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이 짤들을 쓰자

친구들이 와 이건 진짜 너야

박명수의 탈을 쓴 너야

라고 했다


사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지는 게 싫다 

내가 사람을 싫어하거나 정이 없는 성격이라 그런 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많고 

설사 어떤 이유가 생겨 그 사람들을 내일 더 이상 아끼고 사랑하지 않게 된다하더라도

그 다음으로 아끼고 사랑할만한 사람은 곧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스무살 이후로는 어떤 사람을 보면서 먼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올해는 평소의 나답지 않게 새로운 사람을 많이 사귀었다

스무살 넘어서는 가장 많이 그랬는데 그냥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가만히 있어도 그리 되었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 생각이 든다

언제나 인복은 좋은 편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 짤

이것도 다들 나같다고 했는데

친구들에게 내 이미지는 엄청 게으르고, 귀찮은 건 안하는 이미지다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하기 싫은 일은 안하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몸을 되도록 움직이지 않고 잠을 많이 자고 맛있는 것만 먹으면서 

뒹굴거리면서 살고 싶다

앞으로 바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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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아주 황당하고 어이없고 갑작스럽고 비현실적인 그런 일이 벌어진지.




-  


Y의 부고를 들은 그 시점, 나는 친구와 찜질방에 있었다. 맥반석 계란과 식혜를 잔뜩 먹고, '함께 뒹굴거리는 행복이 이런 건가 보다' 하면서. 평소보다 더 평화로웠다. 친구와 나는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렸다. 소금방에서 몸에 소금을 묻히며 뒹굴다가, 산림욕방에 누워서 뒹굴뒹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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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페이스북 뉴스피드에서 마음에 걸리는 글을 본 바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Y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었다. "너 사랑하는데 밉다. 실감이 안난다. 이따가 갈게."라는 글. Y의 죽음을 암시하는 글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설마- 그럴리 없을거라 생각했다. 다른 댓글도 없었고, 설마, 말도 안되지 했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긴 했는지,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글을 본 얘기를 꺼내긴 했다. 친구와 Y는 모르는 사이였지만, 친구에게도 그 글을 보여주니 심상치 않다고 했다. 불안했지만,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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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속하게도,


산림욕방에서 부고를 들었다. 카톡 메세지로. 부고를 들은 건 우연에 가까웠다. Y와 아는 사이인 줄도 몰랐던- 나와는 대학에 와서 밴드를 같이했던- 다른 친구가 내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너 Y 알지? 페이스북 함께 아는 친구에 니가 있길래. 걔 죽었대. 자살했대." 


친구와 Y는 별로 친하지 않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동창 사이에 부고가 돌고 있다고. 자기는 오늘 못 가본다며. 너무 아무렇지 않은 연락이었다. 이런 연락이, 이렇게 오는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


멍해졌다. 


넋이 나갔다는 말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지.  


그냥 현실감이 없었다. 어떡하지.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지금, 뭘 어째야 하지. 눈물은 전혀 안났다. 실감이 안났으니까. 이건 Y의 연극일까? 장난인가? 장난이라면 장난이 심하잖아. 몰래 카메란가? 꿈일까. 혹은 다른 그 무엇일까. 나는 현실 외의 모든 다른 선택지를 떠올렸다. 어쨌든 내가 지금 해야할 일은 Y 그리고 나와 함께 친했던 친구들에게 Y의 소식을 알리는 거였다. 혼자 감당하고 있기에는 버겁고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냥 빨리 그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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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Y와 가장 친했고, 나와도 가장 친한 H에게 전화를 했다. H는 전화를 받지 않아서, 카톡 메시지를 남겼다. 보자마자 전화하라고.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수업중이라고. 나는 그냥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야. Y가 죽었대. H의 첫마디는 이거였다. "뭐?" 그 다음 말은 이거였다. "아시발." H는 사인조차 묻지 않았다. H가 묻지도 않은 Y의 사인을 내가 말했을때, H는 말했다. "뻔하지." 나는, 뻔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인을 듣고 놀라진 않았었다. 하지만 H는 나보다 Y에 대해 더 잘 알았으니, 그애에겐 뻔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M언니는 전화를 받고 내가 말하자마자 울었고, A는 넋이 나가 말을 횡설수설했으며, C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연락을 할만큼 하다 어느 순간 나는 Y의 소식을 반복적으로 전하기가 버거워져서, 나머지 연락은 H가 해주기로 했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조의금도 챙겨야 했다. 목욕탕 가는 동네 백수 차림이었던 데다가, 돈이 한 푼도 없었으니까.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눈물은 안났다. 그냥 Y는 왜 그랬을까. 왜 난 몰랐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해서, 까만 블라우스에 까만 바지, 까만 코트와 까만 구두. 온통 검정색의 옷을 챙겨입고. 렌즈를 빼고 안경을 썼다. 가면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렌즈를 낀 채로 울어도 되는지를 몰라서. 그리고 베를린에 가려고 모아둔 현금 중 10만원을 꺼냈다. 그 순간에도 백수라는 내 현실은 어쩔 수 없는 건지. 5만원과 10만원 사이에서 고민이 됐다. 가면서 생각해봐야지 하면서 10만원을 꺼냈다. 순간, 그런 내가 싫어졌다. 친구가 죽었는데,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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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은 Y가 살던 동네 병원에 차려져 있었는데, 집에서는 너무 멀었다. 두 시간은 족히 걸렸다. 


낯선 동네에서 병원을 찾아가며 난 이 동네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Y의 동네에 온 적이 없었다. Y는 우리집에서 자고 간 적도 있는데. 나와 아이들은 만날 때도 Y네 집에선 먼 시내에서만 주로 만났다. 거기가 Y 외의 모든 애들에게 가까운 곳이었으니까. Y는 매일 혼자 이 먼 길을 돌아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외로웠을까.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장례식장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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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이 없어서 비를 그냥 맞으며 장례식장에 들어갔다. Y의 이름은 상황판에 나타나 있지 않았다. 몇 호실인지 알면서도, 이름이 없어서 조금 헤매다가, 빈소에 앉아있는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하고 들어섰다.


내가 들어가니 아마도 Y의 가족 그리고 친척들일 분들이 일어섰다. 나는 우선 조의금을 내려 했는데, 정신이 없어 입구에서 봉투를 챙기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어떻게 내지 봉투가 어디있지 하고 있는데, Y의 가족분들은 조의금을 받지 않고 계셨다. 5만원과 10만원 사이에서 고민하던 내가- 너무, 어이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기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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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에 들어서서 Y의 영정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이 모든 일이 연극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사실 그 순간의 기억은 흐리다. 오롯이 아득하다. 뭘 어찌해야하는지도 익숙하지 않아서. 국화 꽃을 Y의 앞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서서 기도했다. 그 때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울었다. 상주로 서 계시던 Y의 어머니께서는, 내가 울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셨다. 어머니와 나는 서로를 안고 울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친구냐고, 이름은 뭐냐고 물으셨다. 나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앉아있는 친구들에게 갔다. 내가 울자 언니들이 휴지와 물을 줬다. 


빈소에서의 시간은, 그냥 오롯이 Y 생각만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다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Y에 대한 생각에 빠져, 말없이 혼자 멍하니 있었다. 가장 많이 든 건 죄책감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H와 C가 왔고, 막차시간이 돼서 우리는 집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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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의 며칠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혼자 밥을 먹다가도, 음악을 듣다가도,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며칠 후 Y는 꿈에도 나왔다. H와 내가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는데, Y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나타났다. 난 너무 놀라서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냐며 소리를 질렀고, Y는 대개 죽다 살아돌아온 사람들이 하는 저승사자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Y에게, 너무 놀라서 진정이 안된다면서, 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고 투정을 부렸다. 꿈에서 난 정말 다행이고 또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H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지었다. 나는 꿈을 꾸자마자 일어날 시간이 아닌데도 잠에서 깼고, 깨고 나서 방금 꾼 게 꿈이라는 걸 깨닫고는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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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을 다녀오는 길에는, 부고를 알려준 친구로부터 Y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몰랐던 Y의 이야기들. 


번호를 자주 바꿨던 Y와는 한 달 전 나누었던 한 번의 카톡 대화만이 남아있었다. 한 달 전 Y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었다 했다. 세상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는 과정이었을지,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려한 것이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그 대화에서 나에게 호의적이고 친절했던 Y와는 달리, 나는 Y를 조금 귀찮아했고, 표면적으로 대했다는 사실이다. 그 짧은 대화에서도 나의 무정함이 충분히 느껴졌다. Y도 느꼈었겠지. Y는 나에게 조만간 보자고 했고, 힘내라고 했고, 잘지내라고 했다. 나는 그런 Y에게 "응 너도 잘지내ㅋㅋ"라고 영혼 없는 마지막 말을 남겼고, 조만간 보자던 Y와 나는 다시는 볼 수 없는 사이가 돼버렸다. 


그래서, 나는 내내 죄책감에 휩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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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사람.


Y에게 내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건 아니다. Y와 나는 친한 친구였다. 재수학원에서 만난 Y와 나는 같은 무리의 유일한 동갑 여자 친구였다. 언니들 둘에 우리 둘. 우리는 넷이 친했다. 학원을 다닐 때는 매일 점심 저녁을 같이 먹고, 모의고사를 보는 날에는 이곳저곳 함께 놀러 다녔다. 


그 때의 Y와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도 많이 했다. 그 때의 Y는 아직 남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고, 공부를 열심히 했고, 모범생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다지 모범적인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Y는 그런 나를 어른이 아이 바라보듯 바라보며 챙겨주고 때론 충고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나도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막 사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무리 중에 유이하게 담배를 피지 않는 나와 Y는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집에 가는 길 밤 10시가 넘은 시각, 지하철 역에서 이야기하며 수많은 지하철을 그냥 흘려 보냈고, 더 이상의 지하철을 놓치면 집에 갈 수 없을 쯤이 되어서야 헤어진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하루는, 이야기를 하다 멈추기 싫어서, 내가 우리 집과는 반대 방향인 Y네 집 쪽 방향으로 Y와 함께 2호선 지하철을 타서 한 바퀴 돌아 집에 간 적도 있었다. 이것도 벌써 7년 전 이야기라, 그 때 무슨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는지 자세한 대화 내용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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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Y가 지방의 대학을 가고, 내가 삼수를 하게 되면서 Y와 나는 자주 볼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그럼에도 중간에 Y가 힘내라고 찾아왔던 일은 기억이 난다. Y가 아무 날도 아닌데 말도 없이 가디건을 사서 선물이라고 주어서, 나는 이런 걸 왜 주냐고 했었고, Y는 내가 생각나서 샀다고 했었다. Y는 꽤나 따뜻한 아이였다. 20대 초반의 나는 소위 '츤데레'처럼, 좋아하는 사람일 수록 드러내놓고 애정을 표현하는 법이 없고 삐딱하게 구는 사람이었는데, Y는 나와 달랐다. 진지하고, 사려 깊은 아이였다. 언제나 겉으로 삐딱하게 구는 내게 면박을 주면서도, 내 진심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아는듯, 나를 이해해줬다. 


우리는 언니들과 함께 종종 만나 서로의 생일을 축하했고, 둘이 만나 쇼핑을 했으며,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다. 



-


그러다 시간이 흘러 내가 대학에 오게 됐고, 바빠진 언니들과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주 보지는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Y와 나는 꽤 꾸준히 만났다. 그리고 무렵 Y는 많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변한 건 Y가 대학에 간 후였는데, 내가 나 사는 데 바빠 Y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안경을 벗고 화장을 하기 시작한 Y는 예뻐졌다. 그리고 Y는 좀 달라졌다. 클럽을 다니고, 소개팅을 하고, 미팅을 하고. 언젠가부터 부쩍 남자 얘기를 많이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언니들보다는 학원의 남자아이들과 노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와는 학원을 다닐 때부터 친했지만 Y와는 친하지 않았던 H나 C, A 같은 동갑내기 남자애들과 놀았다. 우리는 만나면 술을 마셨고, 시덥잖은 가벼운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나는 Y와 진지한 얘기를 하지 않게 됐고, Y는 나보다는 H와 더 친해졌다. 


그 사실을 H를 통해 알게 되는 일이 종종 생겼고, 거기서 소외감을 느껴서 Y가 미워졌던 건지 어쨌는지 나는 시덥잖은 이유로 Y를 멀리하게 됐다. 중간중간 몇 가지 Y가 나를 화나게 했던- 사건이 있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정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별 일 아닌 몇 가지 일이 당시엔 Y와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보니, 나에게 Y는 그저, 만나면 남자 얘기만 하는 친구, 그런데 한 남자와 진득하게 만나는 일은 없는 친구, 맨날 나에게 소개팅을 시켜달라고만 하는 친구, 나보단, 남자가 더 중요한 친구. 가 되어있었다. 이게, Y에게 무정해진 나에 대한,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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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Y가 남자 얘기만 한다는 사실에 짜증을 냈을뿐, Y가 왜 그러는지 궁금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카톡을 수시로 지웠다 깔았다 하고 핸드폰 번호를 바꿔대는 Y의 멘탈이 이상하다고 뒤에서 욕했지만, 정작 Y보고 너 대체 왜그러냐고 물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같이 노는 친구들 중에서도 나는 Y의 멘탈에 대해 가장 나이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내 기준으로 보면 Y는 힘들 일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삼수를 하고도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집이 망하고, 연애 또한 망하는 그런 20대 초반을 겪으며, 나는 내 자신을 동정했고, 내 세계에서 '힘듦'의 기준은 끝도 없이 높아졌다. 아르바이트 시간을 피해 수업 시간표를 짜고, 우울해서 상담소를 다니던 시절의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른 이유로 힘들 수 있다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좋은 직업이 보장된 좋은 대학에 가서 예뻐진 외모로 멋있는 남자들을 바꿔가며 만나고, 사고 싶은 옷도 맘껏 사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안정적인 직업을 얻어 즐겁게, 외제차까지 사서 몰고 다니는 Y는 나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지, 힘든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Y를 이해하지 못했다. Y도 이해하지 못할 나에게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Y를 가장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애들이 Y의 멘탈을 걱정할 때도 가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친구들이 모여 Y의 멘탈을 걱정할 때, 나는 "Y가 좋은 남자 못만나서 그런 거 아냐? Y도 괜찮은 남자 만나서 안정적인 연애하면 괜찮아지겠지." 라고 말했었고, Y와는 친했던 순간이 없는 C는 내 말에 "야 아니야. Y는 누굴 만나건 걔 자체가 안정적인 연애를 할 수가 없어."라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보다도 C가 Y를 잘 알았던 것 같다. C도 알 수 있을 정도로 Y의 멘탈은 이미 망가져 있었는데, 나만 그걸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에도 한결같이 Y는 나에게 친구로서의 애정을 표현했는데, 나는 그녀에게 꾸준히 무정했고, 무책임했으며, 무관심했다. 그래서, 그녀를 못봤다.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놔봤자, 결론은 하나다.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 




Y에게는 내가 소개해준 동생 K가 있었다. K는 내가 삼수할 때 같은 학원 동생이었는데, Y의 한 학년 밑으로 Y와 같은 대학에 가게 되어, 나는 둘을 소개해줬었다. 그리고 그 둘은 지방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나보다 더 친해졌다. 


K에게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부고를 뒤늦게 들었다고. Y를 공동으로 아는 사람이 나뿐인 K는 Y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물으며 나에게 자기가 알았던 Y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 터널을 빠져나가느라 오로지 내 터널 끝 밖에는 보지 못하던 그 시점에, Y는 끝이 막힌 터널에 갇혀 있었던 모양이다. Y는 지방의 그 학교에서 꽤나 힘들어했다고 했다. K가 아는 것만 해도 3번의 자살시도를 했다고 했다. 그 전에, H는 Y가 병원에 다니며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고 했었다. 전부 나는 모르는 얘기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몰랐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알았더라면, 내가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을 그렇게 보내진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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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는 죽기 전날 밤 SNS에 죽음을 암시하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는 그 SNS를 하지 않아, 그 글조차 보지 못했다. 그리고 Y가 그 글을 남기기 전날, 나는 H 그리고 M 언니와 오랜만에 만나 즐거운 술자리를 가졌다. 내가 모임을 주도한 술자리였는데, Y가 있어도 자연스러울 자리였다. 하지만 나는 Y를 부르지 않았다. Y가 한 달 전에 조만간 보자고 한 말도 잊고 있었고, 그냥 잘나가고 있는 Y를 보면 작아질 내가 걱정된 무의식 탓이었는지, Y를 부를 생각도 안했다. 


셋이 모였을 때 M언니는 첫 마디로 "Y는 요새 어떻게 지내?"냐고 했고, 나는 "뭐 잘지내겠죠. H가 알텐데?"라고 했다. H는 그냥 웃고 그렇게 넘어갔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Y에게 연락해볼 생각 한 번 안했다.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그 술자리에 대해 후회했다. 그 날 Y를 부를걸. 그럴걸. 


물론, 그랬더래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그랬더라면 적어도 Y를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었을 것이다. Y를 마지막으로 본지 어느새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있었다. 사실 Y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조만간. Y가 말한 조만간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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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의식 과잉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지만 Y의 죽음에 나의 책임도 어느정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그 날이후 나는 자주 죄책감에 휩싸인다. 


Y가 살아 있었을 때 이 모든 걸 알았더라면, Y가 죽기 이틀 전 함께 술을 마셨더라면, Y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그 글을 내가 봤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이 모든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못그랬었을 것이다. 나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었던 K도 H도, Y의 가족도 차마 못한 일이니까. 


하지만 미안하다.


힘든 시간을 외롭게 보냈을 Y에게 미안하다. 너의 힘듦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서. 니가 왜 힘든지 궁금해하지 않아서. 너는 알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널 뒤에서 손가락질하기만 했어. 니 앞에선 아닌 척 했지만 뒤에선 너에 대해 차가운 시선으로 뾰족한 말만 했었어. 이제 용서를 구할 너는 없지만 그래도.



-


이 글은 내가 잊지 않기 위해 쓴다. 언제든 이 글을 보면 떠오르도록, 가장 구체적으로 썼다. 

다시는 다른 사람의 힘듦을 내 기준으로 쉽게 재단하고 말하지 않기를, 힘든 친구에게 먼저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기를, 나에게 의지하려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기를, 마음을 알아주기를, 그래서 후회하지 않기를, 다짐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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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가 보고싶다.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기를.





2009년 어느 새벽 우리가 같이 들었던 노래 

달빛에 흔들려 어디로 가는 건 진 몰라도, 우리 서로 한없이 취해서 보냈던 그 시간들은, 나에게도 정말 소중했었어.

행복했었다는 너의 마지막 말이 정말 진심이었기를 바랄게. 그리고 지금은 더 많이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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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복의 저녁식사 _ 김계란

고등학교 시절의 미묘한 친구관계 묘사와 맛있어 보이는 음식 묘사가 일품인 작품. 인터넷에서 추천 받아서 봤는데 요새 제일 재밌게 보는 만화 중에 하나다. 만두가 좋다. 주인공 복희도 현실적이고.

남과 여 _ 혀노

시니 혀노 작가의 만화를 좋아했다. '죽음에 관하여'도, '네가 없는 세상'도. '남과 여'는 최근 완결된 혀노 작가의 만환데 앞서 말한 둘에는 뭔가 못미치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정말 현실적이라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이 잘돼서 나까지 아련해지는 느낌이 있다.


찌질의 역사 _ 김풍, 심윤수

참 좋아해서 꼭꼭 챙겨봤던 만화. 난 주인공이 찌질이들인 이야기가 왜 이리 좋지. 홍상수 영화들도 그렇고... 사람들은 남자 주인공이 발암 캐릭터(발암이란 말 싫어하지만)라고 많이들 욕해댔지만 난 주인공한테 많이 이입하면서 봤다. 그 시절 연애에서 찌질해 본 적 없는 사람있으면 나와보라그래ㅠㅠㅠ


하이브 _ 김규삼

처음의 긴장감과 타이트했던 전개에 비해 갈수록 전개가 느슨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아쉽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 번 가끔씩 생각나서 몰아보게 되는 만화. 벌레 재난이 닥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어둑어둑한 미래를 너무 오래 보고 있다보니 뭔가 지치는 감이 있다. 그래도 사기 캐릭터인 할아버지 보는 맛으로 본다.


유미의 세포들 _ 이동건

인사이드 아웃을 너무 재밌게 보고나서 인사이드 아웃과 비슷하다고 추천을 받아 보게된 만화. 어~~~엄청나게 느린 전개(머릿 속 세포들 다 보여줘야돼서 어쩔 수 없다.) 탓에 약간 짜증나지만...그래도 귀여운 세포들 보는 맛에 보게 된다. 대체 유미는 언제쯤 연애를 하게 되는 거죠...?!



손의 흔적 _ 유성연

인간의 음습한 내면을 진짜 잘 그린 만화. 전혀 공감이 안될 정도로 음습하고 밑바닥을 보여주는 주인공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때때로 주인공을 보다보면 너무 음흉하고 음습해서 기분이 나빠질 정도다.


그 외 네이버에선 최근 완결된 우리 헤어졌어요, 두근거려요도 꾸준히 봤었는데 둘 다 결말이 Aㅏ...라서. 추천하진 않겠음.
+) 캡쳐하기 귀찮아서 안해왔지만 기기괴괴랑 소름도 재밌게 보고 있다.


레진

내 사랑 레진. 제일 좋아하는 웹툰들은 다 레진에 있더라. 우연인지 뭔지 전부 다 여자 작가분들 작품이다.



미지의 세계 _ 이자혜

친구 K의 추천으로 한 5-6년 전부터 이자혜의 블로그를 구경해왔다.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난 BL물을 정말 싫어하는데...미지의 세계를 추천하면 그런 거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게된다. 억울해ㅠㅠ)도 있지만 염세적이고 예술을 동경하는 아웃사이더 미지의 대학 생활은 분명 공감되는 부분이 더 많다. 상대가 여성인 경우 나와 코드가 맞는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미지의 세계를 좋아할만한 사람이냐 아니냐로 판별하면 된다...그정도로 내가 아끼는 만화다. 다행히 이 만화를 좋아할 것 같아 추천한 여자 친구들은 다 좋아했다. 남자애들은 BL물을 좋아하는 미지의 취향이 거북해서 잘 못보는 듯...


먹는 존재 _ 들깨이빨

먹는 존재의 주인공은 단언컨대 여태까지 다른 컨텐츠에서 정말 보기 힘들었던 여자 캐릭터다. 하지만 현실엔 정말 있는 캐릭터. 여자가 그린 여자 캐릭터라는 게 정말 잘 느껴진다. 남자가 보는 객체로서의 여자가 아니다. 그래서 난 이 만화의 주인공 캐릭터에 엄청난 애정을 갖고 있다. 나중에 내 작품을 만들게된다면 꼭 차용해보고 싶은 캐릭터. 촌철살인의 대사+음식에 대한 통찰이 엄청난 만화. 명대사가 진짜 많아서 내 핸드폰 사진첩엔 이 만화를 캡쳐한 사진이 진짜 많다. 안영미가 주인공인 웹드라마(?)화 된다는데 제작진이나 출연진 뭘로보나 그닥 기대는 되지 않는다...
무튼 먹는 존재를 보다보면 내 맘 속 컴플렉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매 장면 구구절절 공감이 되는 만화.



​단지 _ 단지

술김이긴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유료결제를 하게 만든 웹툰.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서 차별 받으며 상처 받고 자라온 단지의 자전적 이야기다. 나는 전혀 공감되는 지점이 없는 얘기인데도 단지가 너무 안됐고, 또 우리 사회에 수많은 단지들이 있겠지 하는 생각에 보다보면 눈물도 나는 만화. ㅠㅠ 작가님이 잘됐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 유료결제를 했다는...자신의 심각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담담하게 하는 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우리는 시간문제 _ 하양지

처음엔 '짱구는 못말려'와 비슷한 그림체가 취향저격이라 보게됐던 만화. BL물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백합물에도 관심이 없는데, 이 작품은 백합물이라기엔 물흘러가듯 두 여주인공의 관계가 흘러가는 잔잔함이 있어서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만화였다. 우정과 애정 사이 어딘가를 그린 만화랄까. 수현이랑 유진이라는 두 캐릭터가 정말 매력적이고(특히 난 수현이가 정말 좋다.) 그들의 뻔하지 않은 현실엔 절대 없을 법한 관계도 좋았다. 공감보다는 구경의 마음으로...탈모거북의 소설 부분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이 만화를 보고 작가님의 '달콤한 애드립'을 뒤늦게 보게됐는데 완결작이라 무료로 풀려있는 10회까지밖에 못봤다. 근데 달콤한 애드립이 더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다 보고 싶어서 고민중.


신구리의 구리구리 _ 구리

여고 개그 감성이랄까. ㅋㅋㅋ 여자들끼리 모여 있으면 이렇게 웃기고 논다!는 걸 보여주는 만화. 남자들은 이 개그코드를 이해하고 좋아할까 모르겠는데...중고등학교 시절에 여자친구들과 되도 않는 개그를 하고 망가지며 놀아본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할만한 개그 만화가 아닐지. 잔잔하게 웃긴 만화다. 내가 개구리를 좋아하기도 하고...


다음


국민사형투표 _ 엄세윤, 정이품

최근에 보기 시작한 만화...와 진짜 소재&주제의식이 장난 아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싶은 만화. 뉴스 댓글을 보면 흉악범의 형량이 사람들의 기대에 못미칠 때는 진짜 온갖 과격한 댓글이 넘치는데...그런 댓글을 보면 그 감정이 이해가 되면서도 뭔가 불편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 기분에 대한 만화라고 하면 될까. 소재가 소재인 만큼 이 웹툰은 댓글도 참 흥미롭다. 요즘 보는 만화들 중에 제일 애정 갖고 보게되는 만화. 스토리 작가님이 나보다도 어린 대학생이던데 진짜 대단하다 싶다.



좋아하면 울리는 _ 천계영

S언니의 추천으로 보게된 만화. 제목은 익히 들어봤으나 볼 맘은 없었는데 강력 추천을 받고 보게됐다. 천계영 작가의 이전 작품인 패션을 주제로 한 웹툰이 좀 촌스러워서 안끌렸었는데...이 만화를 보니 천계영 아직 안죽었군 싶었음. 90~2000년대 초반 만화 좀 보는 애들 아니 그냥 일반인들도 천계영 순정만화는 안 본 사람이 없을텐데, 그 때 그 시절 순정만화 보던 감성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해주는 만화다. 뭔가 천계영 작가 특유의 클리셰나 예스럽게 평면적인 몇몇 캐릭터(굴미나 일식이라든지)가 좀 아쉽지만 그래도 내용 전개만큼은 여전히 능력자.



무빙 _ 강풀

최근 완결된 강풀 작품. 동생 P의 추천으로 보게됐다. 강풀 특유의 촌스러운 그림체와 전개는 호불호가 갈릴만하지만, 난 그럭저럭 볼 만 했다. 결국 가장 뻔한 신파가 언제나 잘 먹히는 법이니까. 주제는 Love wins. 정돌까?


이 정도. 더 보는 웹툰이 생기면 또 글 써야지.




f(x)의 Pink Tape 앨범이 명반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처음 들었을 땐 그저 그랬다. 근데 내가 좋아하는 웹툰 작가인 하양지님의 블로그를 보다가, <우리는 시간문제>가 f(x)의 Pink Tape 앨범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는 후기를 뒤늦게서야 보게 됐고, 그래서 다시 앨범을 듣게 됐다. 음, 솔직히 말해서 난 다른 곡들은 그냥 그렇다. 별로란 건 아닌데, 명반까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Airplane은 명곡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 뮤직비디오는 팬이 만들어 유투브에 올린 건데, 그냥 노래의 느낌을 잘 살려주는 것 같아서 좋다. 내가 학부 때 만들었던 <푸른 전구빛> 뮤직비디오도 생각나고. 뭐 공항가는 길은 다 좋지. 아부다비에서 사막투어 끝나고 공항까지 안태워주고 호텔에 내려주려고 해서 당황해서 아냐! 너네 분명 나한텐 공항까지 데려다준다고 그랬잖아. 해서 공항가던 그 밴에서 보던 풍경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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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쉬 카푸어의 '붉은 색의 은밀한 부분 반영하기'를 보며 느껴지는 붉은 은밀함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지시하여 상상력 펼치기]

 

 

 나는 내 적혈구가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차례가 다가오는 것이 긴장되었다. 나는 흰 러닝셔츠에 군청색 브리프를 입고, 같은 복장의 남자들과 함께 줄을 서 있었다. 나는 230년 전 영화인 워쇼스키의 ‘클라우드 아틀라스’ 속 복제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을-0755번, 2번 검사대.”

 

 낮은 기계음이 내 차례를 알렸고 나는 검사대로 향했다. 서늘한 기운이 나를 감쌌다. 검사대는 작년과 다른 모습이었다. 검사대는 양 옆에 내 키 높이의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칸막이 앞에는 작은 구멍들이 동그란 모양을 이루고 있었는데, 스피커인듯 했다. 스피커 위에는 스피커를 이루고 있는 구멍들보다 조금 더 큰 구멍이 있었다. 구멍 위에는 굴림체로 ‘구멍에 오른쪽 눈을 대시오.’ 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구멍에 오른쪽 눈을 댔다가 소리를 지를 뻔했다.

 

 구멍 너머에는 하나의 눈동자가 있었다. 초록색 눈동자였다. 깜박이지 않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왔다. 초록색 눈동자의 주인이 말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혈압 130-80, 골수 상태 양호, 백혈구 수치 양호... 뭐 문제될 건 없겠습니다만.”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오는 짧은 순간동안 나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침을 삼키고 싶었지만, 상대가 내 긴장을 알아챌까 그럴 수 없었다.

 

“적혈구가 문제로군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내 하얀 러닝셔츠만이 파르르 떨렸다. 초라한 내 적혈구. 망할. 그래 나는 평생 적혈구가 문제였다.

 

 

“색깔도 아름답지 않지만...그보다 더 문제인 건 연애세포가 아예 없군요. 이런 적혈구는 처음 봅니다. 3차 검사대로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셔야겠습니다.”

 

 처음보긴 개뿔. 나를 검사한 20년동안 검사대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저 말을 했다. 매해 검사원이 바뀌는 걸까.

3차 검사대로 가라는 것은 말이 좋지 곧 탈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검사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이 검사는 일반적인 신체검사를 비롯해 유전자 검사, 생식기능 검사 등으로 이루어진다. 검사에서 일정기준을 충족해야만 짝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사는 이 곳의 규칙이었다. 나는 20살이 된 후로 매년 신체검사에 응모해왔고 40살인 올해가 내 마지막 기회였다. 오늘을 위해 연애세포를 생성해준다는 약을 비싼 돈을 들여 먹기도 하고, 후천적으로 연애세포를 생성하는 법을 알려준다는 학원을 다니는 데에 내 월급을 다 쏟아 붓기도 했지만. 결국 최종결과는 이랬다. 나는 20년동안이나 흰 러닝셔츠와 군청색 브리프를 입고 복제인간이 된듯한 굴욕적인 기분을 느끼면서 이런 검사를 연례 행사처럼 매 해 해왔다. 검사를 받기 위해 내야만 했던 휴가의 급여들만 모았어도, 미소녀 로봇을 세 개는 샀을 거다.

 

 나는 시스템 자체에 반항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정밀 검사를 받으라니. 대체 그 말만 몇 년쨉니까. 더 이상은 저도 지친다구요. 정 안되면 저와 같은 입장의 여자라도 연결해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20년만에 처음으로 스피커의 목소리에 반박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칸막이 너머로 불편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초록색 눈동자가 느리게 한 번 깜박였다.

 

“을-0755님. 그건 아무래도 곤란합니다. 귀하가 알다시피 우리 시스템의 목표는 인간의 마음에 가해질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한…당신의 적혈구는 타인에게 너무 치명적인… ”

 

 어느새 초록색 눈동자는 빨간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스피커를 발로 한 번 뻥 찼다. 

 

 그 순간, 내 피 속 적혈구가 반짝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검사대에서 뒤돌아 나오며, 초라한 적혈구를, 내 적혈구를 사랑해주기로 하였다. 나는 이제 빨간 적혈구를 남에게 들키지 않게 은밀하게 사랑하면 될 일이었다. 스스로를 사랑하여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조차 막고 있는 이 사회에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최대한 은밀하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 밖에는 없었다.


2013.02.13 23:59, 발렌타인데이 기념 작문.




-

2년하고도 조금 더 전에 가장 친한 친구들과 글쓰기 모임을 했었다.

지금은 미술하러 독일로 떠난 ㅇㅇ이가(ㅇㅇ인 이유는 그녀 이름의 초성이 ㅇㅇ이라서) 낸 주제로 썼던 글.

글쓰기 모임 재미있었는데, 좀 하다가 흐지부지 돼버렸다. 

애들이 다들 간간히 그 때 그 글쓰기 모임을 다시 하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

어제가 고백데이였다고 한다. 고백데이 기념 작문일까. 



뎁의 새로운 노래

페퍼톤스 블로그에 올라와서 듣게 됐는데 이 노래 중독돼서 며칠내내 이 노래만 들었다. 

좋은 노래다. 페퍼톤스 초기의 상큼함도 느껴지고.

근데 뮤직비디오는 별로다. 비콘의 기발하고 감각적인 영상이라는데...글쎄. 

유행지난 느낌의 영상인데... 뎁도 덜 예쁘게 나왔고.

뮤직비디오가 아쉬워서 예쁜 사진(앨범자켓)이 있는 유투브 영상으로 퍼오려다가 공식 영상이 아니면 언제 끊길지 모를 것 같아서 그냥 공식 영상으로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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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술마시고 주위 사람들에게 전화 거는 게 술버릇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오늘은 술마시고 집에 가는 길에 문득 너무 외로워져서

오랜만에 술마시고 전화를 걸었다

두 명이 전화를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그 둘이 내 목소릴 듣자마자

뭐 힘든 일 있느냐고 묻는다.

힘든 일이 없으면 연락 안할 정도로 요새 내가 연락을 안해서 그런가. 생각(반성)하는데

두 친구는 그냥 목소리가 힘들어보였다고 했다. 

힘든데도 내가 힘든지 몰랐는데 그 말을 듣고 내가 힘들다는 걸 알았다.

힘들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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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새벽에 쇼미더머니 보면서 이 노래 듣다 눈물나서 당황했다.
진정성이 느껴지고 또 공감도 가는 가사. 블랙넛 앞으로 더 잘됐으면 좋겠다.
바닥이라는 걸 모르는 고고한 사람들은 블랙넛에게 일베충이란 딱지를 평생 붙이고 손가락하겠지만,
사람을 구분하는 데는 일베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있다.
그걸 알지 못한다면, 그냥 계속 손가락질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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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이 자기 부모 이름을 넣어 부른 '패륜송'은 욕하고,

어린 아이가 엄마를 죽이고 싶다고 쓴 동시는 문학사적 가치가 탁월하다 하고,

장동민이 여자들은 남자친구한테 성경험에 대해 말하지 말라한 건 여성비하라고 욕하면서,

김그림이 마녀사냥에 나와 20대 후반인데도 경험 없는 남자는 뭔가 이상하다 별로다라고 한 건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기준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나는 어느쪽이냐면, '패륜송'을 만들고 부르는 것도 애들이 잔혹동시를 읽는 것도 장동민도 김그림도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표현의 자유 지지파이다. 


그래서인지 누구의 표현은 되고, 다른 사람의 같은 표현은 안되고,

내용은 같아도 비속어가 들어가면 안되고, 안들어가면 되고

이런 식의. 본질을 벗어나 판단하는 사람들의 잣대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19금 짱구를 못말려를 보게 해주고, 

19금 영화를 봐도 별 제재를 하지 않고, 19금 음악 CD도 듣고 싶다면 직접 사다주신 아빠 덕일까.

난 애나 어른이나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창작물의 표현에 쉽게 물들지 않는, 이성이 있는 존재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을 짱 좋아한다.) 

어떤 창작물이나 표현에 나쁜 영향을 받았다면 그건 침범하기 쉬운 내면을 가진 개인 혹은 개인이 그런 내면을 가지도록 교육한 부모(애의 경우) 탓이 아닐까.


사람들은 많은 경우 창작물이나 개인의 표현이 (주로, 자신 외의)) 타인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보통 핑계같지만) 표현을 제재한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 대부분은 그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잠재적인 대상에서 본인은 제외해버린다. 

즉, 타인의 이성을 믿지 않는다.


때문에 자꾸자꾸 규제가 늘어난다. 


창작자를 꿈꾸는 지망생에겐 유난히 가혹하게 느껴지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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