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교시는 교양필수 종교학 시간이었다. 



얄궂게도, 오늘의 주제는 사랑이었고 더없이 얄궂게도, 교수님은 피피티 첫 장이 화면에 뜨자마자 나를 첫번째로 지목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왜 하필 나였을까. 오늘 같은 날에. 이런 질문에. 그런 생각을 잠시 하면서.



"음. 잘모르겠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 정도에서 다른 사람한테 질문을 하시는데 오늘따라 교수님이 내게 재차 물었다.



"아니 그래도, 사람마다 각자 사랑이 어떤 건지 생각하는 바가 있잖아요."



오늘 주제도 모르고 수업을 털레털레 간 터라 생각해둔 바도 없었고 참 난감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버렸다.



"사랑은...음...같이 있으면 좋은 거?"



순간 그냥 나도 모르게 저렇게 대답해 버렸다. 같이 있으면 좋은 거라니...음. 이 말이 맞다면 나는 요새 가족들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그 이후로 수업 내용은 듣는 둥 마는 둥 사랑이 뭘까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나는 내가 사랑이 뭐냐는 질문에 왜 저렇게 대답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고 분명하게 말한 적이 없다.



대신에, "너랑 있으면 좋아." 라고 말했었지.



나는 그걸 사랑으로 오해했고 그건 무의식중에 내 기억에 남아 시간의 압박 속에서 저렇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조금 슬퍼졌지만 그래도 견딜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슬프고 비참하기만 했던 우리 아니 나의 끝과는 달리 우리에게 사랑이라고 기억될만한 조금이라도 로맨틱한 순간이 존재했다는 걸 나에게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혹여나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더라도 이제는 상관이 없다. 잠시나마 세상을 가득 메운듯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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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새벽이 문제여

동구너 오빠랑 대화하다가 과제하려고 보니 어느덧 새벽 다섯시

과제는 안하고 또 판도라의 상자 열었네 술도 안마셨는데

내가 문제다

계속 보다가

오빠랑 아는 사람 중에 지금 오빠랑 연락할 수 없는 사람은 나뿐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엄청 슬퍼져서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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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처음 키운 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독립문에서 슈퍼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유치원 같은 반 남자애였던 보영이가 자기 집 발발이가 새끼를 낳았다고 했다. 집에다가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졸랐고 엄마의 흔쾌한 허락을 받아 보영이네 집에서 강아지를 분양받게 되었다. 엄마는 어릴 때 시골에서 사셨기 때문에 아기돼지나 소, 병아리, 토끼 등을 어린 시절부터 방 안에서 키워본 경험이 있으셨고 동물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덕분에 힘들게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동물을 키울 수 있는 보통 애들과는 달리 나는 흔쾌히 허락을 받아 처음으로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다.



보영이한테 분양받아서였는지 어쨌는지 나는 그 발발이의 이름을 '보보'라고 지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잡종 개였지만 나한테는 정말 사랑스러운 첫번째 강아지였다. 같이 동네를 뛰어다니면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보보는 날이 다르게 자랐고 곧 어린 내가 들기엔 버거운 무게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보보를 낑낑대며 안고 다녔다. 보보는 어린 주인이 자기를 괴롭히는데도 이빨 한 번 드러내는 법이 없었고,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배변을 가릴 줄 알았다. 정말 똑똑했다. 하지만 보보는 털이 너무 많이 빠졌고, 엄마는 그런 보보에 대해 집 안에서 기르기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보는 우리 집에는 가끔씩밖에 갈 수 없었고 주로 우리 슈퍼에서 자랐다.



보보를 키우던 중 아빠가 어느 날 아주 작은 흰 푸들을 쇼핑백에 넣어 오셨다. 아빠가 일하던 건물에서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아서 데리고 오신 것이다. 얼룩덜룩하고 컸던 보보와는 달리 내 고사리 손만했던 뽀뽀는 정말 작고 털이 곱슬곱슬했다. 언니와 아빠는 흰 푸들에게 반한 것 같았다. 언니가 뽀뽀의 이름을 지었다. 털이 많이 빠져 슈퍼에 살았던 보보와는 달리 뽀뽀는 우리 집 안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그 점이 굉장히 못마땅했다. 슈퍼가 문을 닫을 때면 언제나 보보도 집에 데려가면 안되냐고 떼를 썼다. 보보가 집에 오지 못하고 슈퍼에만 있게 되는데, 뽀뽀는 매번 집 안에 있고 언니에게 안겨잤다. 그래서 뽀뽀가 얄미워졌다. 이름을 지은 탓인지 보보는 내 개처럼, 뽀뽀는 언니 개처럼 여겨져서 그런 점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오니 보보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슈퍼를 접고 다시 상도동으로 이사를 가려던 부모님이 털이 많이 빠지는 보보는 집 안에서 키우기 역부족이라고 판단하셨던 거였다. 보보는 한동네에 살았던 이모네 집으로 분양되었다. 하루종일 울었고 대놓고 뽀뽀를 미워하게 됐다. 뽀뽀 잘못은 아니지만 불똥이 거기에 튄 것이다. 마당이 있었던 이모네 집에서 보보는 하루종일 마음을 열지 못한 채 한 방향만 바라보며 낑낑대고 울었다. 그래서 이모도 보보를 키우지 못하고 지인의 집에 보보를 맡겼다. 이렇게 보보가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넘어가는 동안 나는 그 소식도 제대로 몰랐다. 나중에 이모에게 들으니 지인의 집에서도 보보가 그 집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하루 종일 울기만 해서 또 다른 집으로 넘어갔는지 어쨌는지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엉엉 울었다. 어려서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이별은 나에게 굉장히 큰 상처로 남았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보보이야기를 하며 엄마를 원망하곤 한다. 보보가 보신탕집에 팔려갔으면 어쨌을 거냐고. 가족들은 이제 보보도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을만큼 시간이 지났다며 그 이야기 좀 그만 하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보보에게 가끔 너무 미안하다.



덕분에 뽀뽀에게는 마음을 열 수 없었다. 가족들에게 매일 듣는 소리가 너는 개에게 영 정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가족들은 내가 왜그렇게 뽀뽀에게 냉정한지 잘 몰랐을 것이다. 나는 희고 작은 푸들인 뽀뽀가 보보를 내쫓은 깍쟁이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온전히 예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뽀뽀는 어느새 가족이 되어갔다. 



그러다 언니가 스무 살이 되고 대학을 지방으로 가면서 혼자 아파트를 얻어 자취를 하게되었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언니는 혼자 사는 게 무섭고 악몽을 꾼다며 개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뽀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뽀뽀를 언니랑 살게 둘 수는 없다고 했고 개 농장에 가서 새로운 푸들을 사게 됐다. 바로 갈색 푸들 금이다. 그 때부터 금이는 3년을 언니와 함께 대전에서 살았다. 주말에 언니가 집에 올 때는 금이도 집에 같이 왔다. 그러다 언니가 다시 집에와 살게되면서 금이도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어린 시절을 언니와 자란 금이는 언니 개라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 정이 가지 않았다. 뽀뽀는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아 언젠가부터 엄마 개가 되어있었다. 여전히 개들한테 냉정하다고 가족들한테 욕을 먹었다. 나는 뭘 먹어도 개들한테는 잘 안줬고, 개 목욕도 당연히 가족들의 몫으로 여겼다. 잘 때도 개들이랑 자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언니가 스피츠 한마리를 얻어오게 되었다. 언니 친구가 키우려고 사서 집에 갔는데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오갈 데가 없어진 개였다. 언니 친구는 개를 두 마리나 키우는 우리 집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는지 언니에게 부탁을 하게된 것이다. 언니도 세 마리는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아기 스피츠의 모습에 넋을 잃고 집에 말도 없이 나에게만 살짝 귀뜸을 하고 스피츠를 데려오게 되었다. 그 개가 바로 지금의 곤지이다. 이름이 촌스럽지만 곤지를 준 언니 친구가 이름만은 바꾸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집은 난리가 났다. 엄마는 세 마리는 정말 키울 수 없다고 다른 곳에 보내야 한다고 결사반대하셨다. 심지어 엄마가 직접 보낼 곳을 알아보기까지 하셨다. 하지만 아빠와 나는 아기 스피츠인 곤지의 모습에 넋이 나가 곤지를 키우자고 엄마를 설득했다. 매일 언니와 함께 엄마 설득 작전을 짜곤 했다. 학교에 다녀와선 곤지와 놀면서 재밌게 보내다가 엄마가 곤지를 다른 곳에 보내야 한다고 말하면 나는 울었다. 나는 뽀뽀의 처음 이미지 때문인지 푸들을 깍쟁이처럼 느끼고, 보보의 영향인지 뚱뚱하고 털이 풍성한 개를 좋아한다. 스피츠인 곤지는 보보와 같은 이미지였다. 엄마에게는 보보 이야기를 하며 울었다. 보보도 그렇고 곤지도 그렇고 왜 내가 좋아하는 개는 못 키우게 하는 거냐고.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 우리 집에 곤지가 오게 된 건 보통 인연이 아닌데 어쩌면 보보의 환생일지도 모른다고 별 소리를 다 해댔다. 아빠도 엄마의 반대에 주춤해 의견을 내세우지는 못했지만 소극적으로 찬성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였다. 하지만 엄마는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곤지를 보낼 다른 곳이 생길 때까지만 곤지를 집에서 키우기로 엄마와 언니가 합의를 하고 하루이틀이 지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곤지가 원래부터 피부병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뽀뽀와 금이에게도 옮는 것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옮는 병이어서 온 가족이 몸에 빨간 점들이 나는 등 고생을 했다. 동물 병원에 갔지만 약이 들지 않았다. 곤지의 털이 숭숭 빠지고 피부에 이상한 것들이 났다. 그래서 곤지는 우리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피부병이 심한 곤지를 다른 집에 넘기면 결국 버려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엄마는 곤지를 다른 집에 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곤지를 낫게 하기 위해 온갖 동물 병원에 다녔지만 이상하게도 곤지의 병은 낫지 않았다. 조금 낫는 것 같다가도 그대로였다. 



그렇게 꽤 많은 세월이 지나고 곤지의 털은 여전히 군데군데가 숭숭 빠져있었다. 그러다 나를 데리러 밤에 과천에 오던 길에 부모님은 모 동물 병원 벽에 걸린 강아지 피부병 증상 사진을 보게 되셨다. 부모님은 그 밤에 차를 세워 그 사진을 보셨다. 곤지와 증상이 똑같았다. 날이 밝고 곤지는 바로 그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다. 알고보니 그건 개 옴이라는 거였다. 그 전까지 곤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거의 백만원을 썼는데 아무도 몰랐던 그 병이 그렇게 간단한 병이었다니. 그 전 병원의 의사들을 돌팔이라고 욕하고 우리 강아지들은 그 병원에서 약을 받아 먹었다. 그렇게 시간차는 있지만 세 마리가 모두 피부병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가끔씩 엄마는 곤지가 피부병이 다 나았으니 다른 집으로 보내야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셨지만 이미 정이 든 후였다. 엄마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곤지가 똥오줌을 못가렸기 때문도 있다. 곤지가 똥오줌을 못가리니 똥오줌이 아무데나 있어도 세 명 중 누구의 것인지 쉽사리 알 수가 없어 누구도 제대로 혼낼 수가 없었다. 그걸 악용한 똑똑한 금이도 똥오줌을 아무데나 싸기 시작했다. 결국 집은 똥오줌 밭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곤지는 푸들과는 달리 개로서의 본능이 굉장히 충실했다. 이빨이 간지럽다고 온갖 옷, 신발들을 물어뜯어 놓았다. 내 한정판 운동화를 물어뜯어서 맞은 적도 있다. 하지만 곤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뽀뽀나 금이에 대한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곤지에게서 보보를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둘은 생김새는 달랐지만 크기도 비슷하고 털길이나 무게도 비슷했다. 



그렇게 세 마리가 좌충우돌 살아가는 동안 뽀뽀는 하루하루 늙어갔다. 뽀뽀는 우리 가족과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휴가도 같이가고 명절이면 할머니댁도 같이 가는 말그대로 '가족'이었다. 가족이 늙어가고 힘이 없어져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들었다. 뽀뽀에 대한 애정을 깨달은 것은 뽀뽀가 늙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였다. 언니와 아빠는 여전히 금이와 곤지에게 정신이 팔려있었지만 나는 뽀뽀가 항상 눈에 밟혔다. 어릴 때 잘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뽀뽀는 늙어갔다. 눈이 멀고, 귀가 안들리기 시작했다. 몸은 작아지고 등은 굽었다. 그럴 수록 나는 뽀뽀를 더 많이 데리고 나갔다. 죽기 전에 산책을 많이 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무 작고 느려서 목줄을 해줄 수도 없었다. 가족들은 뽀뽀를 데리고 나가면 신경을 써야하니까 잘 데리고 나가지 않았는데, 나는 가끔씩 데리고 나갔다. 뽀뽀를 산책시킬 때는 뽀뽀가 너무 느리게 걸어서 속도를 맞춰 옆에서 걸어줘야만 했다. 눈도 안보이고 귀도 멀었지만 뽀뽀는 풀 냄새와 흙 냄새를 정말 좋아했다. 하루하루 늙어가는 뽀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뽀뽀를 더 많이 안아주고 뽀뽀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2011년 가을이 되었다. 뽀뽀의 건강은 급격히 안좋아졌다. 아무리 아파도 똥오줌은 가리는 뽀뽀였는데, 똥오줌을 가릴 수 없고 제 자리에서 자기 이불에 싸게 되어서 기저귀를 차게 되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자기 자리에서 잠만 잤다. 2011년에 들어서는 산책을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던 뽀뽀였다. 나는 가끔씩 뽀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고 싶었지만 뽀뽀의 건강에 무리가 될 것을 우려한 가족들은  반대했다. 여름엔 날씨가 너무 덥거나 비가 왔고가을은 너무 쌀쌀해서 산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뽀뽀를 안고 동네 슈퍼에 데리고 갔다오는 때만 뽀뽀는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뽀뽀는 기력이 없어졌다. 나는 엎드려서 뽀뽀에게 눈높이를 맞추고는 다가오는 봄까지만 살다 가라고 말했다. 봄에 산책 한 번 하자고. 다가오는 봄에는 가족들이 반대를 해도 산책을 한 번은 시켜줘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뽀뽀는 결국 시월을 넘기지 못했다. 10월 31일 쌀쌀했던 새벽에 뽀뽀는 갔다. 마지막 며칠은 유난히 기력이 없었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부모님은 뽀뽀가 곧 죽겠구나 하셨다. 뽀뽀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한지 이틀째라는 말을 들은 뽀뽀가 죽기 전날 아침에 나는 바로 동네 슈퍼로 달려갔다. 뽀뽀가 가장 좋아하던 천하장사 소세지를 잔뜩 사와서 잘게 잘랐다. 그리고는 뽀뽀의 입에 넣어 씹게 했다. 하지만 뽀뽀는 소세지를 먹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엉엉 울었다. 뽀뽀는 그 날 밤이 지나 새벽에 죽었고, 아빠는 나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뽀뽀를 뒷산에 묻어주고 왔다. 웃긴 건 나는 그 새벽에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보고있었다는 것이다. 아빠가 갑자기 새벽에 잠바를 입고 나와 잠깐 어디좀 다녀온다고 하셔서 이 새벽에 어딜가냐고 물었다. 뽀뽀가 며칠 안남았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뽀뽀의 죽음은 차마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 다음날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문득 생각이 났다. 오늘 아침엔 뽀뽀랑 인사를 하지 않고 학교에 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 불길해졌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뽀뽀의 자리로 달려갔다. 뽀뽀도, 뽀뽀의 이불도 없었다. 그 때 나는 전날 밤에 아빠가 어딜 갔었는지를 알았다. 하지만 믿고싶지 않아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뽀뽀 어디갔냐고. 전화를 끊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 아빠가 들어오시자 아빠에게 왜 어젯밤에 말을 해주지 않았냐고 원망하면서 또 한참을 울었다. 아빠는 내가 너무 충격을 받고 울까봐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뽀뽀는 잠자듯이 조용히 갔다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 가족과 17년을 넘게 함께했던 뽀뽀는 그렇게 가을 밤에 갔다. 



금이와 곤지만 남았다. 야속하게도 금이와 곤지는 뽀뽀의 존재를 금방도 잊은듯했다. 뽀뽀를 찾는 기색도 없었다. 나는 그런 금이와 곤지가 얄미워서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여전히 금이와 곤지는 티격태격하면서 잘 지낸다. 



오랫동안 강아지를 키우면서 우리 가족은 가족만의 애견 방법을 구축해나간 것 같다. 우선 절대로 성대 수술을 시키지 않는다. 다행히도 예전엔 주로 주택에 살았었고, 지금 사는 아파트는 다들 애완동물을 자유로이 키우는 분위기고 방음도 꽤 잘되기 때문에 개 짖는 소리로 항의해오는 이웃은 하나도 없다. 두 번째로 중성화 수술을 시키지 않는다. 키우는 개들이 다 암컷이라 가능한 것이기도하고, 중성화 수술을 시키고 싶지 않아 수컷을 키우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셋째로 털깎는 것을 애견미용센터에 맞기지 않는다. 개를 키우던 초기에는 우리 집도 털깎는 것을 미용센터에 맡기곤 했는데 미용센터에 갔다오면 개들이 무언가 주눅든 기색이 있었다. 그 이후로 몇몇 미용센터의 악명높은 이야기를 듣기도 하면서 이제는 개들을 절대 미용센터에 맡기지 않는다. 요새는 마취를 해서 미용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아파서도 아니고 오직 미용을 위해 개를 마취시킨다는 것은 사람의 지나친 이기심이 아닐까한다. 그 대신 우리 집은 온갖 유명 회사의 바리깡을 모두 사서 써봤다. 엄마와 나와 언니가 달라붙어 개들을 미용한다. 그마저도 큰 일인 요새는 대충 가위로 털을 댕강댕강 잘라준다. 겉모습이 어떻든 어때 하는 심정으로. 연장선으로 겨울에 산책할 때 빼고는 옷도 안입힌다.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산책은 자주 시켜주려고 노력한다. 내가 우리집 개 산책 담당자인데 곤지는 산책할 때 평범한 개처럼 줄 묶인 것에도 불만없이 졸졸 잘 걸어다니고 즐거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산책을 자주 시켜준다. 하지만 금이는 산책을 나가면 줄을 풀어달라고 계속해서 낑낑거리고 나에게 안아달라고 하고, 줄을 푸르면 모르는 사람에게 달려들고하기 때문에 산책을 시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산책을 잘 안시켜주고 싶지만 곤지만 데리고 나가면 난리가 나기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두 마리를 같이 데리고 나간다.  



개를 키운다는 것은 보통의 책임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개를 키웠던 내 몸에는 개들이 낸 상처가 가득하다. 그저께는 언니가 쇼파에서 곤지를 밀었는데 쇼파 밑에 있던 내 얼굴에 곤지가 떨어져 얼굴에 곤지 발톱자국이 선명하게 세 개나 그어졌다. 갑작스럽기도 했고 눈 근처라 긁힐 때는 깜짝 놀랐다. 피도 났다. 아직도 상처가 그대로다. 자고 있었는데 곤지와 금이가 뛰어놀다가 내 팔목을 긁은 적도 있다. 팔목의 상처는 1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그대로다. 팔다리에는 언제나 개들의 발톱 자국이 있다. 하지만 개들도 실수로 한 것이기 때문에 화를 낼 수도 없다. 집에 손님을 데리고오기도 힘들다. 요새같이 늦게 일어나는 방학에는 개들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가족들이 모두 출근하고 나혼자 내 방에서 자고 있으면 곤지와 금이가 내 방에 들어오겠다고 문을 긁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금이의 집념은 엄청나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긁기 때문에 잠에서 깨지 않을 수가 없다. 문을 열어준다고 끝이 아니다. 곧 물먹겠다고 밥먹겠다고 나간다고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그러면 또 문을 열어주어야한다. 그래서 보통 그냥 문을 열어놓고 만다. 



친구들이 우리집에 놀러와서 물이나 음료수, 음식을 먹다가 낮은 곳에 올려놓을 때면 나는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개들이 닿지 않는 높이에 올려놓는다. 그런 행동은 이제 의식하지도 않고 한다. 금이는 왠만한 높이의 음식은 다 건드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물도 자기 물을 안마시고 상 위에 놓인 사람 컵에 얼굴을 박고 마신다. 금이에게서 음식을 지키는 것은 이제 몸에 배었다. 집에 놀러와서 상에서 음식을 먹으면 계속해서 달려드는 금이 때문에 친구들은 음식 먹기를 곤란해 한다. 나는 의식도 하지 않고 양 다리로 금이를 밀면서 편하게 식사한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기인열전 같다고 했다. 금이는 음식 뚜껑을 열어서 몰래 훔쳐 먹고 다시 뚜껑을 닫아놓을 정도로 똑똑한 푸들이다. 뚜껑을 닫다가 엄마한테 걸린 적이 있다. 곤지는 소심해서 틈만 나면 소리를 지르면서 빙글빙글 돌며 이유없이 화를 낸다. 풀도 뜯어먹는다. 집 안의 난이나 풀들을 뜯어먹다가 걸린 적이 있다. 우리 집 개들은 정상이 없다. 개들이랑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뽀뽀처럼 앞으로 금이나 곤지와도 헤어질 날이 오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먹먹해진다. 자고 있는데 내 이불에 들어와 내 몸에 얼굴을 파묻으며 내 잠을 깨우는 곤지, 내가 밖에 나갔다오면 직립보행으로 걸어다니며 나를 반기는 금이는 분명 내 생활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나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유난스럽게 옷을 사주고 개 간식을 사주고 사진을 찍고 하는 사랑은 아니지만 평생을 개들과 함께 해와서인지 나는 개들이 편하고 좋다. 곤지도 금이도 앞으로도 오래오래 나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 간 뽀뽀는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만,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하늘 나라에 갔을 보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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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밴드2를 4화를 다시보기로 보는데 야야라는 밴드가 나왔다. 음악이 독특하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신대철 말고는 정말 반응이 안좋았다. 물론 밴드의 비주얼은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스모키좀 제발...ㅠㅠ저 음악에 오히려 비주얼을 담백하게 하면 괜찮을 거 같은데) 로로스를 처음 들었을 때 같은 신선함이 느껴졌다. 움 역시나 검색해봤더니 헬로루키 대상까지 받은 밴드였다. 하지만 유영석 김도균 김경호는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이라는 가혹한 혹평을 했다.

 

 야야의 사례도 그렇고(야야는 결국 신대철의 의지로 뽑히긴 했지만) 탑밴드2를 보면서 점점 아쉬워져가는 건 네임밸류가 있는 몇몇 밴드들(데이브레이크, 칵스, 피아 등) 제외하곤 점점 그저 그런 밴드들만 뽑는 것 같다는 것이다. 특색 없는 락밴드들 말이다. 물론 직장인 밴드인데 엄청난 기타연주를 보여주고 그런 사람들 보면 나도 경외심 드는 건 사실이지만 결국 프로 밴드는 자기 음악을 해야하고 자기 특색이 있어야 하는 것일텐데. 4회까지 본 지금까지는 베이직'만' 충실한 밴드들을 많이 뽑고 있는 느낌이다. 경연 뒤에도 기억에 남는 밴드는 흔치 않고 대부분 어디 클럽에서 공짜 공연을 한다해도 안 들을 그저그런 음악을 한다. 아닌 밴드들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 그렇다.


 탑밴드1에서 우승한 톡식과 준우승한 포도 뜨지 못했다. 탑밴드2 우승팀도 이대로 가다간 비슷할 것 같다. 데이브레이크나 칵스 피터팬컴플렉스 같이 원래 인기있는 팀들이 우승하지 않는 한.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심사위원 선정의 문제인 것 같다. 이건 탑밴드 뿐만 아니라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들의 공통적인 문제다. 탑밴드의 심사위원은 신대철, 김경호, 김도균, 유영석이다. 네 명 다 인간적으로 정말 매력있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유영석은 라디오 들으면서 좋아하게 되서 오빠밴드까지 다 챙겨볼 정도로 좋아하고, 김도균 아저씨도 정말 좋다. 김경호는 나가수에서 정말 좋았고 신대철도 원래 좋다. 


 하지만 네 명의 아쉬운 점은 지금 '괜찮은' 음악을 만드는 현재진행형 음악인이 아무도 없다는 거다. 과거에 아무리 좋은 음악을 만들었다해도 지금은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네 명 중 두 명이 거장 느낌의 '베이직'을 보는 뮤지션이라면 나머지 두 명쯤은 현재진행형 뮤지션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네 명 다 그렇지 못하기에 음악에 대한 감각이 과거에 멈춰있는 것 같다. 신대철은 그나마 덜한 것 같지만. 젊은 시절에 명곡을 많이 썼다고 해서 지금도 그 감각이 여전할 거라는 건 신기루 아닐까. 물론 그들이 쌓아온 권위가 있기에 대중에게 그들의 평가를 정당화하기는 훨씬 수월할테지만. 


 신대철보다는 서울전자음악단의 신윤철이, 유영석이나 김도균보다는 홍대에서 김창완밴드 하고있는 김창완이 더 적절한 심사위원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나머지는 음악 듣는 게 직업이고 지금도 대중을 상대로 평론을 하는 차우진 같은 음악평론가들이 심사를 했다면 더 나은 심사를 했을 거다. 시청률 때문에 그러지 않았겠지만.


 많은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그런 우를 저지르기 쉬운 것 같다. 과거의 영광을 가지고 있는 '거장'들을 심사위원으로 선정한다고 심사가 잘되는 게 아니다. 지금도 그 감각을 잘 유지하고 있는 뮤지션들을 심사위원으로 세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슈퍼스타k'에서 그동안 그 역할을 잘 해주고 있던 심사위원이 바로 윤종신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가지면서도 현재도 감각을 잃지않은 뮤지션. 윤종신은 정말 신기한 게 90년대의 비슷한 뮤지션들과는 조금 달리 90년대 음악이지만 지금 들어도 정말 안 촌스럽다 싶은 엄청난 명곡은 별로 없는데 (동의하지 않을 윤종신 팬들도 많겠지만 그 시대를 살지 않고 지금에 와서야 그 시절의 음악을 돌아듣는 나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그 대신에 지금 만드는 음악은 지금의 잣대로 듣기에 정말 명곡들이 많다. 이게 왜 신기하냐면 대다수의 (과거의 영광을 가진) 뮤지션들은 과거에는 엄청난 음악을 만들었었지만 지금은 그럴 능력을 상실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현철의 '동네'나 '형', '춘천 가는 기차'는 지금들어도 시대를 넘어선 명곡의 느낌이 있는데 김현철은 지금 괜찮은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 같이. 많은 뮤지션들이 그렇기 때문에 "역시 창작은 어릴 때 더 잘하는 걸까"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하지만 윤종신은 그 예외에 있다. (사족을 달자면 비슷한 포지션에 유희열이 있는데, 유희열의 요즘 노래들은 그의 예전음악만 못하지만 유희열의 '듣는 감각'은 지금도 유효해보인다.)


 '슈퍼스타k'에서는 윤종신이 '희소가치'를 부르짖으며 대중이 누구를 좋아하는지 간파하고 특색있는 지원자들을 찾는 역할을 했고, 이승철이 '베이직'을 보는 역할을 해서 균형을 맞췄다. 덕분에 슈퍼스타k3에서 버스커버스커라는 대중에게 인기를 끄는 밴드를 배출해낼 수 있었다.

 
 음악을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평가한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베이직'을 보는 걸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가창력이나 연주력 같은 대다수의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기본 말이다. 하지만 그 기준으로 뽑은 지원자가 우승을 해도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기란 어렵다. 오디션 내내 대중은 베이직에 충실한 지원자에게 엄청난 지지를 보내는 것 같지만 오디션이 끝나고 다같이 데뷔해서 뚜껑을 열어보면 그 결과는 달라진다. 슈퍼스타k3에서 울랄라세션이 처음부터 끝까지 엄청난 지지를 받고 부동의 우승후보였지만 뚜껑을 열어 둘 다 음반을 내보니 버스커버스커가 훨씬 더 인기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태까지 슈퍼스타k 시리즈는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어왔다. 베이직에 충실한 지원자가 대중의 지지를 더 많이 받으며 결국 우승을 하고, 베이직은 조금 떨어지지만 '희소가치'가 좀 더 있는 지원자는 준우승을 하는 그런 구도말이다. 케이팝스타도 그랬고. 직관적으로 '비교해' 듣기엔 베이직이 더 뛰어난 이들이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희소가치가 있는 지원자들은 호불호가 갈리게 마련이고. 하지만 데뷔를 하면 우승자보다는 준우승자가 더 인기를 끌 확률이 높다. 결국 프로세계에서는 '베이직'을 채우는 사람들은 널렸기 때문에 '희소가치'가 더 중요하다. '베이직'을 넘사벽으로 채우면 모를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다른 지원자와 비교해 '잘하는'(베이직에 충실한) 지원자를 응원하던 대중들은 그들이 대중음악계에 나오면 그들의 음악을 굳이 찾아들을 필요성을 못느낀다. 그들이 아니어도 잘하는 프로들은 널렸으니까. 하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희소성있는 참가자를 응원하던 팬들은 그들이 데뷔하면 더욱더 응원한다. 왜냐면 그들이 '잘해서' 좋아한 게 아니라 그들의 음악 스타일이 좋아서 응원했기 때문에. 그런 팬들에게는 그들을 대체할 뮤지션이 없다.  


 다시 탑밴드로 돌아와서, 동어반복이지만 탑밴드에서는 시대 대중음악의 트렌드에 맞는 '희소가치'를 보는 사람은 그나마 신대철 한 명이고 다들 '베이직'을 본다. 그래서 안 된다. 물론 '베이직'과 '희소가치'를 동시에 극한으로 채우는 국카스텐 같은 괴물이 나타나서 우승을 한다면 다른 얘기지만 아직까지 예선을 보면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슈퍼스타k4에서 윤종신이 빠진다는데 그렇다면 이제 포스트 버스커버스커나 투개월, 존박이 나올 확률은 더 줄어드는건지 조금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음악 스타일은 달라도 '현재진행형' 뮤지션인 싸이가 윤종신의 자리를 채운다는 건 바람직하고도 똑똑한 선택이다. 그래서 슈퍼스타k4는 기대가 되기도 하고, 기대가 되지 않기도 한다.


 결론은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들 문제많고 특히 탑밴드2 심사위원들 좀 갈아엎으라는 거. 이 심사위원 라인업과 심사기준으로는 검정치마나 페퍼톤스 같이 인디계의 아이돌 같은 애들이 무명 때 나왔으면 예선도 통과 못했을 것 같다. 마치 버스커버스커가 슈스케에서 처음에 탑11에 들지 못했던 것처럼. 포스트 국카스텐을 뽑지 못한다면 포스트 검정치마 포스트 언니네이발관이라도 발굴해내야 할 것 아닌가. 음악을 평가하고 순위를 매기는 것에 대한 슬픔은 이제 면역이 됐으니, 거 이왕 하는 거 잘 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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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동생이 부러워

오빠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부러워

오빠의 학교 친구들 후배들 교수님이 부러워

오빠의 군대 친구들이 부러워

오빠네 학교 식당 아주머니가 부러워

오빠가 타는 마을버스의 운전기사 아저씨가 부러워

오빠네 동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부러워

오빠네 집주인 아저씨가 부러워


오빠를 만날 수 있는 그 사람들이 부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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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이고 싶다 머리가 너무 굳어버렸는가보다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재미있는 극영화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쓸 수가 없다 내 머리는 정말 멈춰버렸나봐 심장박동처럼 머리박동이 있다면 지금 난 최저혈압을 찍고 있었을거야 이제 어쩌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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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정지되어있던 현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고 싶다. 예기치 못한 순간의 예상치 못한 여덟 글자. 그건 분명 흔치 않은 상황이었다. 찰나의 순간에도 생각을 했다. 지나보니 그랬더라. 잘한 건지 별로였을진 잘 모르겠다. 그게 중요한지도 모르겠고. 나는 이제 뭐가 좋고 나쁜지 잘 모르겠다. 

          

            마음은 여전하고 세상도 여전하고 모든 게 여전하다. '괜찮다'는 말의 어원은 '관계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어원에 충실하자면 괜찮지 않다. 하지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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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시드니 폴락


이런 구분을 내린 뒤에 생각할 일은, 감독이라면 자신을 위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 우디 앨런


나는, 글쎄, 내 자신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 마틴 스코시즈


일반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어떤 사상을 이미지로 옮기는 일이다. 그러나 내 비밀스러운 정의를 밝히자면, 영화는 늘 개인적이고 추상적인 무언가를 탐구하는 방법이었다.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영화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무엇보다 우선 내 자신을 위해 만든다. 

- 기타노 다케시


그때 깨달았다. 내 삶으로 영화에 연료를 채워야 가장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 올리버 스톤



밤새 읽은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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