 영향력을 확대하지 못하고 당나라 때까지 교종과 선종의 양립체제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혜능은 선종이 교종보다도 훨씬 더 영향력을 확대하던 시기에 활동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돈오)를 강조하고, 깊은 산 속에서 선문답을 나누는 선종의 오랜 전통에 비춰볼 때, 그가 이 부류로 분류된 것은 꽤 적합하다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사상적으로도 그는 '마음'의 실체성을 부정하였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신수의 주장에, 없는 마음을 어떻게 닦느냐며 응수할 정도로 고착된 생각, 정주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관련된 책]
양주
기원전 400년, 동양철학사에서 흔히 '선진시대'(先秦時代)라고 불리는 시기에 활동한 철학자다. 『맹자』 <진심>盡心편에 그의 사상의 일면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글귀가 전해진다. "양주 선생은 위아爲我의 입장을 취한다. 자기 몸의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아는 일을 하지 않는다."가 바로 그것인데, 사실 맹자는 비난조로 적었지만, 우리까지 그러한 태도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어떤 주장이란 늘 다양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전란으로 천하가 황폐해지고, 백성은 나날이 굶주리던 시기에 양주는 생명을 온전히 보존하고 명예, 재산, 이념 등으로 자신의 몸을 얽어매는 당대의 각종 사상과 정치적 규칙에 반대하면서 위아의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양주가 보기에는 천하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외물外物(부, 명예, 권력)에 휘둘리기 때문에 전쟁이 끊이질 않는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에 비춰 보자면, 진정 중요한 것은 사람이 각자의 자유에 따라 각자의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이다. 국가, 권력, 명예, 부와 상관없이 말이다. 이 부류의 철학자들 중에서도 양주가 가장 급진적이지 않을까 싶다.
[관련된 책]
※ 양주가 직접 저술한 책은 전해지지 않으나, 『열자』『맹자』 등에 그가 가진 사상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왕충
중국 한나라 시대의 유명한 학자이다. 어릴 때부터 고향마을을 주름잡는 천재였다고 한다. 8살 때는 논어와 서경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었고, 15세 때에는 당대의 메트로폴리스 낙양으로 가서 유학의 경전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했던 성장환경 덕에 급진적이고 과격한 정책들을 내는 그는 결코 중용된 적이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다행일 수도 있는 것이, 중용받지 못하다보니 더욱 공부에 매진하였고, 지금까지 이름을 남긴 대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상은 유물론적인 것으로 유명한데, 인간은 자연에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도 관철시킬 수도 없으며 오직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에 자신을 적응시킬 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지이다. 그러다보니 그의 사유에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무신론적인 성격도 발견된다. 자연이 객관적 존재이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인간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때 용龍의 자손인 황제의 신성도 별것 아닌 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논리에 당대 지배층이 식겁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 천재이면서 반골인 경우, 그리고 반골을 반골이 되게끔 만드는 경우가 바로 왕충의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주의! KOEI사의 유명한 게임 삼국지에 나오는 '왕충'과는 다른 인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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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진
인간이 죽은 후에는 무엇이 남을까? 범진은 생명이란 몸과 마음의 결합체로 보았다. 그리곤 날카로움과 칼날의 비유를 들어 칼날이 사라진다면, 날카로움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몸이 없어진다면, 영혼 또한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그는 400년경 활동했던 사람으로 영혼불멸론을 주장했던 혜원에 맞서 신멸론(神滅論)을 주장한 사람이다. "죽은 뒤에 영혼이 어찌되든 뭔 상관이람" 할 수도 있지만,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주장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조건에서 가령 죽은 뒤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유교적 전통의 '제사'는 결코 의미 있는 짓이 못된다. 다시 말해 산 사람들의 일상적 생활에도 무수한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엄청난 변화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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