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또 수능의 날이 찾아왔다. 올해 수능날은 입동이었고 그래서인지 수능날이어서인지 추웠다.


나는 수능을 무려 네 번이나 봤다. 전국에 나만큼 혹은 나보다 수능 많이 본 사람 흔치 않을텐데. 아무튼 자랑은 절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대충 내가 수능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느끼는 게 이해 되겠지. 거기다가 수능을 이과로 두 번, 문과로 두 번 봤다. 이과생 문과생 모두의 고충을 알 수 있다. 이런 걸 이용해서 수능전문상담사이트라도 만들어볼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멘탈부터 입시까지! 뭐 그런 건 결국 안 만들었지만 내 주변 지인들은 동생이나 자녀가 재수를 한다거나 수능 후 대학원서를 쓴다거나 할 때 나를 찾곤 한다. 


나에게 수능 얘기를 한다는 건 참 귀찮고도 지난한 일이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술만 마시면 수능 얘기를 했었다. 맨날 같은 레퍼토리. 뭐 지금도 술자리에서 수능 얘기가 나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자신이 찌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능인 어제를 잘 넘겨놓고도 오늘 이 글을 쓰게된 건 사소하다. 눈팅을 주로 하는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맘에 들지 않는 한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기엔 눈팅족이라 아이디도 없어 댓글도 달 수 없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하기엔 그 글의 30개 가량의 댓글도 그 글에 동감하길래 괜히 또 반박글을 쓰고싶었다고 할까나.


뭐 그 글은 대충 수능날이라고 전국이 호들갑 떠는 게 맘에 안든다! 이런 내용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 나이에 한 번 실패해도 지나고 보면 별 거 아닌데 사회가 호들갑을 떰으로서 애들이 실패를 더 두려워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아 뭐 다른 건 그냥 지나가겠는데, 그 나이에 한 번 실패하는 게 지나고 보면 별 거 아니라는 말. 그거에 근본적으로 동감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를 한다. 저 글도 저 글의 댓글들도 모두 그랬고. 19살에 입시 실패하고 수능 한 번 더 보는 거 아무 일도 아니라고. 


근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반박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수능 두 번 더 보는 건? 한 두 번 실패가 별 거 아니면 세 번은? 네 번은? 


수능 한 번 실패해서 재도전하는 게 별 거 아니어보여도, 한 번 실패의 쓰디쓴 아픔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저 다음 수능으로 이월된다. 재수생 삼수생들이 수능 잘봐놓고도 하향지원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거고.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정말 운이 좋지 않은 한 한 번 이상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모두 다 실패하고 살기 때문에 실패는 인간을 성장시킨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그게 정설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니 그렇다고 해서 그 이유가 실패를 해도 되는 이유가 되나? 내가 좋아하는 닉 혼비의 소설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의 한 주인공은 이런 대사를 한다. (기억나는대로) "큰 병에 걸려서 죽다 살아난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큰 병을 겪는 과정이 나를 더 성장시키고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저는 그게 과연 맞는 말일까 생각합니다. 그들이 큰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 넘치는 에너지로 더 많은 일을 정력적으로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모든 일에는 반대 급부가 있는 법이고, 아무리 나빠보이는 일에도 좋아보이는 면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나쁜 일을 견디어야할만큼의 가치를 갖는지는 생각해보아야한다.


실패는 실패다. 빼도 박도 못하는 실패다. 실패를 성장이니 뭐니 하는 걸로 포장하는 건 의미가 없다. 20대 초반 일이년 재수삼수하는 거 인생 전체로 놓고 지나보고 나면 별 일 아니라고? 웃기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지나보고 나서도 별 일인 일이 있긴 한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 삶을 사는 게 사람인데.


남들 다 신나게 노는 20살 그 합법적으로 술먹고 담배피고 클럽다닐 수 있는 그 나이에 학원 구석에 박혀 있는 게 퍽이나 의미있는 실패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패는 사람을 모험적일 수 없게 만들고, 소심하고, 남의 눈치를 보게 만든다. 한마디로 사람의 자신감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것을 회복하는 데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젊을 때 한 두살이 별 거 아니라고? 엄청 많이 지나보면 별 거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취업에 무사히 성공하기 전까지는 별 거다. 군대 가서도 별 거지. 요새 다들 일이년 기본으로 휴학하기 때문에 내가 삼수를 했는데도 현역으로 대학간 친구들 중에도 취직한 애들이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걔네랑 내 입장이 비슷해지는 건 아닌다. 걔네가 어학연수하고 뭐하고 심심하면 휴학하고 그럴 수 있어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요새 취업할 때 나이가 얼마나 중요한데. 나는 남들보다 빨리 빨리 뭔가를 해야한다. 아마도 취업에 무사히 성공하기 전까지는 이런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의대 치대는 안그럴 거라고? 주위에 삼수한 애들이 꽤 여럿이고 그 중엔 의대나 치대 간 애들도 몇 있지만 걔네도 그런 것 같진 않더라. 몇몇 대학에선 학번대로 위계가 있어서, 재수학원 비용 하나도 안 대준 나랑 동갑이거나 나보다 어린 애들한테 꼬박꼬박 윗사람 취급해줘야한다. 남자면 군대도 뭐. 부모님 등골 휘게하며 삼수씩이나 했는데 부모님한테 남들보다 빚진 마음 내치기 쉽지 않아 동기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현역으로 대학 온 동기들 부러워하며. 아 그냥 이런 거 다 제쳐두고 금전적으로만 따져봐도 몇천만원이 더 날아간다. 이게 별 거 아니라고?


네 번째 수능을 본지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난 이제 대학에서 한 학기를 남겨둔 4학년이지만 뭐 그렇다고 수능이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수능은 별 거다.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한참 청춘 20살 21살을 학원에 쳐박혀있게 만들었으며, 나의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이던 성격을 바꿨다. 고등학교 때까지 반장이었다는 게 지금 나한테는 상상이 안 되는 모습일테니까. 실패는 밝음의 끝이었던 나를 어둠의 심연 속으로 밀어넣었다.


지금도 입시 상담을 하는 사람들한테(동생 재수시킬까 어쩔까 등) 아 웬만하면 재수까진 몰라도 삼수는 시키지 마. 라고 하는데 이건 나 말고 주위 어떤 삼수생들도 그렇게 말하더라.


꼭 수능 제대로 안 보거나 뽀록으로 성적 잘 나와서 대학간 애들이나 수능 별 거 아니다. 대학공부가 더 어렵다. 뻘 소리 하더라. 주위에 삼수해서 정시로 서울대 갔거나 연대 치대 갔거나 한 친구들은 절대 수능 별 거 아니라는 소리 절대 안하는데. 나로 말하자면 수능보다 대학 공부가 200배는 쉽다. 술먹으러 다니고 애인 만나러 다니고 할 거 다하면서 하는 대학공부랑 8 to 12 하루 15 16시간씩 학교 혹은 학원에 붙어있으면서 하는 수능공부랑 난이도를 따진다고? 내가 삼수 때처럼 대학공부를 했으면 우리학교 학점 탑을 먹었을 거다. 


수능은 별 거고, 입시 실패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다고 해봤자 거기에 의미를 두면서 자기를 위로하지 말라는 거. 실패는 실패일 뿐입니다. 실패한 당신은 노력이 부족했거나 혹은 운이 없었습니다. 혹여 운이 없던 거라 할지라도 그 누구한테도 그 사실을 하소연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운 없는 사람을 되돌아봐 주지 않습니다.


이 글을 혹여 재수하고도 입시 망한 사람이나 삼수하고도 망한 사람 혹은 얼마 전 첫 실패를 한 입시 실패자들이 보게 된다면 나는 그냥 한 마디만 해주고 싶다. 실패는 실패일 뿐이다. 성공의 어머니라는 건 개소리다.


그러니 이 실패는 정말 별 거지만 무시하고 극복하도록 노력해보라는 것. 그게 별 거 아니라서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인 건 아니고, 별 거지만 극복해보라는 것.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도록 끝없이 고민하라는 것.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라는 것. 그래도 안되면? 그 때가서 죽어도 늦지 않다.


재수 때의 어느 날 어김없이 자습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밤 12시에야 집에 와서 눕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일 내가 사고로 죽게 되면 난 어떨까. 학원이 위치한 XX역을 떠돌아다니는 원혼이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언제 죽어도 세상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걸 하며 살다가 그거에 실패하면 어떡하지? 소심해진 내 내면은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 때 난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그럼 그 때 죽지 뭐."


매해 수능 날마다 자살하는 수많은 애들이 아쉬운 건 걔네가 과연 진짜 자기들이 얻고 싶은 걸 갈망하다가 얻지 못해 죽었나 하는 점이다. 김어준이 그랬다.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허망해질 때는, 아무 것도 이룬 게 없을 때가 아니라 이룬다고 이룬 것이 자기가 바라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라고. 아마 어릴 혹은 젊을 우리는 앞으로 하고 싶은 걸 할 날이 무궁무진하다.


아 쓰다보니 애초에 뭔 소릴 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네. 거봐 내가 수능 얘기만 하면 찌질해진댔잖아.


암튼 수능 망해서 대학 다 떨어져서 인터넷으로 이 글 보고 있는 너는 얼른 밖에 나가서 술이나 먹어. 술은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야 한다. 이 글을 보는 해당 안 되는 분들은 주위의 입시 실패를 겪은 이들에게 잘 대해주셔요. 불쌍한 사람들이니까요.



 





모두 잠들어 있는 아침에 맡는 밥냄새는 황홀하다. 예약된 시간에 맞추어 밥을 하는 전기밥솥의 부지런함에 괜스레 고마워진다. 


아날로그 감성이라는 건 실은 큰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인간성을 찾을 수 없을 듯한 그 어느 곳에서도 결국은 인간성을 찾아내고야 만다. 엄마가 아궁이 앞에 앉아 졸면서 하는 가마솥 밥냄새가 아닌, 전기밥솥의 밥냄새에도 황홀해지는 나처럼. 사람을 마주하지 않는 소통이 사람을 마주하는 소통보다 몰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그 아무도 몰인간적인 소통을 포기하지 않는 건, 사람을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소통도 인간적이라는 반증이다. 결국 인간이 존재하는 한 완벽하게 몰인간적인 사회는 SF영화 속에나 존재한다. 이것이 내가 인간에 대해 품고 있는 희망이다.  





 충분히 논란될만한 거 아는데도 이런 글 써야하는 거 굉장히 조심스럽고, 불편하고 착잡하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할 것 같아 쓴다. 나랑 친한 사람은 내가 사생활 문제 민감하고, 특히 온라인 사생활에 대해 민감한 거 알거다. 싸이도 전부 일촌공개고 페이스북도 영화 관련 홍보글 두어개 빼곤 다 친구공개다. 주기적으로 검색엔진에서 내이름 쳐서 내 흔적 지우고 다닌다. 이름이 워낙 특이해서 이름 걸고 하는 일 유독 조심스럽다. 논란되는 일에 끼는 것도 피곤하다. 그런 성격으로 이런 글 쓰는 거 사실 나로서는 쉽지 않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글이라 경어로 써야할 듯 하지만, 편의상 쓰겠다.


 박근혜 동문의 청와대 입성을 반대하는 서강 동문 성명에 서명했다. 일이 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한 건 아니지만, 내 소신이었다. 서명하고 며칠 뒤 몇몇 친구들한테 연락이 왔다. 기사봤다고. 기사에까지 내 이름이 실릴 줄은 몰랐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몇몇 친구들은 공감을 표했고, 몇몇 친구들은 날 걱정했다. 아직 취업도 안 한 마당에 가뜩이나 이름도 특이한데 서명하는 거 조심스러웠다. 내가 서명할 때 페이스북 게시물에 했는데, 그 때 서명한 사람 몇 있지도 않아서 더 조심스러웠다. 근데 그 성명서 초고에 구구절절 공감이 갔고, 잃을 것도 없는 젊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을 표하는 걸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벌써부터 두려워하면 안될 것 같아 나 자신한테 떳떳하고 싶어 서명했다. 


 그 후엔 이제 페이스북 페이지가 생기고 난리가 났네. 내 이름이 이 커뮤니티 저 커뮤니티 곳곳에 깔리고.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웹에 내가 남긴 흔적 지우고 다닐 정도로 폐쇄적이고 소시민적인 나한텐 좀 충격이기도 했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그대신, 그 성명서 페이스북 페이지에 반발하는 사람들에게 내 의견을 말하려고 이 글을 쓴다. 내가 한 일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말없이 받아들일 정도로 큰 그릇이 못 된다.


 우선, 가장 논란이 되는 페이스북 페이지 이름은 나도 유감이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서강 동문은 박근혜의 청와대 입성을 반대합니다.' 웃기는 이름이다. 서강 동문 모두가 박근혜의 당선을 반대한다는 양 쓰였다. 성명서 제목과 같다고 하는 모양인데, 내가 기억하기로 맨 처음 페이지가 없이 내가 페이스북 글에 서명할 때 그 글 제목은 '서강 동문 00명은 박근혜의 -' 였다.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페이지 이름에 대해서는 나도 공감할 수 없고, 페이지가 좋아요 개수가 200개를 넘어서 이름을 수정할 수 없다고 하는데, 페이지를 삭제하고 다시 만들어야할 만큼 잘못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페이지 운영자도 페이지 이름에 대해 잘못이라고 인정했고, 앞으로 '일부' 서강동문 이라는 거 강조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페이지를 삭제하고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개설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페이지 이름의 문제가 아닌, 너희가 뭔데 서강 동문 이름으로 박근혜를 반대하는 성명을 내느냐 하는 성명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할 수 없다. '박근혜 동문의 당선을 반대하는 서강 동문 선언'정도로 이름을 바꾸어 선언을 한다면, 선거법 위반도 아닌데 문제될 게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 


 내가 서명한 이유를 말하자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내 학교가 이명박의 고대처럼 외부에 보이는 게 싫기도 해서다. 좋은 집단이건 나쁜 집단이건 집단이라는 것은 집단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존재 자체로 집단 밖의 사람들에 대한 유무형의 폭력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고 생각한다. 내 페이스북에 출신 고등학교 출신 대학교 굳이 표기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표기 자체도 누군가에 대한 폭력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고 결국 그 대가로 고소영 내각이라 불리는 열매를 쟁취한 고려대의 천박함이 싫었다. 집단 밖의 사람들에 대한 폭력의 절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까지는 이명박과 고대만의 문제가 아닌 당장 해결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라고 넘어간다쳐도, 집단 안에서 그러한 동문들의 행태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게 더 싫더라. 고대라는 학교는 집단 안에서 다른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내지 못할 정도로 닫힌 집단인가 싶었다. 그런 생각에서, 내가 사랑하는 서강대라는 학교는 어느 대학처럼 일치단결해서 대통령 만들려고 혈안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 콩고물 얻어먹으려고 혈안된 사람들만 있는 곳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성명서를 보고 자랑스럽게 서명했다.


 이 성명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서강'이라는 이름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데, 그것만큼 웃기는 얘기가 없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할 것은, 학교 당국이지 학교 동문들이 아니다. 선거법 위반도 아닌데 개인에게 누가 무슨 자격으로 정치적 중립을 강요하나? 당신만 서강대 동문인가? 나도 서강대 동문이다. 나는 박근혜가 서강대인거 쪽팔리고, 박홍이 나올 때마다 앞에 '서강대 전 총장' 타이틀 달고 나오는 것도 거슬리고, 서강대 교수라는 타이틀 달고 종편 나와 대놓고 헛소리하는 교수도 쪽팔리지만 내가 그 사람들한테 '어디가서 서강대 이름달고 무슨 짓 하지마라.' 할 권리는 없는 거 아닌가. 마찬가지다. 누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에게 정치적 중립을 강요하는가. 서강이라는 이름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당신들은 우리학교 교수님들이 이명박 실정에 반대하는 시국선언할 때도, 서강대라는 이름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길길이 날뛰었던가? 시국선언에 동의하지 않는 교수님들이 그 선언에 서강대 교수 다수의 의견이 아니니, 서강대 교수라는 이름 쓰지말라고 날뛰었던가? 아무도 안 그랬다. 왜?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낼 수 있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선언이 자기를 대표하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박근혜를 지지한다면, 박근혜를 지지하는 서강 동문 선언을 하면 된다. 이 선언처럼 자기 학번 이름 걸고 똑같이 하면 된다. 이 선언보다 많은 이가 참여한다면 이 선언보다 더 대표성이 커진다. 그 선언이 먼저였어도 난 혼자 욕은 할지언정 거기에 대놓고 우리를 모두 대표하는 것이 아니므로 서강 이름 쓰지말라는 식의 비판은 안했을거다. 그건 민주주의의 기본도 모르는 대응일 뿐이니까.


 그리고 애초에 박근혜 지지하는 동문들은 활동 안한 것처럼 구는데,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넘어간거지 그동안 박근혜를 지지하는 동문들의 행위는 없었나? 박근혜 동문 지지하는 동문들은 학번 이름 걸고 하는 박근혜 반대선언만큼 떳떳하지도 않고 야비했다. 내가 이 학교 입학한 2010년에 내 이메일주소는 어떤 경로로 안건지 박근혜 동문 지지하라고 전체메일 왔었다. (메일이 남아있지 않아 조심스럽지만, 같은 경험한 사람들 여럿 봤다.) 그뿐인가. 뭣 모르는 새내기들 불러다가 고학번들이 밥사준다고 해놓고, 밥사주면서 그냥 동문까페라고 박근혜 지지하는 서강바른포럼 까페 가입하라고 시키지 않았나. 교수가 되어서, 동문인 박근혜 선배 지지하라고 학생에게 페이스북 메시지 보내지 않았나. 내가 겪고 보고 들은 사례만 이정돈데, 죄다 이런 식으로 물밑에서 학생들 서강 이름 걸면서 박근혜 지지하게 만드려는 야비한 시도들을 해놓고, 어찌 학번 이름 걸고 자신의 뜻을 나타낼 뿐인 선언을 서강 이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하나. 자신들은 그 행위를 하지 않았고 그냥 서강의 이름이 정치적으로 쓰이는 것에 반대한다는 동문들에게도 묻고 싶다. 박근혜 지지하라는 메일이 나한테만 온 건 아닐텐데, 정말 다들 그런 물밑의 행태 전혀 몰랐나? 알았다면 왜 그 땐 다들 가만히 문제제기 안하고 공론화 안해놓고 지금 일부 사람들이 학번 이름 걸고 하는 선언에만 문제제기하나. 당신들이 정말 정치적으로 중립적인가? 박근혜 지지하는데 이름 학번 달고 지지선언할 용기가 없는 건 아니고?


 모래알 서강이니 어쩌니 비아냥거려도, 나는 서강대가 다른 대학처럼 천박하게 그것이 얼마나 촌스럽고 폭력적인지도 모르고 일치단결해서 자기 학교 출신 대통령 만들고 그 콩고물 좀 얻어먹어보겠다고 하는 사람들만 모인 곳이 아님에 안도한다. 이런 학교가 자랑스럽고, 이런 학풍이 자랑스럽다. 


 2010년 내가 서강에 입학하던 해, 등록금 문제가 이슈였고 대다수의 학교들은 등록금을 동결했다. 그런데 서강대는 등록금을 인상했다. 개교 50주년 행사를 해야하기 때문이라했다. 그리고 개교 50주년 행사엔 박근혜가 왔다. 홀로 보이콧했지만, 문제제기하지 않았다. 내가 박근혜를 서강 개교 50주년 행사에 오라 오지말라 할 권리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들은 자신들의 권리 영역을 너무 크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도 동문의 한 사람이고 당신도 서강 동문의 한 사람일 뿐이다. 누가 누구의 정치적 중립을 강요하고, 서강 이름을 걸지 말라고 강요하나. 꼬우면, 지지선언 하시라. 이상이다.





정리해서 페이스북에 올리려고했는데, 소심증 발동하고 써놓고보니 내 분도 풀려서 올리진 않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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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요즘 20대의 모습
흔한 요즘 20대의 모습


스마트폰 쓰고 술 마시고 스타벅스 가고 아이패드 사고 데이트하고 모텔 가고 놀러 가고 영화 보고 그 외 살 거 다 사면서 공부할 책값은 없다. 
스마트폰 쓰고 술 마시고 스타벅스 가고 아이패드 사고 데이트하고 모텔 가고 놀러 가고 영화 보고 그 외 살 거 다 산다. 물론 부모돈으로. 부모님은 아르바이트도 못하게 하신다. 나는 이렇게 부모 잘 만나 잘 사는 거지만 그렇지 못한 애들은 노력을 안 해서 못사는 거다.  


길거리에 나가 반값등록금을 외친다. 

길거리에 나가 반값등록금을 외치는 애들이 한심하다. 부모님 회사에서 등록금 내주거나 부모님이 내시기 때문에 등록금 걱정은 해본 적 없다. 반값등록금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또래 중에 등록금을 자기가 벌어서 내거나 대출로 다 충당하면서 대출이자도 알바해서 벌어서 내는 애들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리고 알아도 걔네 사정이지 내 사정 아니다. 누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랬나? 자기가 노력만 하면 잘 살 수 있는데 걔네는 지들은 노력도 안하면서 개뿔 사회탓만 한다. 물론 난 부모님 돈으로 등록금 낸다. 노력은 많이 했다. 수능 공부도 열심히 했고 과외도 한 두 번 해봤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원도 갈거다. 난 그런 남의 탓만 하는 애들이랑은 다르니까. 물론 내 대학원 학비 역시 부모님이 대주실거다. 



지잡대 무시하지 말라면서 고졸은 무시한다. 초, 중 고 때 띵가띵가 놀고 대학도 남들 가니까 지방대라도 넣어서 들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책은 가까이 하지 않는다. 미팅, 술, 게임으로 4년을 보낸다. 

고등학교 때 국사는 선택하지 않았다. 어차피 김대중 노무현 빨갱이 정부에서 만든 거니까 고등학교 국사책도 다 헛소리다. 진짜 역사 지식은 인터넷에 있다. 디씨나 일베가면 다 있다. 5.18은 폭동인데 빨갱이들이 어떻게 나라를 잘도 구워삶아서 역사책에 민주화운동이라고 실었다. 책은 읽지만 사회과학서적은 읽어본 적 없다. 대학은 경영,경제학과나 공대 갔다. 취직 잘 되는 과 찾아왔다. 주체적으로 무엇을 전공할지 생각해본 적은 없다. 부모님이 가래서 혹은 취직 잘된대서 왔다.(가끔은 그래서 왔는데 자기가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그 과 갔다고 생각하는 자기합리화를 하는 애들도 있다.) 좋은 대기업 취직해서 승진하고 성공하는 거나 공무원되는 게 인생 목표다. 사유가 빈곤하다. 사실 군 입대 전까지만해도 정치에 대해 별 생각 없었는데 군대가서 본 안보 영상물 안보교육에 감명받았다.  빨갱이 새끼들은 다 쳐죽여야 된다. 민주당은 빨갱이새끼들이다. 주적인 북한이랑 평화통일하자고 하는 것부터가 빨갱이다. 군에서 안보 교육 받고 나오니 사회에 관심이 생긴다. 빨갱이새끼들은 다 처단해야한다. 빨갱이들 말에 반박하기위해 일베나 디씨에 접속한다. 아직도 사회과학책은 손도 안댄다. 조중동이라도 읽기나 하면 다행이다.


그리고 졸업. 취업할 때 되면 지도 나름 4년제라고 중소기업 거들떠도 안보고 취업 안된다며 징징댄다.
남 탓, 사회 탓을 하며 슬슬 진보 성향을 띄기 시작한다. 트위터나 다음을 가보니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다.
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구나.. 그러다가 광우뻥 촛불집회를 나가며 깨어있는 시민으로 세탁한다.

졸업, 취업할 때 되면 이제 또 시키는 대로 잘할 자신이 있다. 주체적인 자기의 꿈따위는 없다. 남들이 우러러 보는 대기업 가는 게 목표다. 어줍잖은 인턴 부모빽이나 친척빽으로 들어가서 스펙쌓는다. 영어학원 다닌다. 물론 역시 또 부모돈이다. 어떻게 절절 열심히해서 대기업에 들어간다. 대기업 총수와 자기 자신을 일체화 시킨다. 경영학과 나왔으니 경영자될 줄 안다. 대기업 들어왔으니 기업에 충성해야한다. 이제는 우리 회사 까는 놈들도 빨갱이다. 노조하는 놈들은 공산주의자다. 빨갱이다. 


취업준비도 슬슬 지친다.. 대기업 개개끼 외치며 공무원이나 해보자면서 노량진으로 간다. 부모님 등꼴 다 빼먹고 못해먹겠다며 공무원 시험 포기한다. 그러던 중 나꼼수를 듣는다.
모든게 다 엠비탓이다. 정부가 날 이렇게 만든거다.
그리고 길거리에 나가 엠비 아웃을 외친다. 
난 이 시대의 20대를 대변하는 청춘이다.

그렇게 밀려밀려 인생을 산다. 집이 부자도 아니면서 돈도 안되는 예술하겠다고 깝죽대는 애들이나 선동당해서 사회운동하는 애들이 제일 한심하다. 좌빨 애들 팔십퍼센트는 선동당해서 좌빨이 된 거다. 사람이 선동당하기 쉬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실은 자기가 선동당하기 쉬운 놈이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이 사실은 계속 누군가에 의해 선동당해서 이렇게 흘러왔다는 걸 끝까지 깨닫지도 못한다. 돈 안되는 사회과학대 인문대를 가고 싶다고 가거나 고등학교 때 갑자기 뜻이 있다고 자퇴를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대학교 필요없으니 안가겠다고 대학 안가는 애들이 왜 그런지는 죽었다 깨나도 모른다. 그냥 평생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주입식으로 산다. 부족함 없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시키는 대로 공부 열심히하고 학점 열심히 따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서 돈 벌다가 죽는다. 죽기 전까지 진정한 인생의 의미는 한 번도 고민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   


-출처, 디시 역사갤러리

-출처, 나.

불란서가 캐나다의 도시인 줄 알고 수취인불명이 술 취해서 정신 잃은 사람인 줄 알던, 내가 아는 몇 년동안 책 읽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식함의 소유자이자 남자 등골 부모 등골 빼먹는 거에만 관심있는 된장녀인 나의 지인이 검은색으로 된 저 글에 좋아요 누르는 거 보고 존나 한심해서 블로그에 간만에 글싸봄. 진짜 평생 제대로 된 책 한 권 지가 골라서 읽어본 적도 없고 지식이라고는 일베 디씨에서 얻는 게 다인 저런 애새끼들이 저딴 식으로 20대 비하하는 거 존나 한심하다. 부모님 의견 따라 수꼴이던 내친구 집 가보니 아예 방에 책꽂이 자체가 없더라. 넌 책 안 읽느냐고 했더니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몇 권 친구한테 빌려왔다며 쌓여있더만. 그 이후로 이젠 걔랑 정치 사회얘기 자체를 아예 안 한다. 그냥 저런 애들이 왜 저러는지 알게 됐으니까. 

에휴, 그냥, 평생 그렇게 살다 죽어. 







개를 처음 키운 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독립문에서 슈퍼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유치원 같은 반 남자애였던 보영이가 자기 집 발발이가 새끼를 낳았다고 했다. 집에다가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졸랐고 엄마의 흔쾌한 허락을 받아 보영이네 집에서 강아지를 분양받게 되었다. 엄마는 어릴 때 시골에서 사셨기 때문에 아기돼지나 소, 병아리, 토끼 등을 어린 시절부터 방 안에서 키워본 경험이 있으셨고 동물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덕분에 힘들게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동물을 키울 수 있는 보통 애들과는 달리 나는 흔쾌히 허락을 받아 처음으로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다.



보영이한테 분양받아서였는지 어쨌는지 나는 그 발발이의 이름을 '보보'라고 지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잡종 개였지만 나한테는 정말 사랑스러운 첫번째 강아지였다. 같이 동네를 뛰어다니면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보보는 날이 다르게 자랐고 곧 어린 내가 들기엔 버거운 무게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보보를 낑낑대며 안고 다녔다. 보보는 어린 주인이 자기를 괴롭히는데도 이빨 한 번 드러내는 법이 없었고,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배변을 가릴 줄 알았다. 정말 똑똑했다. 하지만 보보는 털이 너무 많이 빠졌고, 엄마는 그런 보보에 대해 집 안에서 기르기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보는 우리 집에는 가끔씩밖에 갈 수 없었고 주로 우리 슈퍼에서 자랐다.



보보를 키우던 중 아빠가 어느 날 아주 작은 흰 푸들을 쇼핑백에 넣어 오셨다. 아빠가 일하던 건물에서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아서 데리고 오신 것이다. 얼룩덜룩하고 컸던 보보와는 달리 내 고사리 손만했던 뽀뽀는 정말 작고 털이 곱슬곱슬했다. 언니와 아빠는 흰 푸들에게 반한 것 같았다. 언니가 뽀뽀의 이름을 지었다. 털이 많이 빠져 슈퍼에 살았던 보보와는 달리 뽀뽀는 우리 집 안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그 점이 굉장히 못마땅했다. 슈퍼가 문을 닫을 때면 언제나 보보도 집에 데려가면 안되냐고 떼를 썼다. 보보가 집에 오지 못하고 슈퍼에만 있게 되는데, 뽀뽀는 매번 집 안에 있고 언니에게 안겨잤다. 그래서 뽀뽀가 얄미워졌다. 이름을 지은 탓인지 보보는 내 개처럼, 뽀뽀는 언니 개처럼 여겨져서 그런 점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오니 보보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슈퍼를 접고 다시 상도동으로 이사를 가려던 부모님이 털이 많이 빠지는 보보는 집 안에서 키우기 역부족이라고 판단하셨던 거였다. 보보는 한동네에 살았던 이모네 집으로 분양되었다. 하루종일 울었고 대놓고 뽀뽀를 미워하게 됐다. 뽀뽀 잘못은 아니지만 불똥이 거기에 튄 것이다. 마당이 있었던 이모네 집에서 보보는 하루종일 마음을 열지 못한 채 한 방향만 바라보며 낑낑대고 울었다. 그래서 이모도 보보를 키우지 못하고 지인의 집에 보보를 맡겼다. 이렇게 보보가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넘어가는 동안 나는 그 소식도 제대로 몰랐다. 나중에 이모에게 들으니 지인의 집에서도 보보가 그 집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하루 종일 울기만 해서 또 다른 집으로 넘어갔는지 어쨌는지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엉엉 울었다. 어려서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이별은 나에게 굉장히 큰 상처로 남았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보보이야기를 하며 엄마를 원망하곤 한다. 보보가 보신탕집에 팔려갔으면 어쨌을 거냐고. 가족들은 이제 보보도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을만큼 시간이 지났다며 그 이야기 좀 그만 하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보보에게 가끔 너무 미안하다.



덕분에 뽀뽀에게는 마음을 열 수 없었다. 가족들에게 매일 듣는 소리가 너는 개에게 영 정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가족들은 내가 왜그렇게 뽀뽀에게 냉정한지 잘 몰랐을 것이다. 나는 희고 작은 푸들인 뽀뽀가 보보를 내쫓은 깍쟁이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온전히 예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뽀뽀는 어느새 가족이 되어갔다. 



그러다 언니가 스무 살이 되고 대학을 지방으로 가면서 혼자 아파트를 얻어 자취를 하게되었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언니는 혼자 사는 게 무섭고 악몽을 꾼다며 개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뽀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뽀뽀를 언니랑 살게 둘 수는 없다고 했고 개 농장에 가서 새로운 푸들을 사게 됐다. 바로 갈색 푸들 금이다. 그 때부터 금이는 3년을 언니와 함께 대전에서 살았다. 주말에 언니가 집에 올 때는 금이도 집에 같이 왔다. 그러다 언니가 다시 집에와 살게되면서 금이도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어린 시절을 언니와 자란 금이는 언니 개라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 정이 가지 않았다. 뽀뽀는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아 언젠가부터 엄마 개가 되어있었다. 여전히 개들한테 냉정하다고 가족들한테 욕을 먹었다. 나는 뭘 먹어도 개들한테는 잘 안줬고, 개 목욕도 당연히 가족들의 몫으로 여겼다. 잘 때도 개들이랑 자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언니가 스피츠 한마리를 얻어오게 되었다. 언니 친구가 키우려고 사서 집에 갔는데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오갈 데가 없어진 개였다. 언니 친구는 개를 두 마리나 키우는 우리 집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는지 언니에게 부탁을 하게된 것이다. 언니도 세 마리는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아기 스피츠의 모습에 넋을 잃고 집에 말도 없이 나에게만 살짝 귀뜸을 하고 스피츠를 데려오게 되었다. 그 개가 바로 지금의 곤지이다. 이름이 촌스럽지만 곤지를 준 언니 친구가 이름만은 바꾸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집은 난리가 났다. 엄마는 세 마리는 정말 키울 수 없다고 다른 곳에 보내야 한다고 결사반대하셨다. 심지어 엄마가 직접 보낼 곳을 알아보기까지 하셨다. 하지만 아빠와 나는 아기 스피츠인 곤지의 모습에 넋이 나가 곤지를 키우자고 엄마를 설득했다. 매일 언니와 함께 엄마 설득 작전을 짜곤 했다. 학교에 다녀와선 곤지와 놀면서 재밌게 보내다가 엄마가 곤지를 다른 곳에 보내야 한다고 말하면 나는 울었다. 나는 뽀뽀의 처음 이미지 때문인지 푸들을 깍쟁이처럼 느끼고, 보보의 영향인지 뚱뚱하고 털이 풍성한 개를 좋아한다. 스피츠인 곤지는 보보와 같은 이미지였다. 엄마에게는 보보 이야기를 하며 울었다. 보보도 그렇고 곤지도 그렇고 왜 내가 좋아하는 개는 못 키우게 하는 거냐고.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 우리 집에 곤지가 오게 된 건 보통 인연이 아닌데 어쩌면 보보의 환생일지도 모른다고 별 소리를 다 해댔다. 아빠도 엄마의 반대에 주춤해 의견을 내세우지는 못했지만 소극적으로 찬성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였다. 하지만 엄마는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곤지를 보낼 다른 곳이 생길 때까지만 곤지를 집에서 키우기로 엄마와 언니가 합의를 하고 하루이틀이 지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곤지가 원래부터 피부병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뽀뽀와 금이에게도 옮는 것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옮는 병이어서 온 가족이 몸에 빨간 점들이 나는 등 고생을 했다. 동물 병원에 갔지만 약이 들지 않았다. 곤지의 털이 숭숭 빠지고 피부에 이상한 것들이 났다. 그래서 곤지는 우리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피부병이 심한 곤지를 다른 집에 넘기면 결국 버려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엄마는 곤지를 다른 집에 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곤지를 낫게 하기 위해 온갖 동물 병원에 다녔지만 이상하게도 곤지의 병은 낫지 않았다. 조금 낫는 것 같다가도 그대로였다. 



그렇게 꽤 많은 세월이 지나고 곤지의 털은 여전히 군데군데가 숭숭 빠져있었다. 그러다 나를 데리러 밤에 과천에 오던 길에 부모님은 모 동물 병원 벽에 걸린 강아지 피부병 증상 사진을 보게 되셨다. 부모님은 그 밤에 차를 세워 그 사진을 보셨다. 곤지와 증상이 똑같았다. 날이 밝고 곤지는 바로 그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다. 알고보니 그건 개 옴이라는 거였다. 그 전까지 곤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거의 백만원을 썼는데 아무도 몰랐던 그 병이 그렇게 간단한 병이었다니. 그 전 병원의 의사들을 돌팔이라고 욕하고 우리 강아지들은 그 병원에서 약을 받아 먹었다. 그렇게 시간차는 있지만 세 마리가 모두 피부병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가끔씩 엄마는 곤지가 피부병이 다 나았으니 다른 집으로 보내야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셨지만 이미 정이 든 후였다. 엄마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곤지가 똥오줌을 못가렸기 때문도 있다. 곤지가 똥오줌을 못가리니 똥오줌이 아무데나 있어도 세 명 중 누구의 것인지 쉽사리 알 수가 없어 누구도 제대로 혼낼 수가 없었다. 그걸 악용한 똑똑한 금이도 똥오줌을 아무데나 싸기 시작했다. 결국 집은 똥오줌 밭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곤지는 푸들과는 달리 개로서의 본능이 굉장히 충실했다. 이빨이 간지럽다고 온갖 옷, 신발들을 물어뜯어 놓았다. 내 한정판 운동화를 물어뜯어서 맞은 적도 있다. 하지만 곤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뽀뽀나 금이에 대한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곤지에게서 보보를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둘은 생김새는 달랐지만 크기도 비슷하고 털길이나 무게도 비슷했다. 



그렇게 세 마리가 좌충우돌 살아가는 동안 뽀뽀는 하루하루 늙어갔다. 뽀뽀는 우리 가족과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휴가도 같이가고 명절이면 할머니댁도 같이 가는 말그대로 '가족'이었다. 가족이 늙어가고 힘이 없어져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들었다. 뽀뽀에 대한 애정을 깨달은 것은 뽀뽀가 늙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였다. 언니와 아빠는 여전히 금이와 곤지에게 정신이 팔려있었지만 나는 뽀뽀가 항상 눈에 밟혔다. 어릴 때 잘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뽀뽀는 늙어갔다. 눈이 멀고, 귀가 안들리기 시작했다. 몸은 작아지고 등은 굽었다. 그럴 수록 나는 뽀뽀를 더 많이 데리고 나갔다. 죽기 전에 산책을 많이 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무 작고 느려서 목줄을 해줄 수도 없었다. 가족들은 뽀뽀를 데리고 나가면 신경을 써야하니까 잘 데리고 나가지 않았는데, 나는 가끔씩 데리고 나갔다. 뽀뽀를 산책시킬 때는 뽀뽀가 너무 느리게 걸어서 속도를 맞춰 옆에서 걸어줘야만 했다. 눈도 안보이고 귀도 멀었지만 뽀뽀는 풀 냄새와 흙 냄새를 정말 좋아했다. 하루하루 늙어가는 뽀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뽀뽀를 더 많이 안아주고 뽀뽀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2011년 가을이 되었다. 뽀뽀의 건강은 급격히 안좋아졌다. 아무리 아파도 똥오줌은 가리는 뽀뽀였는데, 똥오줌을 가릴 수 없고 제 자리에서 자기 이불에 싸게 되어서 기저귀를 차게 되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자기 자리에서 잠만 잤다. 2011년에 들어서는 산책을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던 뽀뽀였다. 나는 가끔씩 뽀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고 싶었지만 뽀뽀의 건강에 무리가 될 것을 우려한 가족들은  반대했다. 여름엔 날씨가 너무 덥거나 비가 왔고가을은 너무 쌀쌀해서 산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뽀뽀를 안고 동네 슈퍼에 데리고 갔다오는 때만 뽀뽀는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뽀뽀는 기력이 없어졌다. 나는 엎드려서 뽀뽀에게 눈높이를 맞추고는 다가오는 봄까지만 살다 가라고 말했다. 봄에 산책 한 번 하자고. 다가오는 봄에는 가족들이 반대를 해도 산책을 한 번은 시켜줘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뽀뽀는 결국 시월을 넘기지 못했다. 10월 31일 쌀쌀했던 새벽에 뽀뽀는 갔다. 마지막 며칠은 유난히 기력이 없었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부모님은 뽀뽀가 곧 죽겠구나 하셨다. 뽀뽀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한지 이틀째라는 말을 들은 뽀뽀가 죽기 전날 아침에 나는 바로 동네 슈퍼로 달려갔다. 뽀뽀가 가장 좋아하던 천하장사 소세지를 잔뜩 사와서 잘게 잘랐다. 그리고는 뽀뽀의 입에 넣어 씹게 했다. 하지만 뽀뽀는 소세지를 먹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엉엉 울었다. 뽀뽀는 그 날 밤이 지나 새벽에 죽었고, 아빠는 나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뽀뽀를 뒷산에 묻어주고 왔다. 웃긴 건 나는 그 새벽에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보고있었다는 것이다. 아빠가 갑자기 새벽에 잠바를 입고 나와 잠깐 어디좀 다녀온다고 하셔서 이 새벽에 어딜가냐고 물었다. 뽀뽀가 며칠 안남았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뽀뽀의 죽음은 차마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 다음날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문득 생각이 났다. 오늘 아침엔 뽀뽀랑 인사를 하지 않고 학교에 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 불길해졌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뽀뽀의 자리로 달려갔다. 뽀뽀도, 뽀뽀의 이불도 없었다. 그 때 나는 전날 밤에 아빠가 어딜 갔었는지를 알았다. 하지만 믿고싶지 않아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뽀뽀 어디갔냐고. 전화를 끊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 아빠가 들어오시자 아빠에게 왜 어젯밤에 말을 해주지 않았냐고 원망하면서 또 한참을 울었다. 아빠는 내가 너무 충격을 받고 울까봐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뽀뽀는 잠자듯이 조용히 갔다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 가족과 17년을 넘게 함께했던 뽀뽀는 그렇게 가을 밤에 갔다. 



금이와 곤지만 남았다. 야속하게도 금이와 곤지는 뽀뽀의 존재를 금방도 잊은듯했다. 뽀뽀를 찾는 기색도 없었다. 나는 그런 금이와 곤지가 얄미워서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여전히 금이와 곤지는 티격태격하면서 잘 지낸다. 



오랫동안 강아지를 키우면서 우리 가족은 가족만의 애견 방법을 구축해나간 것 같다. 우선 절대로 성대 수술을 시키지 않는다. 다행히도 예전엔 주로 주택에 살았었고, 지금 사는 아파트는 다들 애완동물을 자유로이 키우는 분위기고 방음도 꽤 잘되기 때문에 개 짖는 소리로 항의해오는 이웃은 하나도 없다. 두 번째로 중성화 수술을 시키지 않는다. 키우는 개들이 다 암컷이라 가능한 것이기도하고, 중성화 수술을 시키고 싶지 않아 수컷을 키우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셋째로 털깎는 것을 애견미용센터에 맞기지 않는다. 개를 키우던 초기에는 우리 집도 털깎는 것을 미용센터에 맡기곤 했는데 미용센터에 갔다오면 개들이 무언가 주눅든 기색이 있었다. 그 이후로 몇몇 미용센터의 악명높은 이야기를 듣기도 하면서 이제는 개들을 절대 미용센터에 맡기지 않는다. 요새는 마취를 해서 미용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아파서도 아니고 오직 미용을 위해 개를 마취시킨다는 것은 사람의 지나친 이기심이 아닐까한다. 그 대신 우리 집은 온갖 유명 회사의 바리깡을 모두 사서 써봤다. 엄마와 나와 언니가 달라붙어 개들을 미용한다. 그마저도 큰 일인 요새는 대충 가위로 털을 댕강댕강 잘라준다. 겉모습이 어떻든 어때 하는 심정으로. 연장선으로 겨울에 산책할 때 빼고는 옷도 안입힌다.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산책은 자주 시켜주려고 노력한다. 내가 우리집 개 산책 담당자인데 곤지는 산책할 때 평범한 개처럼 줄 묶인 것에도 불만없이 졸졸 잘 걸어다니고 즐거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산책을 자주 시켜준다. 하지만 금이는 산책을 나가면 줄을 풀어달라고 계속해서 낑낑거리고 나에게 안아달라고 하고, 줄을 푸르면 모르는 사람에게 달려들고하기 때문에 산책을 시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산책을 잘 안시켜주고 싶지만 곤지만 데리고 나가면 난리가 나기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두 마리를 같이 데리고 나간다.  



개를 키운다는 것은 보통의 책임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개를 키웠던 내 몸에는 개들이 낸 상처가 가득하다. 그저께는 언니가 쇼파에서 곤지를 밀었는데 쇼파 밑에 있던 내 얼굴에 곤지가 떨어져 얼굴에 곤지 발톱자국이 선명하게 세 개나 그어졌다. 갑작스럽기도 했고 눈 근처라 긁힐 때는 깜짝 놀랐다. 피도 났다. 아직도 상처가 그대로다. 자고 있었는데 곤지와 금이가 뛰어놀다가 내 팔목을 긁은 적도 있다. 팔목의 상처는 1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그대로다. 팔다리에는 언제나 개들의 발톱 자국이 있다. 하지만 개들도 실수로 한 것이기 때문에 화를 낼 수도 없다. 집에 손님을 데리고오기도 힘들다. 요새같이 늦게 일어나는 방학에는 개들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가족들이 모두 출근하고 나혼자 내 방에서 자고 있으면 곤지와 금이가 내 방에 들어오겠다고 문을 긁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금이의 집념은 엄청나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긁기 때문에 잠에서 깨지 않을 수가 없다. 문을 열어준다고 끝이 아니다. 곧 물먹겠다고 밥먹겠다고 나간다고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그러면 또 문을 열어주어야한다. 그래서 보통 그냥 문을 열어놓고 만다. 



친구들이 우리집에 놀러와서 물이나 음료수, 음식을 먹다가 낮은 곳에 올려놓을 때면 나는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개들이 닿지 않는 높이에 올려놓는다. 그런 행동은 이제 의식하지도 않고 한다. 금이는 왠만한 높이의 음식은 다 건드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물도 자기 물을 안마시고 상 위에 놓인 사람 컵에 얼굴을 박고 마신다. 금이에게서 음식을 지키는 것은 이제 몸에 배었다. 집에 놀러와서 상에서 음식을 먹으면 계속해서 달려드는 금이 때문에 친구들은 음식 먹기를 곤란해 한다. 나는 의식도 하지 않고 양 다리로 금이를 밀면서 편하게 식사한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기인열전 같다고 했다. 금이는 음식 뚜껑을 열어서 몰래 훔쳐 먹고 다시 뚜껑을 닫아놓을 정도로 똑똑한 푸들이다. 뚜껑을 닫다가 엄마한테 걸린 적이 있다. 곤지는 소심해서 틈만 나면 소리를 지르면서 빙글빙글 돌며 이유없이 화를 낸다. 풀도 뜯어먹는다. 집 안의 난이나 풀들을 뜯어먹다가 걸린 적이 있다. 우리 집 개들은 정상이 없다. 개들이랑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뽀뽀처럼 앞으로 금이나 곤지와도 헤어질 날이 오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먹먹해진다. 자고 있는데 내 이불에 들어와 내 몸에 얼굴을 파묻으며 내 잠을 깨우는 곤지, 내가 밖에 나갔다오면 직립보행으로 걸어다니며 나를 반기는 금이는 분명 내 생활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나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유난스럽게 옷을 사주고 개 간식을 사주고 사진을 찍고 하는 사랑은 아니지만 평생을 개들과 함께 해와서인지 나는 개들이 편하고 좋다. 곤지도 금이도 앞으로도 오래오래 나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 간 뽀뽀는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만,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하늘 나라에 갔을 보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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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는다는 건 지금의 나에게는 정말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일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고등학교 동창이 올린 그 애의 아이 사진을 보고 벙쪘다. 벌써 걸어다니더라고...근데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도 내 나이 때 언니가 걸어다니고 있었어. 


어디 가면 자식 안낳을 거라고 말하고 다닌다. 집에서 그 말을 하면 엄마가 "너처럼 애 좋아하는 애가 어디 자식 안낳고 배기나 보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일단 지금으로서는 진심이다. 물론 애들을 엄청 좋아해서 그에 얽힌 일화도 엄청많지만...아이 사랑은 조카 사랑으로 해줄거라고 다짐하고 있다. 빨리 조카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 애는 정말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자기 엄마 아빠랑도 못하는 모든 얘기를 이모랑 나누는 사이가 될 거야. 꼭 그렇게 될테다...


아이를 안낳을 거라고 다짐하는 이유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 한 입 먹고 살 정도의 돈은 무슨 일을 해도 벌 수 있을 테고 많이 못 벌어도 나는 그냥 그 정도에 만족하고 살면 되는데, 아이가 생긴다면 그럴 수 없게 된다. 아이는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게 아니니까 내 가난을 그 애가 나랑 같이 감수할 이유는 없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가난해서는 안되지. 특히 가난하지 않을 방법이 있는데도 나 살고싶은대로 살겠다고 가난하게 살면 그건 무책임한 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기 위해서 기꺼이 가난할 각오가 된 나한테 그건 좀 가혹한 일이다. 


결국 돈 때문에 애 낳기 두렵다는 말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자식이 생긴다면 정말 행복한 사람으로 잘 키우고 싶은데 내가 그럴 역량이 되는지 인격이 되는지 의문이라는 이유도 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긴 말 하기 싫어서 왜 애 낳기 싫냐고 질문 받으면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라고 짧게 대답한다. 그게 어쩌면 더 진심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인격이나 역량이 자식의 행복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아이를 잘 키우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겠어서 아이를 낳기가 두렵다. 나중에 정말 좋은 사람 만나서 '이 사람과 함께라면 아이를 행복한 사람으로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올 지도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고 자신이 없다. 그리고 만약에라도 준비가 덜된 나 때문에 내 자식이 불행하다면 나 자신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일 것 같다. 그래서 아이를 만약, 정말 만약에 낳는다 해도 인격적으로 좀 내 자신이 성숙해진 다음에 낳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사실 부모님의 영향도 조금은 있다. 우리 언니는 엄마 23세, 아빠 22세 때 예기치 않게 생긴 그런 아이였고. 나는 엄마 29세, 아빠 28세 때 생긴 아이였다. 역시 나또한 원치 않은 아이였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긴 하지만 우리 부모님의 교육은 언니 때와 나 때가 너무 달랐다. 사실 우리부모님이 나를 키울 때처럼만 내가 나중에 자식을 키울 수 있다면 반쯤은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니를 키울 때처럼 자식을 키운다면 그건 아닐 것 같다. 이건 우리 엄마가 EBS 교육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울면서 당신 입으로 먼저 이야기한 부분이다. 언니한테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고. 첫 아이를 키울 때의 시행착오는 많은 부모가 겪고 특히 준비되지 않은 경우에는 더하다고 한다.    


언니는 첫 아이라 많은 기대를 받았고 특히 예기치 못한 결혼이 양가의 반대에 부딪혀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낳게 된 아이였기 때문에 양가 부모님에게 '증명'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라도 잘 자라야 했다. 엄마의 창창한 청춘이 언니 때문에 펴보지도 못한 채 사라졌고 엄마는 그 청춘을 언니에게서 회수하고 싶어했다. 엄마 아빠 특히 엄마가 언니에게 얼마나 집착했을지 보이는 배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어렸을 때 집안을 생각해보면 언제나 엄마와 언니가 싸우고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그런 데 비해 언니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집안 풍경은 언제나 엄마와 아빠가 싸우고 있는 풍경이었다고 한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빠가 된 아빠는 철이 없었고 그래서 책임감도 없어서 엄마랑 매일 싸웠다. 그게 어린 언니한테는 어떤 영향을 줬을까. 더 어렸을 때 아빠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아직 군인이거나 대학생일 때는 엄마가 돈을 벌어야 했기에 언니는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자랐고. 가끔 언니에게서 그 시절 생겼을 그늘이 보일 때가 있는데 자매지만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커서도 우리 자매는 확연히 다르게 자랐다. 난 별 기대를 안받고 자랐다. 가끔 그게 좀 서운할 때도 있지만. 내가 언니보다 공부는 좀 더 잘했었는데도 부모님은 나한테는 별 기대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이 나에게 가진 교육방침은 언니와는 정반대였다. 언니는 공부에 애초에 재능이 없었는데도 과외를 붙여줬고 문제집을 사다줬고 성적표를 확인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학에 간 후에도 지금의 직업을 알아보고 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곳에까지 엄마가 직접 보내서 결국 언니를 지금의 직업까지 도달하게 만들었다. 중간중간에 언니가 하고 싶다던게 없었던 건 아닌데, 내가 아는 것만 해도 한 서너개 된다. 언니의 바람은 다 반대의 벽에 부딪혔었다. 실업계 고등학교 가겠다는 것도, 고등학교 자퇴하겠다는 것도 벽에 부딪혀. 알바해보고 싶다는 것도 못하게 해. 뭐 스튜어디스 요리사 유학 등등 그 이후 언니의 꿈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다 부모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라졌다. 엄마는 언니에게 끝까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했었다. 


나에 대한 교육방침은 아예 반대였다. 어렸을 때 언니에게는 전과를 사줬었으면서 엄마는 무슨 교육방침의 변화였는지 나에 대해서는 그 흔했던 전과금지의 교육방침을 택한다.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엔 전과 한 번 못보고 아주 창의적으로 숙제를 해갔다.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학원에서 부모님이 도와줘야 하는 무슨 숙제를 내곤 했었는데 그걸 다른 애들은 다 엄마가 해주는데 우리엄마는 절대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 "니 숙제는 니가 해야지" 라는 방침이었다. 학원도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는 내가 알아봐서 다녔다. 다른 애들이 어디 학원을 다니나 보고 집에와서 거기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주는 식이었다. 내 성적표는 내가 보여주기 전에는 나온 줄도 몰랐고 그래서 오히려 나는 평생 성적표를 숨겨본 적 없이 내 손으로 꼬박꼬박 보여주곤 했다. 외고도 내가 외고입시 학원 친구들 따라 갔다가 이거 하겠다고 해서 준비하게 됐고. 학교는 내가 가기 싫은 날은 안 가도 됐다. 부모님이 나한테 욕심냈던 유일한 순간은 고1 말에 이과 문과를 나눌 때 였는데 그 때까지 나에 대해 아무 말이 없던 아빠가 이과를 갔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던 거였다. 이과에 가서 의대에 갔으면 좋겠다고. 그게 부모님이 나에게 가졌던 유일한 욕심이었다. 나는 나한테는 아무 기대도 없는 줄로만 알았던 부모님이 나에게 기대한다는 사실에 들떠서 어떻게든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고 그래서 재수까지 했다.


재수를 실패하자 처음으로 나에게 가졌던 기대마저 사라지신 듯 했다. 그 때부터는 정말 '내놓은' 자식이 됐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하고나서 과학학원이랑 재수 학원은 엄마 아빠가 알아봐줬었는데, 내 인생에 드문 날들이었다. 근데 그게 끝나자 나에대한 기대도 끝이었다. 엄마 아빠는 기대를 놓아버리고 "그럼 그렇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모드로 또 돌변. 이 때 내가 별 생각을 다하다가 반대를 무릅쓰고 나 작곡과 입시 준비하면 어떻겠냐고 묻자 너무도 흔쾌하게 "그래. 하고 싶은 게 그거면 해. 학원 보내달라면 보내줄게." 하던 엄마가 생각난다. 뜬금없는 작곡과 입시 했다가 삼수마저 실패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여유로우셨을까. 뭐 덕분에 삼수 커리큘럼도 내가 짰고, 도서관도 내가 다닌다고 다녔고, 학원도 내가 알아봐서 알아서 시험쳐서 갔다. 학원은 도서관에 박혀있느라 접수날짜를 까먹고 놓칠 뻔 했는데 가까스로 접수해서 갔다. 학원에 들어가서 문과로 옮기고 전국 몇등 하는 모의고사 성적표를 들고와서 내가 한시간 정도 "이 정도로 계속하면 서울대 갈 수 있대!" 하면서 옆에서 붙잡고 쫑알쫑알 말을 해야 겨우 "와 정말? 수고했네." 하는 부모님의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수험생 기간에 스트레스 받아서 히스테리라도 부릴라치면 언제나 엄마는 "대학 가도 너인생 못가도 너인생이지 우리랑 별 상관도 없는데 왜 우리가 니 일로 스트레스 받아야 돼." 라는 말을 즐겨하셨다. 언니 고3 때 마루에서 TV도 못보던 시절이 오버랩됐다. 내 수능 전날에 우리 가족은 황금어장을 보면서 셋이 깔깔대고 있었다. 대학 원서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려 삼수 대학원선데, 내가 고민을 할 때도 "너 대학인데 너가 알아서 써야지. 가고 싶은 곳으로 써." 하는 정도였다. 친구들이 거의 다 첫째라 이런 부모님이 특이한 편인데 부모님은 내가 삼수 때 어디대학 무슨과를 썼었는지 아마 지금도 잘 모르실거다. 심지어 내가 그 당시 Y대와 K대 사이에서, 그리고 Y대에서는 사회학과와 신문방송학과 사이에서 엄청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몇날며칠 계속되는 고민에 지겨웠는지 엄마가 "난 너가 이대정도만 가도 만족이야 사실. 니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그 대학들은 그 중에 어디대학 어디과라도 상관없어. 그냥 니가 볼 때 다 떨어지지만 않을 정도로 쓰고 싶은 대로 써." 라는 말씀을 남겼다. 난 그 말이 나한테는 정말 기대없다는 말처럼 느껴져서 속상해서 울었지만.


대학에 와서도 나와 언니에 대한 부모님의 교육방식은 여전하다. 언니는 서른이 다 된 지금도 외박이 자유롭지 않은데 나는 그냥 "밖에서 자고 갈게." 한 마디 미리 하면 된다. 스물 여섯이었나 일곱 살 때 언니가 돈을 다 모아놓고 유럽여행을 가겠다고 했었는데 엄마 아빠가 어딜가냐고 위험하다고 못가게 해서 언니는 못갔었다. 그런데 난 이번 여름에 혼자 37일동안 유럽에 간다. 허락을 맡고 말고 할 과정도 딱히 없었다. 이렇게 자유로운 대신 대학 때까지 알바를 못하게 보호받았던 언니와는 달리 나는 알바를 '장려' 심지어 '강요'받는다. 심지어 아빠가 반대할 줄 알고 "나 새벽 DVD방 알바해도 돼?"라고 넌지시 물었는데 아빠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너 하고싶으면 하는 거지."라는 대답을 해서 충격 받았었다. 공장 알바도 하고 싶으면 하라했다. 어디 가서는 아빠가 못하게 해서 빵공장 알바 못했다고 하지만 그건 내 마지막 자존심 지키기로 하는 말이다. 내놓은 자식인 거 티나는 건 여자애가 열두시 넘어도 집에서 전화 한 통 안 오는 걸로 됐지 뭐...빵공장 알바는 집에서 너무 멀어서 못했다. 언젠가부터 내 결정에 대해 부모님에게 묻는 게 의미없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근데 나에 대한 부모님의 이런 교육방식이 살면서 많은 경우에 원망스럽기도 했는데 지나고 보니 언니에게했던 교육방식보다 좋은 것 같다. 왜 우리 엄마는 다른 아줌마처럼 학원 안알아봐주지. 대학 원서 써야하는데 경쟁률 안알아봐주지. 내 성적표에 관심 별로 없지. 이렇게 고민했던 세월이 길었는데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지나보니 안 그래도 괜찮았네 뭐 싶다. 언니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못하고 부모님의 기대대로 살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있다. 난 그런 게 거의 없다. 대부분 내가 하고 싶은대로 했으니까 뭐. 그리고 언니는 지금도 뭐든 혼자서는 잘 못한다. 그래서 나를 잘 데리고 다닌다. 유럽여행도 가고싶은데 혼자는 무섭다고 나보고 같이가자고 했다. 근데 난 혼자 가는 게 좋아서 거절했고. 혼자 못하는 거 별 상관 없을 것 같긴 한데 내가 언니면 좀 불편할 것 같다. 언니는 외로움도 많이타고, 자기가 응석도 많은 편이라고 하는데 타고난 성격차이도 있겠지만 교육방식의 차이도 있었을 것 같다. 저런 성격때문에 언니가 힘들어하는 걸 볼 때면 좀 안되어보일 때가 있다. 뭐 자라는 과정에서 부모님 특히 엄마한테 받은 스트레스의 양은 언니와 내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고. 


결과적으로 부모님의 교육방식이 언니에 대한 방식보다 나에 대한 방식이 더 좋았다는 건, 내가 언니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내가 언니보다 자라는 과정에서 덜 상처받고 좀 더 행복하게 자란 건 맞는 것 같다.


지금 또 나의 진로문제가 코앞인 상황에서 내가 진로가지고 고민하면 부모님은 또 "너가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씀하신다. 방송국 아니면 안돼 신문사 아니면 안돼 라고 지정해주면 또 소처럼 그 지시를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된 나이건만 그런 지시따윈 절대 없다. 부모님이 내 학점 모르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기고 학사경고를 받아도 등록금 낼 학기가 한 학기 연장되지 않는 한 별 관심이 없으실거다. 그리고 만약 그런 사태가 발생해도 내가 어차피 대출로 해결할건데 어쩌고 하면 바로 그래 하고 마실 분들. 


언젠가 엄마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언니한테는 저렇게 해놓고 나한테는 이렇게 해? 라고. 그랬더니 엄마 대답. 


"너희 언니는 내가 첫 애고 하니까 욕심이 컸지. 그래서 걔를 힘들게 했고 나도 너무 힘들었고. 근데 너는 별 욕심도 없었고 욕심부려봤자 안 된다는 것도 알아서 그렇게 안했지. 그리고 너희 언니는 내가 주장하면 결국은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데 너는 어차피 내 말 안들으니까 포기했어."  



아. 저 말 듣고 생각해보니 무조건 냅둔다고 그것도 다가 아니네. 내버려두면서 삐뚤어지지는 않게 자식을 키우는 방법은 대체 뭐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버릇 없을 때는 나도 엄청 맞고 자랐는데 (언니는 버릇 없을 때 말고도 성적표 숨겨서 늦게 들어와서 어째서 저째서 참 많이도 맞고 자랐다.) 그래도 그렇게 맞고 자라서 이렇게 '전과' 없고 상식적 수준의 양심 정도는 가진 성인이 된걸까? 체벌은 절대 좋은 교육방침이 아닌 것 같은데, 답은 체벌뿐일까? 맞지 않고 자랐다면 내가 좀 막장이 됐을까? 뭐 역시 결론은, 자식을 낳아서 키운다는 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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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안 먹은 음식. 징하게 먹고 사진도 왕창 찍었다. 나 먹는 거에 비해 살 안찌는 거 맞구나. 
사진 찍을 땐 민망했지만 모아놓으니 사진찍어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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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 사람은 얼마나 무게를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 듣고 마음에 박혀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다. 

 
1/
스무살 때 알던 애가 사람은 모두 다 외롭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처음 듣는 순간 평생 안고 있던 마음의 짐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 애에게 되물었다. "그럼 너도 외로워? 정말?" 그 전까지는 나만 언제나 외로운 것인줄로 알았다. 나는 왜 주위에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어도 외로운지 이해가 잘 안됐고 그것 때문에 항상 힘들었었다. 어찌보면 바보 같지만 정말 그랬었다. 저 말이 당연한 걸지도 혹은 틀린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나에게 저 말은 진리처럼 마음 속에 남아 지금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그래. 나만 외로운 게 아니야. 그리고 그 인간 본연의 외로움은 결국 타인이 해결해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나중에 "넌 누구 없이도 잘 지낼 애인 것 같아."라는 뼈아픈 펀치를 맞기도 했지만.) 
 
2/
두번째 명언도 1을 말한 그 애였다. 참 생각이 많은 애였네 싶다. 이 말도 스무살, 그러니까 내가 삼수를 할 때였다. 내가 힘들어 하면서 빨리 원하는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을 했었는데 그 애가 말 없이 한참 내 투정을 다 듣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니가 원하는 그 대학 그 과를 가고 나면 행복할 것 같냐고. 그 행복은 한 학기, 잘해야 일 년 갈거라고. 나라고 아예 몰랐던 바는 아니었지만 원하던 대학에 간 그 애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 그 말이 더 일리있게 느껴졌다.결국 행복은 환경이나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라는 것. 아주 오래 전부터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해온 말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고 행복해지기 위해 자기의 상황을 바꾸려고만 노력한다.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경우는 드물다. 결국 행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먹기이다. 나에게 그것을 일깨워 준 것은 바로 저 한 마디의 말이었다. 

3/ 
"언니, 얘는 먼저 연락을 잘 안해. 나만 맨날 먼저 찾는 것 같아서 자존심 상하고 짜증나. 친구하지 말아버릴까?" "친구 사이에 누가 연락 먼저하고말고가 뭐가 중요해. 보고싶고 얘기하고 싶으면 니가 먼저 하면 되지."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였나 언젠가 언니가 해준 말이다. 그 이후로 친구관계에서 저 말을 언제나 마음에 새겼다. 연락 안한지 오래된 친구에게 먼저 연락하기 조금 멋쩍어도 했다. 덕분에 지금 나는 오래된 깊은 친구가 많다. 언니의 말을 마음에 새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저 말이 없었다면 이제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됐을 친구들도 많다. 언니의 말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오래 만나고 있다. 연락으로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먼저 연락하는 것. 내 인생의 모토 중 하나이다.

4/
이것도 스무살 때 들은 말이다. 토요일이었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요일은 지하철이 일찍 끊기니까 한창 놀다 일찍들어가야 하는 게 짜증났던 나는 "주말은 왜 지하철이 평소보다 더 일찍 끊기는거야. 노는 사람들도 많은데. 더 늦게 끊겨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러자 옆에 있던 애가 한 말. "일하시는 분들도 주말인데 일찍가서 쉬셔야지." 이건 정말 충격의 한 마디였다. 그렇게 노동자를 배려하고 세상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다녔던 내가 저런 사소한 생각도 못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했다. 지금도 세상을 볼 때 하나의 시각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해준 말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 그걸 일깨워준 한마디였다.

5/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새벽에 오랜 친구 중 한 명의 문자가 와 있었다. "100년 후엔 사라질 내 친구야 사랑한다." 공교롭게도 또 스무살 때구나. 웃으며 가볍게 넘길만한 친구의 술주정 문자였지만 앞에 붙은 '100년 후에 사라질'이라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날 나는 저 문자를 보고 '
100년뒤엔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우리모두 없어질거고우리가 친구를 하건 사랑을 하건 뭘하건 10년 아니 3년 뒤라도 우리가 모두 살아있을지 안멀어질지 평생 못보게 될지 모르는 건데 뭘 그렇게 인간 사이 복잡하게 생각하면서 생각이 많고 지금 바라는대로 행동하지 못하면서 살아가야하는건지' 하는 일기를 썼다. 지금도 인간관계에 있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삼켜야 할 때면 저 생각을 한다. 어차피 100년 후엔 지금 알고 있는 사람 중 아무도 이 세상에 없을텐데. 우리가 아무리 오래 봐야 세상 전체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기껏해야 100년인데.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하고,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충실하게 현재를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6/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들은 마음에 남는 한마디다.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다. 연출 수업이었는데 마지막 시간에 교수님은 모든 예술의 근본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진 예술가와 그렇지 못한 예술가의 예술은 천지차이라고. 그러니 한 학기 수업 내내 배운 것을 모두 잊어도 좋으니 저 사실만은 꼭 기억하라고. 그리고 혹 예술을 하지 않게 되더라도 앞으로 언제나 사람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살아가라고 하셨다.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 앞으로 예술을 하게될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평생 저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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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새 불키고 있다가 해가 뜬 걸 알아채고 불을 끄는 순간이 싫다. 그치만 새벽을 포기할 수가 없다. 사실 새벽이 좋아서 새벽에 안잔다는 의지의 문제는 아니다. 그냥 내 몸이 그때 그때 하고 싶은 대로 냅두고 싶은 것 뿐이다. 말로는 일찍 자야지 자야지 하는데 방학의 제일 좋은 점은 사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쯤 누가 꿈을 물어보면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면서 사는 것' 이라고 대답했었는데 학교를 졸업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고민이다. 지금은 대학 시간표도 내가 맘대로 짤 수 있고 방학이 있어서 견딜만 하지만. 친구네 집에서 잠이라도 자는 날엔 졸려도 자기 싫어서 친구가 불을 꺼도 계속 말을 걸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닐 때는 졸리면 자야 한다. 근데 이상하게 평생을 밤에는 안 졸리고 낮에 졸린다. 말못하던 아기 때부터도 밤에 안자고 일곱시간씩 울어서 새벽에 나 업고 동네 돌아다니는 게 엄마의 일이셨다고 하니 이것은 타고난 기질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설은 '아침형 인간'이 누구에게나 통할 수는 없고 누구의 몸에나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건강을 유지하는 법이고 피부는 새벽에 재생하며 몸의 리듬도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자야한다는 것이 이전까지의 통념이지만, 이것은 인공 빛이 발달한 이래로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인공 빛이 발달하자 세상에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올빼미형 인간'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으며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것이 몸의 리듬에 맞는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저녁형 인간 본능을 억제하고 살지만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 중 '올빼미형 인간' 유전자를 가진 아기들의 비율은 해가 거듭할 수록 높아지고, 도시일 수록 그 비율이 높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이 쉬지 않고 2교대로 돌아가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낮 생활자와 밤 생활자가 따로 존재하고 밤(새벽)에도 밖에 나가면 지금의 낮과 같은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주식 시장도, 은행도. 전통적인 아침형 인간 유전자를 보유한 낮 생활자들은 같은 회사의 낮에 일하는 직업에 지원을 하고 밤에 잠들며, 저녁형 인간 유전자를 보유한 밤 생활자들은 같은 회사의 밤에 일하는 직업에 지원을 하고 낮에 잠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러한 시대가 아직 오지 않은 전통적 '아침형 인간'들이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시대에 나는 눈치 없이 '저녁형 인간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가설이다. 
 
두 번째 설은 캐나다에 간 친구가 우리나라에 있을 때는 나와 같은 올빼미 인간이다가 캐나다에 갔더니 아침형 인간이 다됐다는 말을 듣고 생각한 설이다. 그저 단지 내가 한국에 시차적응을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 평생 시차적응을 아직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 저 지구 반대편 어느 나라의 시간에 맞게 잘못 프로그래밍 되어 태어났고 그래서 결국 내 생체시계는 이 나라와 시간이 안 맞는다는 가설. 그래서 지구 반대편 어느 나라에 가면 시차적응이고 뭐고 없이 곧장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해보았다. 마치 내 몸은 북극성과 같아서 겉으로 보이는 낮과 밤의 구분을 따르는 것이 아닌 언제나 같은 절대시간에 잠들고 절대시간에 일어나게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내가 생각해도 좀 헛소리긴 하지만.
 올빼미형 인간이라서 괴롭다. 아침형 인간이었다면 편했을텐데. 올빼미형인간이라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다. 밤에는 밖에 나가기가 무서우니까. 어쨌든 올빼미형 인간들이 하루 빨리 늘어나 세상에 그들의 목소리를 내야한다. 다행히 현재 올빼미형 인간들의 소비력이 나날이 커져서인지 까페 패스트푸드점 등 점점 24시간 영업하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학도 하루 빨리 24시간 수업을 해서 올빼미형 인간인 교수들이 새벽에 강의를 하고 올빼미형 인간 학생들은 새벽 수업으로 시간표를 짜서 듣고 하는 시스템이 정착된다면 좋을 텐데. 어쨌든 글의 제목에 맞추어 올빼미형 인간들을 위해 변명을 해보자면, 우리가 올빼미형 인간인 것은 우리가 유흥을 즐겨서도 아니오, 게을러서도 아니라 우리의 유전자의 작용일 확률이 있다는 것이다. 규칙적으로 아침에 자서 오후 세시인가 다섯시엔가에나 일어난다는 가수 송창식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에서 봤는데, 내 생각에 그는 시대를 앞서 태어난 올빼미형 인간의 시조급 인물이다. 남들보다 너무 빨리 진화된 인간이었던 것이다. 아, 1교시 한 개에 2교시 두 개인 이번 학기가 두렵다. 올빼미형 인간의 자유도 열흘 남았구나. 아, 또 여섯시네, 이제 자야겠다. 끝.


 낮이라 그런지 졸고계신 올빼미님. 이름이 '몰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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